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마을의 자연환경
북으로는 화산(華山)이 저 멀리 굽어보며 마을을 수호하는 듯 하며 서는 구름 낀 팔공산의 산정이 우뚝 솟아 있고 남으로는 신녕 한(큰)들이 전개되어 그 끝이 청통면의 연봉들과 경계를 이룬다. 동으로는 구릉야산이 있으며 갑령(甲嶺)재에서 발한 신녕천이 중앙선 철로를 넘어 마을의 서편으로 흐르고 있어 예부터 교통의 요지이고 농산물의 집산지였다.
2) 마을의 역사
마을 앞에 왕골밭이 많다고 하여 완전(莞田)이라 했다 한다.
▶ 하관(下官) 본관(本官) 아랫마을로 신녕지역 입구이다. 1300여 년 전에 경주손씨가 마을을 개척하였다 하며 여기에서 모든 통행인을 검문하였다. 현령(縣令)의 관용창고가 있었으며 낮은 벼슬아치들의 거주지였기 때문에 하관이라 칭했다 한다.
조선시대에 낮은 벼슬아치들을 아전(衙前)이라 했다. 이들은 일정한 곳에 살면서 세습적으로 낮은 벼슬아치의 몫을 하였다. 현감ㆍ향장(鄕長)ㆍ찰방(察訪)의 보좌원 등이었다.
▶ 구디터ㆍ군인터ㆍ구돈터 조선 초기 군인이 주둔했다고 하여 군인터라고 전해오다가 구디터라 불려져 왔다는 이야기와 산의 아홉 봉우리가 마을을 향해 돼지가 죽 먹는 형으로 생겨 구돈(九豚)터라고 했다는 두 가지 설이 있다.
3) 마을의 특징
- 전설 : 맥덤 또는 맬덤은 절벽바위로 바위에서 큰 장수가 난다는 설을 따라 이여송이 맥을 끊었다 하여 맥덤이라고도 전하며 또는 형상이 매 맞는 모양이기에 이러한 이름이 생겼다고도 한다.
- 한들<대야(大野)> : 국도나 철도가 생기기 전에 들이 한없이 넓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 완전리입석 : 신녕면 소재지로 들어가는 국도변 남향 100m지점인 논에 위치하고 있다. 원래 입석은 고대 무덤 앞에 비명이나 혹은 도로의 이정표로 사용하였다는 문헌으로 보아 평야에 서 있는 이 입석은 이정표가 아닌가 생각된다. 단면은 직사각형이고 높이는 2.6m, 폭 1m에 두께가 24cm로 비교적 큰 편이다.
'영천 문화유산 자료 > 영천 지명유래 및 마을변천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76. 연정리(蓮亭里) (0) | 2011.11.13 |
---|---|
75. 신덕리(新德里) (0) | 2011.11.13 |
73. 화성리(花城里) (0) | 2011.11.13 |
72. 매양리(梅陽里) (0) | 2011.11.13 |
71. 왕산리(旺山里) (0) | 2011.11.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