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마을의 자연환경
팔공산에서 동쪽으로 뻗은 일지맥이 갑자기 낮아져 두 갈래로 갈라져서 작은 연봉을 이루고 있으며 내신리(內新里)와 외신리(外新里)에서 발한 시냇물이 서로 합류되어 계곡을 굽이쳐 흐르고 있다.
주위에는 기암절벽이 좋은 경관을 이루고 있어 예부터 은인(隱人)들이 즐겨 찾던 경치 좋고 물 좋은 곳이며 오곡백과가 풍부하여 살기 좋은 곳으로 이름난 곳이다.
2) 마을의 역사
▶ 안신원ㆍ내신원(內新源) 신원리 가운데 가장 안쪽에 위치한 데서 나온 이름으로 장경일(張慶日)이라는 선비가 420여 년 전에 이 마을을 개척하였다. 개척 당시 청통천(淸通川) 상류에 새 마을을 개척하였다고 하여 신원이라 부른다고 한다. 거조암에 국보 제14호인 영산전이 위치하고 있다.
▶ 바깥신원ㆍ외신원(外新源) 신원리 가운데서 이 마을의 위치가 산곡(山谷) 밖에 있었으므로 마을이름을 외신원이라 했다.
▶ 술래바탕ㆍ수꾸바탕ㆍ수수터ㆍ중신원(中新源) 마을이 들어서기 전 이곳은 들판이었는데 이상하게도 다른 농사를 지으면 안 되고 수수농사만이 해마다 풍작을 이루었다고 하여 수수란 곡식이름을 따서 일명 수수터라고 불렀다. 또한 마을의 위치가 신원리 한가운데이므로 중신원이라고도 부른다. 임진왜란 때는 이곳이 나라에서 왜적들의 동태를 살피도록 하는 지역순회장(地域巡廻場)이 되었다고도 전한다.
동곡(東谷) 노미옥 선생이 대창면 직천리에서 출생하여 만년에 이곳으로 이거하여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였다. 진사가 되어 돌아올 때 따라온 광대들이 한바탕 놀았던 곳을 광대진(廣大陣), 술래잡기를 하며 떠들던 곳은 술래바탕(지금은 와전되어 수꾸바탕 또는 수끼바탕이라 한다.)이라 부르게 되었다는 설도 있다..
▶ 유룡ㆍ용란(龍卵) 지금으로부터 320여 년 전에 바로 이곳에서 용이 알을 낳았다고 하여 사람들은 이 마을을 용란(龍卵)이라고 부른다.
▶ 갱빈마을ㆍ강변촌(江邊村)ㆍ호암(虎岩) 이 마을의 위치가 개척할 당시 강변이었다고 한다. 그 위치에 걸맞게 마을이름을 강변촌으로 지었다고 한다.
▶ 광대정(廣大亭) 조선시대 큰 명절날만 되면 마을사람들이 함께 어울려 악귀를 물리치고 그해의 행운과 풍년이 깃들기를 바라는 뜻에서 광대놀음을 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광대놀음이 성했음을 오래도록 기념하기 위하여 사람들이 이곳에 조그마한 정자를 하나 세웠는데 오랜 세월이 지나는 동안 관리소홀로 없어지고 말았다. 훗날 사람들은 즐거웠던 그 당시를 생각하며 마을이름을 광대정(廣大亭)이라 지었다고 한다.
▶ 구돋터 돼지 아홉 마리가 있는 모양이라 하며 그런 모양은 범인은 볼 수 없고 풍수에 밝은 사람에게만 보인다고 한다.
▶ 새터ㆍ신기(新基) 임진왜란 당시 마을이 없어졌다가 1650년경에 다시 마을이 생겨 이름을 새터라 했다 한다.
마을 뒤에 이 마을을 보호하는 듯이 도사리고 있는 큰 바윗돌 한 개가 있으며 안신원에도 비슷한 돌이 있었으나 1970년대에 석수(石手)들이 파괴시켜 석재로 사용하였다.
3) 마을의 특징
- 거조암(居祖庵) 영산전(靈山殿) : 국보14호인 거조안 영산전은 고려시대 건축물로 은해사 사적비문에 ‘아미타불이 항상 머문다’고 해서 거조라고 했으며 신라 경덕왕 때 창건되었다고 적혀있다. 또한 다른 문헌에는 효성왕(孝成王) 2년(738)이라고 적혀있기도 하다. 건물은 잡석이 불규칙하게 축조된 기단 위에 기다랗게 지어졌으며 다포(多包)집과 같은 형태이나 주심포(柱心包)집 양식의 초기적 형태를 나타낸 것이 특징이다.
- 거조암 삼층석탑 : 문화재자료 제104호인 이 탑의 높이는 3.15m로 통일신라 말에서 고려시대 초기로 보고 있다. 탑의 하층기단과 상층기단에는 몰딩이 표시되어 있고 우리나라의 보편적인 탑 구조와 마찬가지로 상층기단 면석과 각층 옥신(屋身)에는 우주(隅柱)가 조출(彫出)되었다. 상륜부(上輪部 : 불탑의 꼭대기에 세워놓은 장식부분)가 전실(全失)되었으며 화강암으로 만들었다.
- 신원재(新原齋) : 조선 세종 때 급제하여 이조참의의 벼슬에 오르고 훗날 대재촌(대재촌 : 원래는 자아승촌이었는데 선생의 재주를 찬양하여 대재촌이라고 부르게 하였음)에서 당시의 선비였던 김종직, 서거정, 남효온 선생 등과 성리학을 토론하며 일생을 보낸 죽재(竹齋) 윤긍(尹兢, 1432~1485) 선생의 묘소를 수호하기 위해 세운 재사
- 불호당(祓護堂) : ‘마을의 제액을 없애주고 마을을 수호하며 서낭신을 모시는 집’이란 뜻의 불호당은 동제를 지내는 단칸집으로 경상북도에서도 희귀한 곳이다. 조선 영조 45년(1769)에 창건하고 1901년 중창했다는 기록이 있다.
동제는 음력 정월초순에 제주를 선정하는데 기준은 깨끗한 사람으로서 해산이나 상을 당하지 않으며 연령이 많고 덕망이 있는 자로 사회적 지위가 있어야 된다. 제주로 선정되면 3일전부터 대문에 금줄을 치고 목욕재계하며 마음가짐을 정결하게 하고 매사를 삼간다.
서낭당 주위에도 금(禁)줄을 치고 외부인들의 출입을 금한다. 주위에 황토를 깔아놓는데 붉은 흙은 귀신이 무서워하는 색깔이기 때문에 잡귀가 못 오도록 하는 것이다. 제기는 새것으로 마련하고 시장에 가서 제물을 구입할 때는 깨끗한 가게에서 값을 깎지 않고 산다.
정월 14일 저녁부터 제물을 차려 보름날밤 1시에서 2시 사이에 제사를 지내는데 순서는 분향강신, 참신, 헌작, 독축 순으로 한다.
이렇게 마을의 무사를 기원한 후에 각 세대주의 이름이 적힌 종이를 태우는 소지(燒紙)를 올리면서 소원이 성취되기를 빈다. 그리고 음복을 하고 동네일을 상의한다. 이 행사는 공동체의 의식과 향토에 대한 사랑을 심어주는데 있어서 큰 역할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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