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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현숙 복지팀장 | 3ㆍ1독립운동은 일제가 우리나라를 강점한 지 9년 뒤인 1919년 3월 1일에 일어난 우리 한민족의 독립시위 운동으로 우리나라 민족해방운동사에 거대한 분수령을 이루는 전민족적 항일투쟁이었다.
흔히 3ㆍ1독립만세운동이 1918년 1월 미국의 윌슨 대통령이 발표한 ‘민족자결주의(民族自決主義)’의 영향을 받아 일어난 것으로 이야기한다.
그러나 ‘민족자결주의’는 제1차 세계대전의 전후처리원칙 14개조항의 일부로써 파리평화회의에 채택되어 식민지국가의 독립운동에 많은 영향을 끼쳤으나, 우리 선열들은 그 이전부터 국내․외에서 끊임없이 독립운동을 시도하였었다.
우당 이회영 선생은 수백억 원에 달하는 전 재산을 팔아 일가를 이끌고 서간도로 망명, 삼원보에 자치기관인 경학사(耕學社)를 조직하고 신흥강습소(신흥무관학교의 전신)를 설치하여 국내에서 모여드는 애국청년들을 가르쳤다.
무력으로 독립을 쟁취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박용만은 1912년 하와이에서 국민군단(國民軍團)을 조직, 스스로 군단장에 취임하였다.
1914년 국내에서 비밀결사인 대한독립의군부가 결성되어 극비리에 전국적인 규모의 독립선언운동을 하려다가 한 사람의 실수로 발각되어 미수에 그쳤고, 1917년 11월에는 울산 출신 고헌 박상진 의사가 총사령인 비밀결사 대한광복회에서 친일 부호를 처단하여 세인을 놀라게 한 사건이 발생하는 등 3ㆍ1운동의 기폭제가 될만한 사건들은 계속 이어져왔다.
최초의 독립선언서라 할 수 있는 것은 1907년 9월에 발표되었는데, 이 선언문을 쓴 사람은 13도 창의대장이었던 이인영이었고, 그 선언서의 이름은 ‘해외동포에게 보내는 격문(Manifesto to All Koreans in All parts of the World)'이었다.
두 번째는 1910년 8월 러시아 블라디보스톡에서 발표되었으며 이 선언서에 서명한 인사가 무려 8천 6백 24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1914년 세 번째로 발표된 독립선언서는 독립의군부를 조직하여 국권강탈의 무효와 국권 회복을 내외에 선언한 것이었다.
네 번째는 중국과 러시아에 있던 해외 독립운동가들이 단합하여 1917년에 발표한 ’대동단결선언‘으로 우리 민족이 모두 하나로 뭉쳐 독립운동을 일으키자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간도지역 독립운동가들이 발표한 ’무오독립선언서(1918년말 또는 1919년초)와 3ㆍ1만세운동이 일어나기 바로 전인 1919년 2월 일본 동경에서 유학생들이 발표한 ‘2ㆍ8독립선언서’ 등이 있다.
2ㆍ8 독립선언은 일제의 온갖 탄압에도 불구하고 한민족의 자주독립의지가 살아 숨쉬고 있음을 세계만방에 보여주었을 뿐만 아니라 전국방방곡곡에 울려 퍼진 3․1만세운동의 전주곡이자 조국광복의 힘찬 예언이었다.
3ㆍ1운동은 순수한 평화적 시위였으나 일본군은 이를 무력으로 진압하였으며, 서울에서 시작된 3ㆍ1운동은 불과 수 개월만에 전국으로 퍼져나갔고 일본, 연해주 등 해외에서도 벌어져 1년여 동안이나 지속되었다.
임시정부 대통령을 지낸 백암 박은식 선생은 ‘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서 시위 횟수 1,542회에 연인원이 202만여 명에 이르렀다고 하였고, 3월 1일부터 5월말까지 3개월동안 피살자 7,509명, 부상자 15,961명, 피검자 46,948명이며, 교회당 47개소, 학교 2개소, 민가 715채가 불탔다고 기록하고 있다.
우리는 3ㆍ1절에 대하여 다시 한 번 곰곰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일제의 악랄한 진압으로 이렇게 많은 인명의 살상과 재산상의 손실이 발생하였는데, 어떻게 국가의 경사스런 날이라고 축하를 하며 웃고 떠들 수 있겠는가?
현재 국경일로 지정된 제헌절ㆍ광복절ㆍ개천절ㆍ한글날 등과 3ㆍ1절은 그 의미와 성격이 전혀 다르지 않은가? 3ㆍ1절은 경축일이 아니라 선열들의 위훈을 기림과 동시에 희생을 추모하는 날이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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