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http://www.yc24.kr/news/articleView.html?idxno=74
마을 선원, 양택 매산고택, 음택 하절 으뜸 | |||||||||||||||||||||||||||||||||||||||||||||||||||||||||||||||||||||||||||||||||
| 보현산 별빛축제와 함께 하는 ‘영천 3대 길지’ 탐방 | |||||||||||||||||||||||||||||||||||||||||||||||||||||||||||||||||||||||||||||||||
| |||||||||||||||||||||||||||||||||||||||||||||||||||||||||||||||||||||||||||||||||
|
2007년 보현산 별빛축제가 8월 11, 12일 이틀간 자양면 충효리 검단마을에서 열린다. 다양한 체험과 전시ㆍ참여ㆍ공연행사가 어우러져 많은 볼거리를 제공할 것으로 기대된다.
아름다운 풍광에 기름진 땅을 찾아 수천 년 전부터 옛 사람들이 삶의 자취를 남긴 고장 영천. 이수삼산이 풀어놓은 풍요로운 들에서 일신의 평안보다는 타인과 사회를 위해 살아갔던 넉넉하고 고매한 선비 정신이 움트는 고장이다. 예부터 ‘이수삼산의 고장’으로 알려진 영천,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대체로 이수는 남천(자호천)과 북천(고현천)을, 삼산은 보현산과 마현산, 작산으로 보고 있다. 풍수학자 이몽일씨는 옛 영천읍성 터의 종산(宗山)이자 진산(鎭山)은 북의 보현산(혹은 母子山)이고, 그 내맥을 이어받은 주산은 마현산(馬峴山)이며, 명당수인 남천(南川) 너머로 나지막이 병풍을 두르고 있는 듯한 작산은 안산(案山)으로 그 경우, 읍성의 남문과 북문이 있었던 창구동의 남북 간선도로를 중심으로 해서 볼 때 그 남쪽 끝에서 왼쪽으로 약간 비틀어 위치한 조양각 터는 봉황의 머리에 해당하며, 좌측의 문내동 언덕은 봉황의 왼쪽 날개이자 좌청룡, 그리고 우측의 교촌동 뒷산에서 과전동으로 이어진 지맥은 오른쪽 날개이자 우백호에 각각 해당한다고 보았다. 자양면 성곡리 기룡산 자락의 문중묘역인 하절과 백학이 알을 품고 있는 형국이라는 임고면 선원마을, 매화가 가지를 드리운 모습을 간직한 임고면 삼매리 매곡마을 매산종택의 집터 등 영천의 3대길지로 꼽히는 명당은 모두 오천정씨 문중에서 소유하고 있다. ▶ '정효자가 낳은 명당' 하절, 시총ㆍ억수 무덤 눈길
아버지가 병석에 눕자 옷을 벗고 자리에 누운 일이 없었고 먹고 자는 것조차 잊어버렸다. 아버지 머리맡에서 병간호를 했으나 애석하게도 아버지는 세상을 떠났고 묘터를 잡아 장례를 치르는데 한 백발노승이 지나가면서 “정 효자 댁의 묘소를 어찌 이곳에 쓰는지 이상한 일이로다”하면서 혼잣말처럼 중얼거리고 지나갔다.
정윤량은 이 노승을 집으로 모셔다가 후히 대접할 생각으로 소매를 끌었으나 노승은 사양하며 “소승은 신령의 명을 받고 온 설학(雪學)이요, 다시 만날 날이 있을 것이니 너무 심려하지 마시고 오늘은 길이 바빠서 이만 가겠소.”하고는 기어이 떠났다. 뒤따르던 정 효자가 언덕 위에 오르니 노승은 이미 온데 간 데 없었다. 정 효자는 여묘살이 삼년을 마치고 퇴계 이황 선생 문하에서 수학하여 뒤에 많은 제자들을 길러내었고 향풍(鄕風)도 예법에 맞춰 다시 고친 명성이 높은 학자가 되었으며 임고서원 건립에도 많은 공을 끼쳤다. ‘할 말 없는 무덤이 없다’지만 하절에서는 많은 무덤 중에서도 두 개의 무덤이 후대로 내려오면서 더욱더 주목을 받고 있다. 의병장 호수 정세아 무덤 앞에 있는 장남인 백암 정의번과 종 억수의 무덤이다.
호수공이 사후에 정의번이 평소 입던 옷과 갓으로 경주 싸움터에 가서 초혼해 와서 빈소를 지어 통곡하고 당시에 서로 마음을 통하던 지우들에게 애사(哀詞)를 구해서 관에 넣고 시체 대신 장사를 지내니 시총(詩塚)의 유래가 되었다. 정의번 묘소 앞의 ‘충노억수지묘(忠奴億壽之墓)’라고 적힌 억수의 무덤은 주인의 무덤에 비해 비록 작고 초라하지만 정씨 집안에서 4백여 년간 묘사 때마다 그의 충복됨을 잊지 않고 제수를 차려 그의 넋을 달래주고 있다. 인근에 있는 강호정, 오회공종택, 오회당, 하천재, 사의당, 삼휴정 등 문화재들을 둘러보고 삼휴 정호신이 쓴 한시 ‘삼휴(三休)’를 읊으며 풍류를 즐기는 여유를 가져보는 것도 좋을 것으로 보인다. ▶ 영천양택의 으뜸 매곡마을 정재영 가옥 영천의 3대길지중 양택의 으뜸으로 꼽히는 매곡마을을 찾아보았다. 임고면 평천리에서 북동쪽으로 5㎞쯤 가다가 좌회전한 후 10여리 길을 따라 들어가면 유교정신이 물씬 풍기며 평화로움이 감도는 고즈넉한 반촌인 삼매리 매곡마을이 나타난다.
매산고택을 중심으로 서쪽에 산수정, 남쪽에 산천정, 북쪽에는 향양정이 자리 잡아 당시의 심오한 선비정신을 엿볼 수 있게 했으며 매곡을 둘러싸고 자는 산은 그것이 마치 꽃술을 감추고 있는 꽃잎들처럼 겹겹이 둘러있어서 흡사 별천지와도 같은 느낌이 든다. 30여 호의 집들은 계곡을 따라 나란히 서있고 보현산의 정맥에 기룡산의 주령이 매화가지처럼 뻗어 내려와서 매화의 꽃술에 해당하는 자리에 고색이 창연한 고가가 서남향으로 앉아있다. 뒷산의 주령이 가지처럼 완만하게 뻗어있는데 앞산은 가파른 절벽에 가깝고 세모꼴을 이루며 나비의 모습이고 마치 나비가 매화꽃을 향해 날아드는 형국이라고 한다. 중요민속자료 제24호로 지정된 매산고택(영천 정재영씨 가옥)은 조선 영조 때 형조참의를 지낸 매산 정중기(1685~1757)가 자기가 살고 있던 선원동에 천연두가 만연되어 이를 피해 산골로 찾아 들어와서 집을 짓기 시작해 그의 둘째아들 일찬이 완성한 것이라고 한다. 건물전체의 특징은 사당채가 모든 건물 중에서 가장 높은데 위치해 있고, 안채 대청과 사랑채 대청의 앞쪽기둥은 원주이고 나머지는 모두 방주이다. 경사진 자연그대로의 지반을 이용해 지형을 다듬지 않고 무리 없이 건축물을 세웠다. 3대가 살기에 편리하도록 설계되었으며 3대의 주부가 생활하는데 불편함이 없도록 독자성을 살려서 마루방, 고방, 부엌 등이 큰방, 아랫방, 머릿방에 각각 독립된 채 부속되어 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골방의 벽과 바닥을 보통 집 재료와는 달리 황토와 보리껍데기를 써서 지었으며, 천연재료인 보리껍데기는 방안 공기를 서늘하게 하고 해당 부위의 온기를 빼앗기 때문에 장기간의 시신 보관이 가능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 집에는 우물이 없어 200m 정도 떨어진 데서 길어다 먹었다고 하는데 이 일을 전담한 사람을 ‘물담사리’라고 불렀다고 한다. 매산고택은 전국에서 몇 안 되는 원형을 거의 보존한 18세기 민가로 그 가치가 높다. 조선중엽의 건축물, 예절, 풍습, 산업구조, 교통수단 등을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가 된다. 조선 후기 학자인 정중기(숙종 11~영조 33)의 자는 도옹(道翁), 호는 매산(梅山). 본관은 영일(迎日)이다. 훈수 정만양과 지수 정규양의 문인으로 1727년(영조 3) 생원으로 증광문과에 급제, 31년 승정원주서를 지냈다. 이어 결성현감(結城縣監)이 되어 관리의 도를 바로잡고 ‘여씨향약(呂氏鄕約)’에 의거해 향속(鄕俗)의 순화에 힘썼다. 사간원정언을 거쳐 형조참의에 이르렀으며, 이인좌(李麟佐)의 난 이후 조정에서 영남인사를 소외한 데 대한 시정을 요구하는 연명상소를 올렸다. 경사에 통달하고 전고(典故)와 예제(禮制)에 밝았다. 저서에 ‘매산집’, ‘가례집요’, ‘주서절요집해’ 등이 있다. ▶ 도연명의 무릉도원에 비유된 살기좋은 선원마을 산수의 경치가 무척 아름답고 학산이 마을을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어 도연명의 무릉도원에 비유하여 선원이라 불렀다는 임고면 선원마을. 마을의 동쪽과 남쪽으로 자호천이 흐르고, 북으로는 덕연리와 접경하며, 서쪽으로는 화북면과 접하고 있다.
지금도 마을에 들어서면 고색창연한 개와(蓋瓦)지붕과 정자의 헌함(軒檻)들이 즐비하여 반촌으로서 냄새가 물씬 풍기고 있으며 마을 뒤에 있는 선조의 묘소를 중심으로 1만여㎡의 울창한 송림이 우거져 있어 그 경관이 매우 아름다워 인근 학생들의 소풍장소로 각광을 받고 있다. 본래 영천군 환귀면의 지역으로서 선원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대환동을 병합하여 임고면에 편입되었다. 조선 인조 때 벼슬에서 물러나 입향한 정호례라는 선비가 도연명의 무릉도원에 비유하여 선원이라 부른 것이 이 마을의 이름이 되었으며 오천정씨가 주성을 이루고 있다.
정사에 올라서면 야트막한 산 아래 펼쳐진 들판과 집들, 저마다의 목적지를 향해 달리는 자동차와 함께 저 멀리 보이는 평천보가 마음속의 여유로움과 함께 아름다운 자연을 느끼게 한다. 정면 3칸, 측면 1.5칸의 이 건물은 임진왜란 때 호수 정세아의 현손인 함계 정석달(1660~1720)이 숙종 28년(1702)에 학문을 강학하기 위해 정자건립을 시도했으나 재력이 부족하여 우선 소재(小齋)를 지은 것이 안락재(安樂齋)이다. 그 후 정조 3년(1779) 손자 일찬(1724~1797)이 중건하여 함계정사라 했다. 정석달은 갈암 이현일의 문하에서 수학한 성리학자로 병와 이형상, 횡계 양수와 학문을 토론하며 일생을 보냈다. 가례혹문 등 3권의 문집이 남아있고 대산 이상정이 서문을 지었다. 문화재 지정 당시 김일진 전문위원은 다음과 같은 조사의견을 밝혔다. 영천지방에서는 18세기 중엽에서 후기에 이르기까지 주택, 정사, 서원 등에 영쌍창이 사용된 몇 예가 있으나 이 함계정사에서는 볼 수 없다. 그러나 일반적인 관점에서 볼 때 이 건물은 대체적으로 18세기 후기양식을 잘 보존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특히 함계공의 건축의도가 후손들에 의해서 충실히 재현된 건물로서 비록 정자형(亭子形)의 규모가 작은 건물이지만 거처실로서 정존협과 서책 간수와 손님방으로서의 동찰협은 각각 잘 살려져 있는 점이 주목된다. 문화재자료 정도의 가치는 있는 건물로 생각된다. 정사 뒤 야산솔밭에 오르니 동네의 개들이 낯선 이에 대한 인기척을 느끼고 사정없이 짖어대며 경계를 늦추지 않는다. 몇 년 전에 아이들을 돌보던 어린이집 역할을 했던 곳이어서 미끄럼틀과 철봉이 아직까지 남아 있었다. 이곳에서 마을의 고가들을 내려다보며 휴식을 취하는 것도 이 마을탐방의 묘미다.
영양의 서석지에 버금가는 아름다움을 지녔을 것이라 짐작이 되지만 관리의 미비로 마을과 함께 쇠락해가는 모습이다. 정자는 3칸의 온돌방과 5칸 크기의 대청으로 구성되어 있고 연못가 동변에는 4개의 퇴기둥을 세워서 기와지붕을 덧달아 내었다. 이것은 차양으로 처마를 깊게 드려서 일조와 더위를 차단하고자 한 것이다. 본채와 정자의 합리적인 구성과 개울을 막은 연못의 존재는 주인의 자연애와 운치스러운 생활관, 인생의 지혜를 잘 나타내주는 향원유적의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중요민속자료 제107호로 지정된 정용준 가옥은 조선 영조원년(1725)에 건축한 것으로 본채와 정자로 구성되어 있다. 본채는 사랑채와 문간채가 일자형으로 합쳐 있고, 문을 들어서면 ‘ㄱ’자형 평면의 안채와 곳간채, 그리고 아래채가 있어 전체적으로 ‘ㅁ’자형 평면을 이루고 있다. 안채는 방주와 납도리로 결구한 3량가구의 소루수장 물익공집이다. 대구-포항 간 고속도로 공사로 인해 마을의 정기를 간직했던 학산의 절개와 함께 나날이 쇠락해가고 있는 선원마을 사람들은 민속마을까지는 아니더라도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서 쉬어갈 수 있도록 더 이상 마을이 훼손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 |||||||||||||||||||||||||||||||||||||||||||||||||||||||||||||||||||||||||||||||||
'영천뉴스24 > 답사와 여행이야기(이원석 편집위원)' 카테고리의 다른 글
| 6차 영천시경계탐사 할미당재~만불사 (0) | 2007.09.09 |
|---|---|
| 영천향토사연구회 임고 수성리 가마터 답사 (0) | 2007.07.30 |
| [스크랩] 금호 오계리 `만취당` (0) | 2007.07.15 |
| [스크랩] 전삼달 장군 시신 미이라로 발견 (0) | 2007.07.15 |
| [스크랩] 신녕 화성리 `환벽정` (0) | 2007.07.15 |
ycnews24@hanmail.net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