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마을의 자연환경
삼매리는 동북으로 자양면과 경계를 이루며, 서북쪽으로는 화북면과 접경하고 남쪽으로는 덕연리와 접하고 있다. 매곡은 조선 영조 때 형조참의를 지낸 정중기가 개척한 마을로 270여 년 동안 세거해온 오천정씨의 집성촌이다.
평천리에서 북동쪽으로 5km쯤 가면 큰 반석이 있고, 좋은 청석과 바위가 많아 반곡(盤谷)이라는 지명이 생겼고 벌바우<봉암(峰岩)>에도 바위와 토종벌이 많아 그런 지명이 생겼으며 마을 앞쪽에는 오미산이 있다. 그리고 반곡 동쪽에 있는 용천(龍川)은 마을의 지형이 용의 머리 같이 생겼으며, 앞에는 자양천의 맑은 물이 흘러 그런 지명이 생기게 되었다. 반곡(盤谷), 매곡(梅谷), 용천(龍川), 전산(前山)으로 되었다.
2) 마을의 역사
매곡마을은 전형적인 유교의 정신이 물신 풍기는 곳이다. 고색창연한 개와(蓋瓦)지붕과 정자들의 헌함(軒檻)들이 즐비하며 마을 중앙에 웅장하게 자리 잡고 있는 매산고택(梅山古宅)은 민속자료 24호로서 1760년대에 건립했으며 조선조에 형조참의(刑曹參議)를 역임한 매산(梅山) 정중기(鄭重器, 1685~1757) 선생이 3대가 함께 거주하기에 편리한 구조로 건립한 집이며, 근처에 역연(亦然) 선생의 정자인 산수정(山水亭)이 있다.
마을 이름이 매곡(梅谷)인 것처럼 누대로 세거해온 자손들의 마음도 아름답고 꿋꿋하다. 근세 일정 시 항일투쟁에 앞장서서 활약하다가 아까운 젊음을 몸 바친 종손 정원흥(鄭元興, 1912~1945) 의사가 태어난 집이 바로 매산고택이다.
▶ 매내실ㆍ매곡(梅谷) 반곡(盤谷) 북서쪽 골짜기로 3km쯤 들어간 곳에 있는 마을이다. 조선조 영조 때 형조참의를 지낸 오천인 정중기가 마을을 개척하여 270년 동안 세거해온 오천정씨의 집성촌이다. 마을 뒷산은 매화 가지가 뻗어 있는 모양이고 앞산은 매화꽃을 향하여 날아드는 나비의 형국이며 매화꽃이 핀 자리에 정씨 종가가 자리 잡고 있으므로 매곡이라 부르게 되었다. 정씨종가(매산고택)는 중요민속 자료 제24호로 지정되어 있다.
▶ 반곡(盤谷) 평천(平泉)에서 북동쪽으로 5km 가면 마을 왼쪽에 큰 반석이 있고, 좋은 청석(靑石)과 바위가 많아서 반곡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자양천(紫陽川)의 수원이 풍부하며 영천이씨와 경주이씨가 주로 살고 있다.
▶ 벌바우ㆍ봉암(峰岩)ㆍ전산리(前山里) 이곳에는 토종벌과 바위가 많으며 앞에는 오미산(烏尾山)이 있다. ‘물 좋다 알매들[전산포(前山圃)]아! 답답다 용화골아! 시원타 벌바우야’라는 속언(俗言)이 전해 오고 있다. 용화골(벌바우에서 북쪽 4km 지점)은 사방 큰 산으로 둘러 싸여 있어 답답하고, 이에 반하여 벌바우는 그런대로 앞이 탁 트여져 있어 나온 말이다. 섭섭다 벌바우야라는 말은 시집 간 딸이 친정 부모가 죽었을 때도 비가 오면 자양천 물이 많아서 건널 수 없으므로 애가 탔기 때문에, 또한 친정을 두고 떠나기 아쉬운 마음에서 이런 말이 생겼다고 한다.
▶ 용천(龍川) 반곡(盤谷) 동쪽에 있는 마을로 지형이 용의 머리같이 생겼으며 앞에는 내가 있어 불리어진 이름이다. ‘시원타, 벌바우야, 물 좋다, 알매들에 시집가자’라는 민요가 있다.
조선 영조 때 형조참의를 지낸 정중기(鄭重器)가 개척한 마을로, 풍수지리설로 볼 때 마을 뒷산은 매화 가지가 뻗어있는 형상이고 앞산은 매화꽃을 향하여 날아드는 형상이라 매곡(梅谷)이라 하는데 3개리가 합쳐서 삼매(三梅)라는 지명이 생겼다.
3) 마을의 특징
- 삼매리 뒤티고개의 전설
뒤티고개는 뒤티마을 뒷산의 고개인데 고개가 낮아서 바람이 사납게 몰아치는 경우가 많으므로 여름에도 ‘추운고개, 바람고개, 귀신고개, 슬픈고개’라고 한다. 해마다 정월 초하룻날에 만약 샛바람이 불게 되면, 젊은 여자나 색시가 바람이 나고 그 해에 여자가 먼저 뒤티고개를 넘게 되면, 마을 사람들 중에서 중병이 걸리거나 목숨을 잃는 재앙이 생긴다고 한다. 이러한 이유로 인하여 이 동네의 시어머니들은 자기 며느리나 딸이 바람나지 않도록 하려고 자애로운 마음가짐으로 오미산 골짜기 신바위에 치성을 드렸다. 그래서 그 산골짜기를 산자고곡(山慈姑谷), 또는 산자골이라 부른다.
- 매산고택(梅山古宅, 민속자료 24호) : 조선 영조 시대에 형조참의를 지낸 매산 정중기 선생이 자기가 살고 있던 선원리에 천연두(天然痘)가 만연되어 이를 피해 산골로 찾아들어 집을 짓고 산 곳이 매산리이다. 1760년대 건립한 이 건물 전체의 특징은 사당채가 모든 건물 중에서 가장 높은데 위치해 있고, 안채 대청과 사랑채 대청의 앞쪽 기둥은 원주(圓柱)이고 나머지는 모두 방주(方柱)이다. 경사진 자연 그대로의 지반을 이용하여 지형을 다듬지 않고 무리 없이 이용하여 건축물을 세웠다. 3대가 살기에 편리하도록 설계되었으며 3대의 주부가 생활하는데 독자성을 살려서 마루방, 고방, 부엌 등이 큰방, 아랫방, 머릿방에 각각 독립되어 부속되어 있다.
- 동인각(東麟閣, 지방유형문화재 77호) :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 장군의 휘하부장으로서 혁혁한 공훈을 세운 김완(金浣) 장군의 위패를 모시고 춘추로 향사를 드리는 곳이다. 건물은 기단 위에 정면 4칸, 측면 3칸이며 겹치마 팔작지붕으로 양쪽 2칸은 방이고 중앙 2칸과 전면 퇴칸은 마루로 되어 있다. 이곳에는 김완 장군의 원무공신록과 이순신 장군의 영정이 있다. 1976년 영천댐 공사로 현재의 위치에 옮겨지었다. 조선 선조 때 지었다.
- 자양서당(紫陽書堂, 지방유형문화재 78호) : 1550년 조선 명종 때, 김응생(金應生)ㆍ정윤량(鄭允良) 등이 후학들에게 학문을 가르치기 위해 지은 것이다. 1553년에 퇴계 이황 선생이 자양서당이란 당호를 증정하여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다. 건물은 정면 4칸, 측면 1칸, 맞배지붕인데 우측 2칸은 마루로 되어있고 좌측 2칸은 방으로 되어 있다. 1976년 영천댐 공사로 현 위치로 옮겨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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