5월 16일 인천국제공항에서 KE981 대한항공 비행기로 러시아 블라디보스톡 아르참 국제공항에 내린 후 라즈돌리예 역을 방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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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즈돌리예 역은 1937년 스탈린이 한인을 강제로 중앙아시아로 이주할 때 이주가 시작된 가슴 아픈 역으로 꼭 가보고 싶은 곳이었다. 역의 모습이 깨끗하고 밝은 전경은 아니었으며 여객열차와 화물열차가 많이 보였다. 우리민족의 설움이 쌓여 있는 한이 맺힌 역이다.
연해주는 비옥하고 광활한 땅이어서 농사를 짓기 위해 우리 동포들이 많이 가서 개간도하고 정착하고 살았다고 한다. 주로 두만강을 넘어온 북한주민이 많다고 한다. 일행은 버스 안에서 숙연한 가운데 선구자 1~3절을 다함께 열창했다.
블라디보스톡(연해주)의 거리는 아직 전차길이 놓여있었고 중심가에는 차들도 많았다. 한국산 중고버스가 90%이상 거리를 누비고 있었다. 승용차는 일제가 많이 보였다. 러시아의 면적은 한국의 78배 정도, 인구는 약1억4천만명, 원유매장량은 무진장이라고 가이드가 설명했다.
블라디보스톡 시내는 중앙난방식으로 전가구가 사용한다고 한다. 교민은 약300명이고 고려인 3만5천명이지만 시내에는 북한사람이 많다고 했다. 가이드로부터 가급적 혼자 다니지 말고 야간에는 더욱 조심하라는 주의를 들었다.
종교는 러시아정교, 바티칸은 반대다. 연해주청사를 외부에서 보고 항구에서 퇴역잠수함을 견학하며 군사강국의 과거를 짐작했다. 여기서 2시간반 정도 가면 사할린이 있다고 했다. 사할린 동포는 3만 이상이고, 일제 강점기에 강제징용으로 경상도 사람이 주로 많다고 했다.
블라디보스톡 연해주 신한촌 기념 탐방하다.
조선의 정치 불안과 빈곤으로 한인들이 연해주 이주가 시작됐던 1863년 하산지역 남쪽을 중심으로 1870년대 8,400명, 1923년에는 12,000명, 당시 한인마을에는 한인극장, 문화회관, 한인자치기관, 한글을 사용하는 등 한인 정착이 성공적으로 진행 됐다.
1937년 소비에트 인민위원회의 강제이주 명령에 따라 2차례 강제이주가 집행되고 그때부터 러시아에 산재해있는 고려인 동포들의 한과 설움의 역사가 시작됐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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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으로 동포애와 국력이 얼마나 중요하다는 것을 새삼 느꼈다. 고려마을은 바닷가 뒤쪽 초가집 마을인데 강제이주 후의 흔적이 없었고 신한촌이라는 비석 한 개가 있었지만 철조망이 쳐져있어 밖에서 보았다. 역사의 마음 아픈 곳, 매년 3월 1일, 8월 15일 추모식을 거행한다고 한다.
중앙광장을 거닌 후, 전용버스로 옛 발해성터와 이상설의사 기념비에서 일행이 함께 사진을 찍었다. 독립운동가 이상설은 고종의 밀지를 받아 이준, 이위종과 함께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특사로 참석하려 했으나 일본에 의해 거부당했다. 경주이씨 중앙화수회에서 기념관 건립 등 많이 협찬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민족의 최고의 가치는 자유와 독립이다. 이를 수호하기 위한 투쟁은 민족적 정신이며 정사에 빛난다. 신한촌은 그 정신의 요람으로 선인들의 얼과 넋이 깃들고, 한민족의 피와 땀이 어려 있는 곳이다. 1910년 일본에 의해 국권이 침탈당하자 국내의 지사들을 신한촌에 결집해 국권회복을 위한 필사의 결의를 다진 곳이다.
우정마을은 1937년 강제이주 후 후손들이 다시 찾아와서 폐허속을 다시 개간했다.소련이 붕괴되면서 중앙아시아에 살고 있었던 고려인들이 희망을 찾아 자신들의 선조들이 터를 닦았던 연해주 쪽으로 역이주 해오고 있지만 그들의 연해주 정착이 쉽지만은 않았다. 이러한 사정을 들은 대한건설협회는 연해주 중심부인 우수리스크에 약 1000동의 주택을 지어 이주해오는 고려인들의 정착촌을 지을 계획을 세웠다.
1997년 터를 닦고 집을 지으려고 했는데 35채만 짓고 IMF가 터져 공사를 중단했다. 2004년 북아평화연대에서 이곳에 입주해 이주해오는 고려인들의 주택지원, 농업기술지원, 농업대출사업, 중앙아시아에서 이주해온 고려인 30여 가구와 러시아에서 이주해온 4가구, 기타 2가구 등 약100여명이 살고 있다. 우정마을은 고려인을 도우는 단체가 현존하며, 농사와 양돈 등 삶의 터전을 만들어주고 있다고 한다.
우리 일행은 2시에 예약하고 갔는데, 동북아연대 한사람과 마을주민 10여명이 환영해줬고, 우리가 준비한 희망의 액자2점과 금일봉을 전달하고 동포애와 우정을 쌓았다.
버스를 타고 좌우를 보니 놀리고 있는 땅이 망망대해 같았다. 길가의 나무는 주로 자작나무라고 한다. 러시아 하산, 중국 훈춘, 북한 웅진이 접한 3국경 지역이라고 했다. 기후는 우리나라 5월 중순보다 평균 5~7도 추웠고 여행시는 외투는 꼭 챙겨야 될 듯하다.
현대에서 운영하는 현대 서울본사와 똑같은 건물양식, 현대그룹 건물을 견학하고 블라디보스톡에서 국제버스 탑승후 중ㆍ러 국경 장영자세관 입국수속 후 중국 훈춘으로 국경을 넘었다. 러시아의 세관건물은 조금 초라해 보였고, 중국쪽은 최신건물에 조금 화려했다. 세관쪽으로 들어가니 조선족이 있어 한국말이 통했다. 훈춘시쪽에는 이미 중국버스가 준비돼 있었는데 버스도 신형이고 조선족이 직접 운전하고 있어 언어가 통하니 불편함이 없었다. 도로는 2차선, 4차선, 어떤 곳은 8차선까지 주위의 땅들도 거의 개간돼 노는 땅이 없어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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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이 움직이고 있구나!’ 가슴에 와 닿았다. 17년 전과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17년전 중국과 국교가 열리고 중국 북경, 상해, 심양, 장춘, 백두산을 갈 때는 비포장도로에 먼지 투성이었지만 지금은 거의 포장이 되고 도로망과 건물들이 너무나 눈부시게 달라져 있었다. 15년 전에는 우리나라 돈이 가치가 있어 여행객이 수월했는데 요즘은 상황이 많이 달라졌다.
당시 연길시 시장에 들렀는데 가마니 위에 돼지고기를 팔았다. 옛날 추 있는 돌저울로 달고, 파리가 우글거렸는데 지금은 완전 연길시가 새천국 같았다. 그때는 다 허물어져 가는 붉은 벽돌집 판자집이었는데 지금은 흔적조차 없어졌으니 참으로 상전벽해같은 변화를 느꼈다.
아침 일찍 도문대교를 견학했다. 두만강 한복판을 중심으로 국경이란다. 대나무로 엮은 노 젓는 배를 타고, 여럿이 함께 ‘두만강’을 노래했다. 인기척 없고 잠자는 이북을 바라보며, 언제 통일이 되나… 그저 저 멀리 바라만 볼 뿐이었다.
용정 도착 대성중하교, 윤동주시비 관람, 용두래우물, 해란강 견학
대성중학교도 사전연락한 관계로 기다리고 있던 윤동주(이상설) 기념관장이 우리를 환영했다. 김종우 도지회장의 친필액자와 성주 배 원장의 친필액자, 경주 오해보 원장, 울진 전인식 원장 등 일행이 사전 준비한 액자와 참가한 원장들이 특히 각자 금일봉을 전달했다.
(사)해외한민족 연구소가 1990년 2월 칠판, 분필, 타자기, 복사기, 컴퓨터,등 자재를 지원했고 특히 금성출판사 회장 김낙준씨가 동교의악기일습을 지원, 합주대를 창설했다. 기념사진을 촬영하고 민족시인 윤동주의 출신교인 용정중학교의 재정지원을 한국의 독지가와 단체에서 많은 지원을 하고 있다는 설명을 들었다.
학생수는 약 2000명 이상이다. 서울 종로구 당주동에 있는 (사)해외한민족연구소는 지금도 중국 조선족의 얼을 심어주고 고구려, 발해유적 등을 연구해 연구서 발간과 고구려 국제학술회의, 중국지역 항일운동 유적연구, 고구려 고분벽화 사진전 등 많은 활동을 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조국애를 새삼 느꼈다.
윤동주 생가 옛터 방문
윤동주 생가는 1900년경 시인의 조부 윤희연 선생이 지은 집으로 기와를 얹은 10칸과 곳간이 달린 조선족 전통집이다. ‘반일 민족운동, 반일민족 문화교육, 선구자, 규암 김약연, 나의 행동이 나의 유언이다.’라는 글들이 칠판에 쓰여 있었다. 생가에는 주로 한국관광객이 많이 찾아오는데 그날도 60여명이 함께 관광했다.
이도, 백하를 출발해 6인1실 열차를 타고 밤새 7시간정도 달려 통화에 도착했다. 아침식사를 하고 버스로 2시간정도 달려 집안에 도착했다. 가는 도중 차창너머 들판 곳곳에 우리나라와 같이 비닐하우스, 밭고랑에도 옛날에 볼 수 없던 비닐농사법이 상당히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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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왕비/릉, 장군총, 국내성, 5호묘, 환도산성탐방 일정에 들어갔다. 태왕비는 외부에서 한 바퀴 돌며 관람했고 사진촬영이 금지돼 전면 외부에서 일행이 합동사진을 촬영했다. 그날따라 너무 더워 옷에 땀이 흠뻑 젖었다. 고분벽화 내부를 둘러보고, 장수왕릉도 관람했다. 환도산성은 많이 훼손돼 있었고, 성터만 있고 주위에 농부가 밭에 고추 감자 옥수수 등 소에 쟁기를 매 밭가는 것이 보였다.
‘여기가 옛 고구려 땅이구나!’ 생각하니 감회가 깊었다. 가이드의 말에 따르면 중국에서는 고구려 역사를 중국의 역사로 왜곡하며 교육시간에 고구려 역사는 아예 가르치지 않는다고 했다.
지난 5월 서울중앙박물관에서 ‘찾아가는 박물관’으로 영천에 와서 고구려, 발해 역사를 어린이들께 보여주고 일깨워준 것은 참으로 잘한 일이었다고 생각했었다. 잊어서는 안될 역사를 후세에 가르치는 것도 기성세대의 몫일 것이다.
집안도 개발이 한창이다. 옛날 헌집은 헐고 땅은 국가 소유임으로 도시계획은 일방적이다. 막 밀어붙이는 식이다. 가이드의 이야기로는 아파트를 많이 건설하는 것 같아 여기에 대체 입주케 하고 도로는 계획도시 모양 좌우가 뚫린 형이다. 그래도 주민들은 초췌해 보였다. 장뇌삼이라고 해 우리 돈으로 10뿌리에 1만원을 받았다.
집안은 유리왕 22년, 서기 3년부터 장수왕이 수도를 평양으로 옮기기 전인 427년까지 약400년간 고구려의 수도가 자리했던 곳이다. 졸본성에 이은 고구려 제2의 수도였던 국내성은 사각형 방형으로 북쪽의 우산과 서쪽 칠성산에 에워싸인 배산 임수의 천연요새였다고 한다.
압록강 서쪽에 위치한 국내성은 총면적 13,000평, 성 길이 2,686m, 높이 1~5m로 총6개의 성문과 해자가 갖춰져 있다. 1921년 중국정부가 성을 보수하면서 옹성의 모습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고 한다.
광개토대왕비에서 서쪽으로 200m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한 정사각형의 계단식 석실묘는 남아있는 높이만 14.8m 길이가 66m, 내부에 직사각형 모양의 돌이 2개 있는데 대왕과 대왕비를 모신 듯하다. 광개토대왕비는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이라는 광개토왕의 시호를 따라 중국에서는 호태왕비(好太王 碑)라고 불린다.
북부 요녕성에 위치한 환인현은 만주족 자치구로서 면적 3,547㎢, 인구 총30만으로 만주족이 30%이고 한인을 비롯한 14개 민족이 살고 있다. 고구려의 첫수도인 졸본성의 터로 추정되는 오녀산성은 2004년 세계문화유산에 등록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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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몽이 부여를 떠나 고구려를 세운 곳으로 추정되는 오녀산성(五女山城)은 환인시에서 8㎞ 떨어진 곳에 있는 자연의 성벽에 둘러싸인 성이다. 올라가지는 못하고 멀리서 바라만 봐도 깎아지른 듯한 벼랑인데다 높이가 100여m 바위덩어리였다. 대형버스로는 못가고 산에 전용으로 올라 다니는 소형 버스가 여러 대 대기하며 손님을 맞이했다. 박물관에서 관람을 마친 후 벽에 걸린 한반도 지도를 보고 이상인 울릉문화원장과 함께 깜짝 놀랐다. 우리의 동해가 일본해로 표기돼 있었다.
단동은 중국의 요녕성과 북한의 국경지대로 현재는 중국 최대의 변경 도시다. 인구는 약250만이고 단동시내는 약60만 정도라 한다. 관광객이 끊이지 않는다. 건너편에 북한을 바라볼 수 있는 압록강은 사람들을 많이 모을 수 있는 관광지 역할을 한다. 압록강에 중조우의교(中朝友宜橋), 단교(斷橋), 6ㆍ25당시 중공군의 개입을 막기 위해 맥아더 장군이 폭격해 단교가 된 듯, 다리 옆에 <1950년, 11.8, 至11.14일미공군 b29폭격, 1905년 건설>이라고 적혀 있었다. 중국이 관리하는 다리 끝까지 걸어보면서 감회에 젖었다.
특히 우리일행은 다리아래에서 유람선을 탔다. 건너편은 북한 신의주로 말을 해서 통할 정도까지 배가 근접해 주는데 유람선에는 주로 한국관광객이 많이 승선했다. 북한 동포들은 손을 흔들며 환호성을 해도 아무반응이 없고 답도 없었다. 군용차 비슷한 자동차 2-3대에 군복차림의 노역인부가 하역하는 것 같다. 더욱이 야간에는 단동시 쪽에는 오색찬란한 야광불빛이 있는데 북한 신의주 쪽은 캄캄한 밤이었다.
양국간 양도시간 너무 차이가 많아 안타까울 따름이다. 언제 통일이 될지…. 여기에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할 일이 있다. 중국은 한국전쟁 참전을 미국의 침략에 대항해 북한을 돕는 전쟁이라는 뜻인 항미원조(抗美援朝)라고 생각한다는 점이다. 한중간 역사관 차이를 극명하게 드러내고 있다.
옛 이름으로 봉천인 심양은 인구가 860만으로 도시인구는 300만이다. 중국 4대 도시 중 하나로 중국에서 제일 인구가 많은 중경직할시가 2400만이다. 심양에는 한국인이 한때는 2만명이었지만 지금은 5천명 정도이고 조선족은 약 20만이라고 했다. 심양공항로도 새로 크게 뚫리고 도로는 8차선인 것 같다. 옛날 초라한 변두리집은 거의 철거되고 대형 고층아파트가 여기저기 온통 건설 붐이다.
마지막 일정이다. 순수역사탐방이라 쇼핑은 아예 없었고 이어지는 버스ㆍ열차 강행군에 고생을 너무 많이 해 지쳐서 힘도 빠지고 맥도 빠져 멍하다. 그래도 기행문이라도 써야겠다고 생각하고 가이드 설명 열심히 적고, 탐방지에서 기념이 될 만한 사진을 찍고 노트에 연필이 꼭 붙어 다녔다. 이번 여행은 정말 값진 역사문화탐방이었다.
21세기는 문화가 세계를 지배한다. 문화로, 미래로, 세계로, 문화관광 한국을, 우리는 화합하고, 하나로 뭉쳐야 국권을 신장하고 올바른 역사를 되찾고 국력을 신장해야 된다. 우리는 중국의 동북공정, 서북공정 역사도 바로 잡고 힘을 길러 조국수호와 보다 나은 미래를 준비해 나가야겠다.
경상북도 문화원장 18명과 함께 5월 16일부터 23일까지 7박8일간 러시아, 훈춘ㆍ연길ㆍ집안ㆍ단동 등 중국의 동북공정 현장인 고구려ㆍ발해 유적을 탐방한 기록이다.
이글을 씀에 있어, 보고, 듣고, 느낌에서, 내용이 다소 차이가 있고 틀릴 수도 있지만 근본적으로 본인의 애국 애족의 마음으로 깊이 이해해줬으면 하는 바람이다.
이번 동북공정 현장 역사탐방은 막연한 관광이 아니고 직접 보고, 역사의 현장을 후세에 올바로 전달하기 위한 몸짓이었다. 우리의 문화를 잘 보존해 움직이는 문화원, 좋은 문화 창달과 생산적인 문화원으로 우리 모두 함께 했으면 한다.
2009년 6월
영천문화원장 성 영 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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