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천 문화유산 자료/영천문화유산 답사기

14. 화남 귀호리 - 우목산 아래 귀애정 개방적 아름다움 극치

이원석(문엄) 2011. 11. 13. 08:06

공조참의 조극승 향리지학에 뜻… 후학 양성 

 

화남면 귀호리는 원래는 신녕군 대량면 지역이었으나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귀계(龜溪)와 호암(湖岩)을 병합, 귀호리라 하여 영천군 화산면에 편입되었다가 1986년 화남면에 편입되었다.

 

화산산맥의 일지맥이 동남으로 뻗어 앞뒤 산을 이루었으며 마을의 중심을 흐르는 계곡은 귀일안못에서 발하여 농업용수로 이용되고, 멀리 북쪽에는 각 산정이 뾰족뾰족하여 이 지형의 특성을 이룬다.

 

마을 입구의 밭에 있던 큰 돌이 거북이처럼 생겨 귀일(龜逸)이라고 하며 바위를 귀암(龜岩)이라고 한다. 아래에 오천천(五泉川)이 흐르며 원래 단양 우씨가 개척하였다고 전하며 그 후 창녕조씨가 세거하였다고 한다.

 

우목골(牛牧谷, 禹墨谷)에는 조선시대 학자이며 공조참의를 지낸 귀애(龜厓) 조극승(曺克承, 1803~1877)을 추모하기 위해 정자와 사당을 세웠는데 200여년 전 건립된 생가 바로 옆에 두었다. 원래 이 자리는 귀애 선생이 후학을 가르치던 조그마한 건물이 있었다고 한다.

 

마루방 상부에 있던 유조집서년(柔兆執徐年) 청명절에 쓴 김여락의 귀애정 기문과 손자 세환(1861~1942)의 기문으로 볼 때 1915년이나 1916년에 창건한 것으로 보이며 그 후 1978년 기둥과 마루부분에 대한 중수가 있었다.

 

사당은 귀애정과 같은 연도에 창건되었으며 이때의 규모는 2칸이었다. 그 후 귀애선생이 불천위로 모셔지면서 1978년 현재의 3칸으로 증축되었다. 단기 4311년 무오 2월 15일의 중수 상량문이 사당 종도리 장혀 하단에 있다.

 

귀애정(문화재자료 제339호)은 귀애고택의 향 좌측 옆 야트막한 야산인 우목산(牛牧山) 아래 동북쪽으로 건립되어 멀리 안산인 보현산과 귀애선생이 10경(景) 중에 하나라고 노래한 화악산(花嶽山)을 바라보고 있다.

 

또한 육각정자를 섬 내에 두었는데 이 건물은 20여년 전에 도괴되었으며 육각정자는 나무다리를 만들어 통행하도록 하였다고 한다.

 

귀애정 앞에는 연못을 바라보고 있는 길이 1m, 놀이 50~60㎝ 정도의 돌거북이 있었다고 하는데 어느 날 도난당하고 나중에 누마루 근처의 마당에 120㎝ 정도인 거북형상의 돌확을 만들어 연꽃을 심었다.

 

연못은 3면이 담장 없이 터져있는데, 일반적인 영남의 별서정원 수법은 주위에 담장을 둘러 폐쇄적인 형태를 띠고 있으나 여기는 오히려 개방적으로 처리하여 호남 원림구성 수법을 보여주고 있다.

 

귀애정은 장대석의 기단 위에 두 칸 온돌방, 한 칸 마루방, 한 칸 온돌방을 기본구성으로 한 뒤 전면에 반 칸의 퇴를 두어 툇마루와 계자각 난간을 시설하고 배면은 반 칸을 안으로 들여 벽장과 툇마루를 가설했다. 또한 한 칸 온돌방 앞에는 누마루를 돌출시키고 계자각 난간을 돌려 정자의 운치를 한껏 높였다.

 

누마루는 수월루(水月樓)라 칭했고, 방 앞의 툇마루는 몽희헌(夢喜軒)이라 했다. 수월루는 외부 3칸, 모두에 4짝 들문을 두었으나 지금은 모두 없앴다.

 

외부 기둥은 모두 원주를 사용하고 내부는 각주를 세웠는데 특이하게도 배면 툇마루 상부에는 전면과 같이 창방을 돌리고 화반을 두었다. 이는 벽장을 몸체에서 달아내어 평면을 확장하는 일반적인 수법과는 달리 벽장을 외진(外陣)기둥 안으로 들였기 때문이다.

 

또한 2칸 온돌방 벽장 측면에는 밖으로 출입할 수 있도록 외여닫이 세살문을 두었는데 조선 말기부터 이루어진 건축의 실용성이라는 측면에서 해석해볼 수 있다.

 

우물마루를 깐 크기의 마루방은 전면에는 사분합 들어열개문을 달고 배면에는 판벽에다 쌍여닫이 울거미 널문을 달았다. 대청의 좌우 온돌방 사이에는 팔각형의 불발기가 있는 사분합 들어열개문으로 경계를 했다.

 

온돌방의 정면과 측면은 머름중방위에 모두 양개 여닫이 세살문을 두고 안으로 미닫이문을 달았다. 벽체는 모두 시멘트 모르타르로 마감되어 매우 어색하다. 기둥 위에는 초익공 양식을 취하고 있으나 보머리와 살미가 직절된 1900년대의 경향을 나타내지만 첨차와 보아지 및 화반의 가장자리는 연꽃으로 초각하여 19세기의 장식적인 면을 간직하고 있다.

 

기구 외 구성은 5량으로 처리하여 둥근 대량 위에 동자주대공을 세우고 그 위에 종량을 놓은 후 사다리꼴 판대공을 두었는데 외부의 장식에 비해서는 매우 소박하게 처리했다. 누마루는 3량으로 가구했다.

 

건물의 현재 관리 상태는 매우 양호하여 소유자와 그 친척들의 건물에 대한 애착심이 매우 높았다. 사당은 귀애정의 향 우측에 따로 담장을 둘러 공간을 형성했다. 시멘트로 마감한 높은 기단 위에 막돌 초석을 놓고 원주를 세웠다. 내부는 시멘트로 마감한 바닥에 교의(交椅) 대신에 2자정도 높이로 마루를 들여 그 위에 5분의 위패를 모셨다.

 

정면 3칸 모두에 굽널이 있는 양개 세살문을 달고 기둥 위에는 첨자를 생략한 초익공으로 꾸몄다. 살미 위에는 만개한 연꽃을 올리고 보머리에는 봉두를 조각해 놓았으나 배면은 살미를 직절하여 전혀 장식 없이 처리했다. 가구는 3량으로 간략하게 처리하고 지붕 측면은 방풍판을 달았다.

 

濟後公山碧似銅    비 개인 뒤 팔공산은 푸른 거울과 같고

淡然秋色入軒中    깨끗한 가을빛 집 가운데 들어오네

一潭光影看來好    온 연못에 비친 그림자 보기만 하여도 좋으니

滿岸塵埃滌去空    언덕 가득한 티끌 허공에 씻어버리세

浩氣遠含亭外壁    호연한 기운 아득히 머금은 정자 밖 절벽

詩情時發竹聞風    시정(詩情)이 때때로 일어나고 대숲 바람소리 들리네

眼前物色都收拾    눈앞의 좋은 경치 모두 거두어 들였는데

誰識乾坤造化工    건곤(乾坤)의 조화가 훌륭함을 누가 알겠는가

 

조극승이 환벽정을 노래한 한시로 그의 자는 경휴(景休), 호는 귀애(龜厓), 관향은 창녕으로 현고서당을 창설한 북계 용석(龍錫)의 현손이며 순조 3년(1803) 귀호리에서 경섭(暻燮)의 아들 4형제 중 맏아들로 태어났다.

 

성품이 돈후하고 외모가 준엄하여 7, 8세에 이미 어버이를 섬기고 어른을 공경하는 도리를 알았다. 조금 자람에 향리지학(向裏之學)을 마음에 두고 늘 옛 성현의 궁행실천의 말을 뽑아내어 일상의 바탕으로 삼았고, 일방의 많은 선비들을 창도했다.

 

남북학사(南北學社)에서 강론하여 작흥한 교화가 많으며, 대학강록(大學講錄) 한 권이 있다. 정재(定齋) 류치명(柳致明) 문하에 나아가 심학(心學)위 요지를 얻어들었다.

 

순조 신묘(1831)에 등제하여 양천현을 지냈고, 고종 을해(1875)에 통정에 올라 돈녕부 도정(敦寧府都正) 공조참의에 제수되었으며 두 번 상소를 올려 군덕(君德)에 힘쓰게 했다. 긍암(肯庵) 이돈우(李敦禹)가 가장을 지었고 보국(輔國) 김영수(金永壽)가 묘갈을 지었다. 문집 세권이 전하고 있다.

 

정자 앞 귀애고택에 살고 있는 7대손 조운준(84)씨는 경상북도에 새로 건립할 수 있도록 요청해둔 상태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