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천 문화유산 자료/영천 지명유래 및 마을변천사

113. 안천리(安川里)

이원석(문엄) 2011. 11. 14. 08:45

 

1) 마을의 자연환경

화산산맥이 동남쪽으로 뻗은 지맥이 마을의 서쪽을 향하여 낮은 연봉을 이루고 있으며 마을 중앙으로 흐르는 계천(溪川)은 경림산(瓊林山)에서 시발(始發)한 것과 또 학루산(鶴樓山)에서 발하여 월곡(月谷)을 거쳐 신안으로 흐르는 것이 합하여 된 것이며, 북쪽에는 마치 왕릉처럼 생긴 능산(陵山)이 아담하고 우아하게 솟아 이 지형을 한층 더 돋보이게 해주고 있다. 계곡, 능계 앞의 기암절벽을 능덤이라고 호칭함도 모두 이 산의 이름에서 연유한다.

 

2) 마을의 역사

▶ 능계(陵溪) 부락 위에 산이 있는데 이 능산(陵山)에 임금님의 아들 태(胎)를 묻었다 하여 태봉산(胎峯山)이라 부르는데 이 능산의 능(陵)자와 마을 앞에 시냇물이 흘러가는 관계로 계(溪)자를 합하여 능계란 이름이 지어졌다고 전한다. 산꼭대기에 지금도 적석총(積石塚)의 흔적이 보인다. ‘중터’라는 곳에서 옛날에 사찰이 있었던 흔적을 볼 수 있으며, 기와 조각, 깨어진 고토기와 파편 등이 있다.

 

▶ 큰골ㆍ대곡(大谷) 능계 서쪽 골짜기에 있는 마을로 동네 위치가 긴 골짜기를 따라 형성되어 있다고 하여 큰골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 서원리(書院里) 조선시대 신녕현감 황준량이 그 지방민의 교육을 위하여 백학서원(白鶴書院)을 건립하였는데, 이 서원 근처에 있는 마을을 그냥 서원(書院)이라 칭하게 되었다.

 

▶ 용덤(龍岩) 이 마을 근처에 용의 머리 모양으로 생긴 암석이 있는데 그 아래 소(沼)가 있어 여름철 사람들의 멱 감기에 좋은 장소로 알려지고 있다.

 

▶ 신안(新安) 신라 경명왕(景明王)의 여덟 째 아들인 월성대군(月城大君)의 후손이 약 420년 전 능계에 거주하였는데, 박시량(朴時亮)이 이곳에 새로 마을의 터를 잡아 정착하였다고 하여 신안(新安)이라 한다.

 

▶ 양지(陽地) 능계 동쪽 산기슭에 위치하고 있다. 언제부터 사람이 살기 시작했는지 확실히 알 수 없으나 월성대군의 후손이 약 420년 전에 살았다고 한다. 마을 위 중터라는 곳에 신라시대의 것으로 보이는 유물들이 발견된 것으로 보아 신라 시대부터 사람이 산 것이 확실한 듯하다. 지형의 위치상 하루 중 햇볕을 많이 받아 따뜻한 곳이라 하여 양지라 부른다.

 

▶ 음지(陰地) 능계 서쪽 산기슭에 위치하고 있는데, 이곳의 정착 연대는 양지보다는 늦으며, 현재 거주하고 있는 주민은 대부분 오천정씨와 밀양박씨가 살고 있다. 마을의 위치가 하루 중 햇볕을 많이 받지 못하는 곳에 있어 음지라 불리고 있다.

 

▶ 온천(溫川)ㆍ신안천(新安川) 약 320년 전 함안조씨(咸安趙氏) 한 분이 이곳에 이주하여 살아 보니 다른 곳에 비하여 겨울이 매우 따뜻하고, 지형이 좋아 온천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온천 또는 신안천(新安川)은 겨울이 따뜻하고 지형이 좋아서 300~400여 년 전부터 인류가 정착한 듯하다. 또 신녕(新寧)땅 안천(安川)이라는 뜻에서 신안천(新安川)이 생겼다.

 

3) 마을의 특징

- 백학서당(白鶴書堂) : 황준량 현감이 건립한 서당. 건물과 각 토지 및 주위의 토지가 있으나 지금은 산동학원(山東學園)의 소유가 되어 있다.

- 능산재(陵山齋) : 임란 때 영천복성에 공이 많았던 정응서(鄭應瑞) 선생의 재사

- 봉릉재(鳳陵齋) : 인조 때 성현도찰방(省峴道察訪)을 역임한 정극양(鄭克讓) 선생의 재사

- 한암정(漢巖亭) : 순조 때 정치간(鄭致干) 선생의 정자

- 신안약수(新安藥水) : 1985년 8월 2일 경상북도보건연구원에서 시검(試驗)해본 결과 총경도가 672.7도이며, 특히 알칼리(Alkali)도 852.8도가 되는 약수가 일용출량(日湧出量) 약 300t 정도가 되어 여름철이면 원근각처로부터 사람들이 많이 몰려왔다고 한다. 약수는 지금부터 약 170여 년 전에 이곳에서 소의 뒷다리가 빠졌는데, 허덕이는 모습을 보고 여러 사람들이 소의 뒷다리를 당겨 올린 결과 그곳에서 물이 솟아나기에 맛을 보니 약수였다고들 전해오고 있다.

- 신안천(新安川) 느티나무 : 가슴 높이 둘레가 5.35m, 동서로의 가지 끝이 약 20m, 남북으로 약 23m, 수령은 420여년 정도라고 추측되는 느티나무<규목(規木)>가 개울가에 서 있다. 나무아래에는 높이 1.5m 정도 되는 긴 돌을 세워 두었는데, 개울가 맞은편에도 같은 높이의 돌이 세워져 있다. 동네입구를 표시한 듯하다.

민족교육 요람 백학서원 ‘폐허’로 방치___________________________

민족 저항시인 이육사를 비롯해 조재만, 안병철, 이원대, 이진영 열사 등 독립운동가를 배출한 항일민족교육의 요람 백학서원이 허물어지기 일보직전인 상태로 방치돼 보는 이들의 안타까움을 사고 있다.

 

백학서원은 1555년(명종 10) 당시 신녕현감이었던 금계 황준량이 지역유림들과 더불어 양강소 위 백학산에 건립했으며 임진왜란 때 소실돼 1612년(광해군 4)에 중건했다.

 

1658년(효종 9) 현재 위치인 화남면 안천리로 옮겨 퇴계 이황 선생을 제향하고 황준량 선생을 배향했고 1868년(고종 5)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가 1900년 지역민들이 뜻을 모아 서당으로 복건했다.

 

이후 1921년 창녕조씨 문중을 중심으로 지역 유지들이 힘을 합해 신학문 교육기관인 백학학원을 건립해 민족의식과 항일의식을 고취하는 민족교육을 실시하며 많은 항일독립투사를 양성한 곳이다.

 

지금은 기와와 담벽이 심하게 훼손돼 있고 마당에는 양봉을 하고 있으며 볏짚과 박스를 쌓아놓은 채 폐허상태로 방치돼 있는 실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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