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천 문화유산 자료/영천 지명유래 및 마을변천사

99. 상송리(上松里)

이원석(문엄) 2011. 11. 14. 08:37

1) 마을의 자연환경

보현산맥의 지맥이 북쪽으로 뻗어 달리다가 노고령을 형성하고 다시 서남쪽으로 굽이쳐 뻗은 산곡의 분지에 아담하게 자리 잡고 있으며 청송군(靑松郡) 현서면(縣西面)과 경계를 이루고 있어 화북면의 북단에 위치한 마을로서 험준한 노고령을 넘어 청송으로 통하는 국도35호선이 마을을 지나고 있고 고현천이 상송 노고령에서 발원하여 마을 한가운데를 통과하고 있다. 골이 깊고 산수가 수려해서 사람 살기가 좋은 고장으로 알려져 있다.

 

2) 마을의 역사

1914년 행정구역 개편 시 주위 산에 소나무가 많다고 하여 상송이라 부르게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 저자거리ㆍ상송(上松) 420여 년 전 김해김씨(金海金氏)가 들어와 이곳에서 마을을 이루고 살기 시작했으며, 시장터를 이루어 저자거리라 불리기도 하였다. 또 주위가 산으로 둘러싸여 소나무가 많아 상송이라 불리어져 오고 있다.

 

▶ 아칠ㆍ아차(牙次) 임진왜란 때 파평윤씨가 피난 와서 처음 살기 시작하였다고 하며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한다. 가토 기요마사<가등청정(加藤淸正)>의 처가 자기 남편에게 조선에 원정가면 송자(松字)가 들어있는 곳을 가면 틀림없이 화를 당할 것이니 가지 말도록 당부하였다. 그 후 가토는 군사를 거느리고 영천 땅에 쳐들어와서 상송리 북단에 위치한 이곳에 와서 “이 너머로 가면 어디냐?”하고 물으니 청송(靑松)이라 대답하자 깜짝 놀라 ‘아차!’하고 회군하여 갔다고 한다. 그래서 이 동네를 아차리라고 하였다. 마을 뒤의 고개를 오랑캐가 돌아간 재라 하여 노귀령(虜歸嶺)으로 부르다가 지금은 노고령(老古嶺)으로 부르고 있다.

 

<노귀재와 보현산 이야기>

현재 노귀재란 지명은 임진왜란 당시 일본국에서 전승운(全勝運)을 점 친 결과 3송을 피하면 필승이라는 쾌사를 얻은 바, 궁지에 몰린 부녀자들이 소나무만 끌어안아도 난을 피했다는 전설이 있다.

 

실제 3송은, 명나라 장수 이여송, 송도(진해시 웅천2동의 솔섬), 벽제관(경기도 고양시 벽제동에 있는 역관) 전투에서의 송운대사(=사명당)를 말하는 것이다.

 

동래성 전투 이후 아무런 저항없이 북상하던 왜군이 처음으로 저항다운 저항을 받은 곳이 영천성 전투이다. 영천성 전투에서 혼이 난 왜군이 당시 도청격인 안동도호부로 진격하는 최단거리 길을 택한 것이 이 곳 노귀재로 해서 길안으로 하는 방향이었다.

 

이때 한 촌로(村老)를 잡아 향도를 정하기로 했던 바, 산세가 험하고 골이 깊어 매복을 우려한 왜장이 “이곳이 어디냐?”고 물었더니 촌로가 “하송입니다.”라고 대답했고, 드디어 재 밑에 당도해 다시 한 번 이곳이 어디냐고 물었더니 촌로가 답하기를 “여기는 상송이고, 이 재를 넘으면 청송이라, 바로 3송지지가 여기입니다.”라고 답하니 왜장은 크게 놀라 회군하였다고 한다.

 

그리하여 천한 종놈들(왜군을 낮추어 말함)이 물러간 ‘성스러운 고개’란 뜻에서 노귀재라 했고, 길을 안내한 촌로가 보현보살의 현신이라고 믿어 그 산을 보현보살이 상주하는 곳이라 해서 보현산으로 이름 지었다 라고 하는 전설이 전해 내려오고 있다(=보현보살은 자비의 보살이다. 법화(法華)는 묘법화엄경(妙法華嚴經)에서 온 문구로서 대승경전(大乘經典)의 하나로 되어있다. 모든 경전 중에서 가장 존귀하게 여기는 경전으로 법화경이라고도 한다).

 

약탈을 일삼던 왜구를 천시하는 뜻에서의 종 노(奴)자와 돌아갈 귀(歸)자를 써서 노귀재라 불리어졌으며 그로부터 오가는 많은 사람들에게 노귀재가 재앙을 면하는 재로 널리 알려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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