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천 문화유산 자료/영천 지명유래 및 마을변천사

134. 선원리(仙源里)

이원석(문엄) 2011. 11. 14. 15:38

1) 마을의 자연환경

선원리의 동쪽과 남쪽으로 자호천이 흐르고, 북으로는 덕연리와 접경하며, 서쪽으로는 화북면과 접하고 있다. 높이 약 200m의 학산(鶴山)이 병풍처럼 둘러 있는데, 산수가 너무 아름다워 도연명(陶淵明)의 무릉도원(武陵桃源)에 비유하여 선원(仙源)이라 부르게 되었다.

2) 마을의 역사

▶ 샛말ㆍ간촌(間村) 송내(松內)와 대환(大環) 사이에 생긴 마을로 오천정씨가 주성이다. 사이 마을의 간음화 현상으로 언어 경제성에서 붙여진 이름 같다.

▶ 대환(大還)ㆍ환고(還臯) 이 마을 뒷산의 언덕이 고리 모양으로 마을을 감고 있다 하여 환고라는 마을 이름이 생겼다. ‘일 자천, 이 환고, 삼 평호(一 慈川, 二 還臯, 三 坪湖)’라는 말이 있으니 이는 영천 향내에서 가장 살기 좋은 세 곳을 이르는 말이다.

▶ 새각단 선원 남쪽 자호천(紫湖川) 건너편 들판에 영천~죽장간 도로변을 따라 이루어진 새로 된 마을이다. 정(鄭)ㆍ김(金)ㆍ이(李) 3성씨의 세 가구가 동네를 제일 먼저 이루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 송내(松內)ㆍ선원(仙源) 산수가 선경 같고 뒤에는 높이 약 200m의 학산이 병풍처럼 둘러 있으며 조선조 인조 때 벼슬에서 물러나 입향한 정호례(鄭好禮)가 송내(松內)를 도연명(陶淵明)의 무릉도원(武陵桃源)에 비유하여 선원(仙源)이라 부른 것이 이 마을의 이름이 되었다. 마을 중앙에 두리등(頭里嶝)이 있어 부자가 많다. 서편 이웃 화남면과 경계에는 미고개도 있다. 옛날에는 큰 길이었다.

3) 마을의 특징

조선조 중엽부터 우리나라는 유교문화가 도처에서 꽃피기 시작하여 작게는 개인가정의 사랑방에서 또 마을의 정자, 서당, 서원에서 성리학에 대한 연구를 하기 시작 하였다. 이 마을 출신인 함계(涵溪) 정석달(鄭碩達, 1660~1720) 선생의 이기설(理氣說) 즉 주리적(主理的)인 논설은 너무도 유명한 것이다.

함계(涵溪) 정석달(鄭碩達, 1660~1720)__________________

선생은 명신 정습명(鄭襲明)의 후예로 칠곡 외가인 송씨댁(宋氏宅)에서 태어났다. 갈암(葛庵) 이현일(李玄逸)의 문인으로서 「매곡정사석채사유문(梅谷精舍釋菜寺由文)」에서 ‘만기퇴서(晩嗜退書) 상삭민락(上溯閩洛)’이라고 하여 늦게 퇴계서(退溪書)를 좋아했다. 병와(甁窩) 이형상(李衡祥) 선생이 ‘이기(理氣)는 불가상사(不可相舍)하고 이기무선후(理氣無先後)’라고 했는데 함계(涵溪)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理)는 기(氣)를 떠나지 않는다. 시초에 이(理)가 있고 뒤에 기(氣)가 있다. 그럼으로 형면상하(形面上下)의 구분이 있고 이기(理氣)를 논하는 자는 자연히 불상리(不相離)를 알고 또 불상리를 알아야 한다.”고 주창했다.

대유학자인 매산 정중기(1685~1757) 선생을 낳은 분이며 또 ‘평생용력 유일간경(平生用力 惟一簡敬)’이라고 하여 평생에 경으로써 수양공부에 노력하였다. 마을 뒤에는 선조의 묘소가 있으며 이곳을 중심으로 일만여㎡의 울창한 송림이 우거져 있다. 자손들의 정성으로 가꾸어진 숲으로 그 경관이 매우 아름다워 인근 학교들의 소풍지로 각광을 받기도 했다.

- 선원리 철불좌상(鐵佛座像, 보물 513호) : 전설에 의하면 고려시대라고 추측되는데, 이 마을에 굉귀사(宏歸寺)라는 화려하고 웅대한 고찰(古刹)이 있었다. 그런데 임진왜란 때 사찰이 불타버리고 주인 없는 철불좌상만 우두커니 길가에 버려둔 채로 수백 년의 세월이 흐르자 불상의 왼쪽 손목이 절단되어 손이 없어졌다.

다시 오른쪽 팔뚝이 잘리어 없어지는 등 비운을 면치 못하던 중 1860년경 이 마을에 살던 정진수(鄭鎭壽)라는 사람이 어느 날 꿈을 꾸었는데 부처님이 나타나서 말씀하시기를 “나는 이 근처에 있는 부처인데 머리가 차가와 견딜 수가 없으니, 바라건대 눈비만 피할 정도로 신경을 써준다면 그대의 은공을 갚겠노라!”하기에 그 장소에 가보았더니 정말 부처 머리가 노출되어 있었다.

그래서 경건한 마음으로 기도를 드리고 주위를 깨끗이 정리한 뒤 작은 오막살이집을 지어 눈비에 맞지 않도록 했다. 그 후 부처님의 은덕으로 8대 독자로 내려오던 이 집안에 손자 4형제를 얻었으며, 또한 가난했던 살림살이가 점점 나아지게 되는 행운이 생겼다.

불상의 높이는 1.51m이고, 어깨폭이 77㎝이며, 가슴폭이 48㎝, 무릎폭이 1m가 된다. 머리에는 육계가 높직하고 전면에 큼직한 장식이 있다. 길다란 눈썹, 크고 길게 뜬 눈, 깊게 파진 보조개 등이 매우 경화되어 있고, 어깨와 가슴 등이 무척 빈약해 보이나 전체적으로 볼 때 조화와 균형을 이루고 있다.

- 연정고택(蓮亭古宅, 민속자료 107호) : 이 건물은 1725년 조선 영조 때 정용준씨의 8대조 주택으로 ‘ㅁ’자 형태의 가옥이다. 또한 일심당(一心堂)이라고 부르는 본 건물에서 약 50m 떨어진 곳에 연정(蓮亭)이라는 정자가 있다. 이 정자 역시 같은 연대에 지은 것으로, 정자를 지은 후 연못에서 자연적으로 연이 생기어 연정이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 세덕사(世德祠) : 임진왜란 때 공을 세운 호수 정세아(1535~1612) 선생과 그의 장자 백암 정의번(1560~1592) 선생을 모신 묘우(廟宇)이다. 정의번 선생은 포위당한 아버지를 구출하러 적진에 뛰어들었다가 종인 억수와 함께 순절하였다. 시신도 못찾고 타고 다니던 말만 돌아왔다. 나라에서 세덕사 속에 정충각(旌忠閣)을 세워 부자를 모시고 있다. 1784년 정조 8년 9월이다.

송림 울창, 고가옥 즐비한 반촌… 산수 경치 빼어나_______________

산수의 경치가 무척 아름답고 학산이 마을을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어 도연명의 무릉도원에 비유하여 선원이라 불렀다는 임고면 선원마을.

선원리의 남쪽 자호천 건너편 들판에 정(鄭), 김(金), 이(李) 삼씨(三氏)의 세 가구가 동네를 제일 먼저 형성했는데, 자연부락 명칭을 새각단이라 한다. 마을 뒷산 언덕이 고리모양으로 마을을 감고 있다고 하여 환고(還皐) 또는 대환(大還)이라 하는데 영천에서 살기 좋은 세 곳 ‘일 자천, 이 환고, 삼 평호’ 중에 속한다.

지금도 마을에 들어서면 고색창연한 개와(蓋瓦)지붕과 정자의 헌함(軒檻)들이 즐비하여 반촌으로서 냄새가 물씬 풍기고 있으며 마을 뒤에 있는 선조의 묘소를 중심으로 1만여㎡의 울창한 송림이 우거져 있어 그 경관이 매우 아름다워 인근 학생들의 소풍장소로 각광을 받고 있다. 본래 영천군 환귀면의 지역으로서 선원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대환리를 병합하여 임고면에 편입되었다.

조선 인조 때 벼슬에서 물러나 입향한 정호례라는 선비가 도연명의 무릉도원에 비유하여 선원이라 부른 것이 이 마을의 이름이 되었으며 오천정씨가 주성을 이루고 있다.

마을입구 왼쪽 언덕에 문화재자료 제230호인 함계정사가 자리하고 있다. 종부가 늘 정성스럽게 쓸고 닦은 덕분에 지금까지도 여전히 옛 정취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었다.

정사에 올라서면 야트막한 산 아래 펼쳐진 들판과 집들, 저마다의 목적지를 향해 달리는 자동차와 함께 저 멀리 보이는 평천보가 마음속의 여유로움과 함께 아름다운 자연을 느끼게 한다.

정면 3칸, 측면 1.5칸의 이 건물은 임진왜란 때 영천의병장 호수 정세아의 현손인 함계 정석달(1660~1720)이 숙종 28년(1702)에 학문을 강학하기 위하여 정자건립을 시도했으나 재력이 부족하여 우선 소재(小齋)를 지은 것이 안락재이다.

그 후 정조3년(1779) 손자 일찬(1724~1797)이 중건하여 함계정사라 했다. 정석달은 갈암 이현일의 문하에서 수학한 성리학자로 병와 이형상, 횡계 양수와 학문을 토론하며 일생을 보냈다. 가례혹문 등 3권의 문집이 남아있고 대산 이상정이 서문을 지었다.

정사 뒤 야산솔밭에 오르니 동네의 개들이 낯선 이에 대한 인기척을 느끼고 사정없이 짖어대며 경계를 늦추지 않는다. 몇 년 전에 아이들을 돌보던 어린이집 역할을 했던 곳이어서 미끄럼틀과 철봉이 아직까지 남아 있었다. 이곳에서 마을의 고가들을 내려다보며 휴식을 취하는 것도 이 마을탐방의 묘미다.

수년 전 태풍으로 일부분이 무너졌던 흙 담이 완전히 무너져 내렸고 동네 곳곳에 들어선 현대식 가옥들, 과수원과 밭들로 인해 옛 정취가 점점 사라져 가고 있는 것만 같아 안타까움을 간직한 채 안쪽으로 들어가니 정자를 지은 후 연못에서 저절로 연꽃이 생겨 이름이 붙여졌다는 연정이 언제나처럼 반갑게 맞아주었다.

중요민속자료 제107호로 지정된 정용준 가옥은 조선 영조원년(1725)에 건축한 것으로 본채와 정자로 구성되어 있다.

본채는 사랑채와 문간채가 일자형으로 합쳐 있고, 문을 들어서면 ‘ㄱ’자형 평면의 안채와 곳간채, 그리고 아래채가 있어 전체적으로 ‘ㅁ’자형 평면을 이루고 있다. 안채는 방주와 납도리로 결구한 3량가구의 소루수장 물익공집이다. 후손인 정동근씨가 15년째 관리하고 있다.

정씨의 부인 이정숙씨는 관광객들이 많은 날에는 하루 50~60명까지 찾아온다고 했다. 국가문화재인 관계로 조금씩 보수공사를 진행하고는 있지만 예산 때문인지 대대적인 수리는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우리 국민들의 수준이 점점 높아지다 보니 대부분의 방문객들이 큰 피해를 주지 않지만 대문이 없고, 여름에는 옷차림 때문에 좀 불편하며 간혹 밤늦게 찾아오면 당황스럽다고.

대구-포항 간 고속도로 공사로 인해 마을의 정기를 간직했던 학산의 절개와 함께 나날이 쇠락해가고 있는 선원마을 사람들은 민속마을까지는 아니더라도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서 쉬어갈 수 있도록 더 이상 마을이 훼손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넓게 퍼진 고양들, 연중 맑은 물소리… 대환마을__________________

양항교를 건넌 후 좌회전해서 마을 안으로 1.5㎞정도 들어가니 세찬 바람에 볏단을 덮어놓은 비닐이 을씨년스러워 보였다. 대환교를 건너면 마을 뒷산의 언덕이 고리모양으로 마을을 감고 있다하여 환고라고도 불리는 임고면 선원2리인 대환마을이 나온다.

동쪽은 언덕위 선원마을과 접하고 북쪽은 학산이 우뚝 솟아 있으며 서쪽은 천길 언덕인 나비등과 그 밑에 지금도 큰비가 오면 물귀신이 나타나 사람들을 괴롭힌다는 전설이 깃든 고래소, 등 너머에는 아죽곡이라는 긴 골짜기가 길게 펼쳐져 있다.

남쪽은 고양들이 넓게 펴져 이 마을 곡창지와 생명선을 이루며 들을 끼고 유유히 흐르는 자호천은 강류가 큰 들을 다 삼키고 산기슭에 이르러 비운을 겪었던 과거와 달리 잘 정리되어 연중 맑은 물줄기를 이룬다.

복숭아와 딸기농사가 유명한 이 마을에는 산기슭에 철불좌상이 도사리고 앉아 고양들을 굽어보고 있다. 고려시대(추측), 이 마을에는 굉귀사라는 화려하고 웅대한 고찰이 있었는데 임진왜란 때 사찰은 불타버리고 주인 없는 철불좌상만 길가에 버려진 채로 수백 년이 흐르면서 불상의 왼쪽손목이 절단되어 없어지고 다시 오른쪽 팔뚝이 잘리는 등 비운이 잇따랐다고 한다.

그러던 중 1860년경 이 마을에 살던 정진수라는 사람의 꿈에 부처님이 나타나 “나는 이 근처에 있는 부처인데 머리가 차가와 견딜 수가 없으니, 바라건대 눈비만 피할 정도로 신경을 써준다면 그대의 은공을 갚겠노라!” 하기에 그 장소에 가보았더니 정말 부처의 머리가 노출되어 있었다.

경건한 마음으로 기도를 드리고 주위를 깨끗이 정리한 뒤 작은 오두막을 지어 눈비에 맞지 않도록 했고 그 후 부처의 은덕으로 8대독자로 내려오던 이 집안에 손자 4형제를 얻었으며, 또한 가난했던 살림이 점점 늘어나게 되었다는 전설이 지금까지도 전해지고 있다.

6ㆍ25사변이후 정연대라는 사람이 산신각을 시주했고 건축용 자재를 동민과 함께 주선하여 사방8자 크기 두간의 법당을 건립, 규모는 작지만 아담한 절을 지어 선정사라 했다. 보물 제523호로 지정된 이 선원철불좌상은 높이 151㎝, 폭48㎝인 견실한 철불좌상이며, 모양은 비교적 완전한 편이지만 양손은 결실되었고 주조 후에 때운 흔적이 곳곳에 있을 뿐 대체로 완전한 편이다.

높직한 육계에 중앙계주가 뚜렷한 나발의 머리모양, 얼굴면적에 비해 눈꼬리가 올라간 긴 눈, 작은 코와 입, 짧고 융기된 인중을 나타낸 굳은 얼굴표정은 이 시대의 특징을 잘 말해주고 있다. 넓은 어깨, 발달된 가슴, 잘쑥한 허리 등 몸의 굴곡이 표현된 건장한 신체로 앞 시대의 불상양식을 따르고 있으나, 가늘어진 팔, 양감이 줄어든 다리는 다소 어색한 느낌을 준다.

안정된 신체에 얇은 우견편단의 법의가 간략한 옷주름을 형성하여 몸에 밀착되어 흐르고 있다. 이 불상은 고려전기의 양식을 대변해주고 있는 우수한 철불상으로 크게 주목받고 있다고 한다.

철불좌상 조금 앞쪽에 위치한 민속자료 제87호인 환구세덕사는 본래 호수 정세아의 후손들이 환구위에 서재를 지어 문중자제들의 강학장소로 삼았던 곳으로 임진왜란에서 큰 공을 세운 정세아(1535~1612)와 아들 백암 의번(1560~1592)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정조 1년(1777) 서재 뒤에 충현사를 지어 향사하고 강학의 도장으로 사용하여 왔다.

정의번은 경주전투에서 포위당한 아버지를 구출하고 난 뒤 종 억수와 함께 순절했으나 시신도 못 찾고 타고 다니던 말만 돌아왔다. 자양면 용산동에 있는 오천정씨들의 문중묘소인 하절에 가면 시총의 시초가 된 그의 무덤과 억수의 무덤이 후손들에게 충절을 가르치고 있다.

그 후 나라에서 충효정려가 내려 사당좌측에 충효각이 세워졌으나 대원군의 서원훼철령으로 철거되었고 그 유지에 충효각과 부속건물인 유사채와 고직사만 남아 선조들의 정신을 기린다.

대환마을에서는 고요한 가운데서 새소리를 들으며 인근에 위치한 충이당과 창의문을 비롯, 두루봉, 성짓곡, 천왕미기 등을 통해 옛 풍습과 정취를 느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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