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천 문화유산 자료/영천문화유산 답사기

13. 시원한 바람 마중하는 가상리 성지 - 화산면 가상리

이원석(문엄) 2011. 11. 13. 08:05

백학서원 터 주춧돌ㆍ기와조각 남아

 

 

“백학서원은 … 1555년(명종 10)에 세웠으며 … 백학산 아래이자 양강소 위에 …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에 불타버리고 … 1612년(광해군 4)에 다시 세우다 …”라는 내용이 화산지에 나온다.

 

이 기록으로 미루어 이곳에는 백학서원이 있었음을 알 수 있는데 실제로 기둥을 세웠던 주춧돌과 묵은 기와조각들이 남아있었다.

 

전해오는 말에 의하면 이곳은 그 옛날 화주(花洲)고을을 지키는 군인들의 집결지였다고 하는데 뒤에는 산이 도사리고 있고 앞에는 험한 절벽이 가로막고 있으며 시야가 넓고 산중턱의 평탄한 곳은 지형적으로 약간 낮아서 요새지로 매우 적합했을 것으로 보인다.

 

영천시 화산면 가상리 시안미술관 조금 못 미쳐 ‘안동권씨 신녕입향조 구의헌공 묘소’라고 적힌 안내표지석에서부터 답사를 시작했다. 농로를 따라 모산마을로 들어가는 길은 도로사정이 생각보다 험했다. 몇 번인가 자동차의 밑바닥이 땅에 부딪쳤다고 느끼며 1㎞정도 들어가니 모선재(慕先齋)가 나왔다.

 

1429년(세종 12) 문과에 급제, 사헌부 지평과 광주목사 등을 지낸 입향조 구의헌공을 추모하기 위해 후손들이 건립한 것으로 여러 차례의 중수 끝에 1972년에 개축되었다. 좌측에 2칸과 우측에 한 칸의 방을 두고 가운데 2칸의 대청과 앞쪽에 쪽마루를 단 맞배지붕의 건물이다.

 

오학정(烏鶴亭) 액호와 호조참의를 지낸 휘 처정(處貞)의 태암정(泰庵亭) 액호도 함께 걸려있다.

 

정자 주위의 울창한 대나무를 보면서 후손들에게 “학문을 하더라도 벼슬에 나아가지 말고 길쌈하며 밭 갈고 부지런히 살라”는 교훈을 남긴 구의헌공의 청빈함과 절개가 느껴지는 듯했다. 건너편 산기슭에는 묘소와 유허비, 임진왜란 때 공을 세운 여러 자손들의 묘와 묘비들이 즐비하게 서 있다.

 

모선재에서 가상리 성지와 백학서원 터로 가기 위해서는 인적이 드문 산길을 따라 10여리 정도 들어가야만 당도할 수 있다.

 

사람들이 거의 다니지 않아서 산림에 묻혀버린 산길을 더듬으며 양강소 덤 위에 올라서니 무더운 한낮의 더위를 씻어주기라도 하듯 삼창ㆍ선천ㆍ화동ㆍ대천ㆍ사천들에서 시원한 바람으로 마중한다.

 

먼 옛날 성터였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못 터도 있고 논과 밭의 흔적도 곳곳에 남아있었다. 덤 밑에는 규모는 작지만 연륜을 자랑하는 백학산 대성사가 언제나처럼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가상리 성지는 동서의 깎아지른 듯한 경사지를 이용하고 표고(標高) 100m 정도의 산등성을 따라 쌓은 주위 720m, 높이 1m 정도의 성으로 마한과 대항하기 위해 화동성주가 축성했다고 전한다.

 

이 성지는 동서는 깎아지른 듯한 경사지를 이용하고 표고(標高) 100m 정도의 산등성을 따라 쌓은 주위 720m, 높이 1m 정도의 성이다.

 

부근에서 토기류 등이 출토되었고 성을 쌓았던 돌의 흔적이 남아있으며 토석혼축성으로 성벽의 넓이는 2.5m~3m이고 높이는 1m, 길이는 약 250m 정도 남아있다. 성지 내에 직경 3m, 높이 1m 정도 남아있는 흔적이 봉수대 자리라고 전하나 문헌에서는 확인되지 않는다.

 

절벽 아래는 양강소라 불리며 예부터 단오날에는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서 한바탕잔치를 벌이며 즐거움을 나눴고 근처의 마을사람들이 두 편으로 나눠 줄다리기를 하며 풍년을 기원했다고 한다.

 

 

화산 가상리 혈맥잘린 혈등엔 산새소리만…

 

시안미술관이 들어서면서부터 영천시민은 물론 외지인들도 많이 찾아오는 화산면 가상리 주민들은 이 마을이 역사 이래 숱한 전쟁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단 한번도 외침을 당하지 않았다는 자부심이 대단했다.

 

임진왜란 때 명나라 장수 이여송이 조선을 구원하러 와 보니 조선 조정에는 인재들이 매우 많았다고 느꼈다는 것이다. 이여송은 그 까닭이 조선 산수가 수려하기 때문이라 생각해 가는 곳마다 산천의 혈맥을 끊었다고 전한다. 남진했던 이여송은 삼남대로를 통해 다시 북상하며 명으로 돌아갈 때 우리나라의 산세를 보면서 좌·우의 풍수를 보아 큰 인물이 날 만한 자리라며 수많은 명산의 혈맥을 잘라버리는 행위를 했다고 한다.

 

모산 마을에서 화남방면으로 올라가다보면 왼쪽에 가상교가 나온다. 다리를 건넌 후 농로를 따라 3~4백 미터 정도 들어가면 스무골이다.

 

평소에 존경하는 교수님에게 안내를 부탁받은 터라 미리 한번 가봐야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난해 한번 찾은 곳임에도 불구하고 몇 번이나 방황한 뒤 동네어르신들에게 물어물어 겨우 길을 찾았고, 이곳에서 거리는 그다지 멀지 않은 길이었지만 1시간 정도 산을 오르내린 끝에 겨우 찾을 수 있었다. 마을에서 비교적 가까운 곳이었지만 골이 깊어 핸드폰 수신이 되지 않았고 인적이 뜸해 사고를 당하여도 구조되기가 쉽지 않을 것 같아 한순간 긴장이 되기도 했다.

 

 

‘松’자 조심하라는 아내의 당부에 왜장이 돌아간 노귀재

 

 

임진왜란 때 왜장 加藤淸正(가토 기요마사)의 아내가 출정하는 남편에게 조선에 가면 ‘松(송)’자를 특히 조심하라고 신신당부했다고 한다.

 

加藤淸正이 上松(상송)의 북쪽에 와서 이곳을 넘으면 어디냐고 하자 부하들이 “靑松(청송)입니다.”라고 했다. “그럼 지금 이곳은 어디냐”라고 하니 下松(하송)이라고 했고 조금 더 지나서 또다시 “이곳이 어디냐”고 물으니 上松(상송)이라고 했다.

 

갑자기 아내의 말이 생각난 왜장이 “아차 큰 일 날 뻔 했구나” 라고 당황하면서 후퇴명령을 내려 돌아갔다는 전설이 전하고 있다. 오랑캐가 돌아간 고개라고 해서 지금도 그곳을 노귀(虜歸)재, 그 아랫마을을 아차곡으로 부르고 있다.

 

당시 왜장의 아내가 조심하라고 한 ‘松’자는 명나라 장수 李如松(이여송)인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명나라 장수 이여송(?~1598)의 자는 子茂(자무). 遼東(요동) 鐵嶺衛(철령위, 지금의 遼寧省鐵嶺縣) 사람이다. 李成梁(이성량)의 맏아들이며, 아버지의 음덕으로 都指揮同知(도지휘동지)가 되었다. 1583년 山西(산시)의 총병관이 되었으며, 잠시 중앙 관직에 있다가 1587년 宣府(선부)의 총병관을 역임했다.

 

1592년 寧夏(닝샤)에서 拜族(발배족)이 반란을 일으키자 提督陝西討逆軍務總兵官(제독섬서토역군무총병관)에 천거되었는데, 무신으로서 제독이 된 것은 그가 처음이었다. 같은 해 발배족을 토멸하고 그 공적으로 도독으로 승진했다. 같은 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명나라가 조선을 돕게 되어 그도 군사를 이끌고 東征(동정)에 나섰다.

 

1593년 평양에서 小西行長(고니시 유키나가)의 군대를 격파했으나, 벽제관에서는 小早川隆景(고바야카와 다카카게)의 군대에 대패하고 간신히 목숨을 건졌다. 그 뒤 화의를 위주로 사태를 수습하고 그해 말에 귀국했다. 1597년에는 요동 총병관으로 임명되었고 이듬해 土蠻(토만)이 침범하자 그 본거지를 공격했으나 복병에게 기습당해 전사했으며 세월이 흐른 후에 寧遠伯(영원백)에 봉해졌다.

 

 

“인재 못나오게 龍飛登天穴(용비등천혈) 잘라라”

 

임진왜란 때 이여송이 조선을 구원하러 와 보니 조선 조정에는 인재들이 매우 많았다. 이여송은 그 까닭이 조선 산수가 수려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가는 곳마다 산천의 혈맥을 끊었다고 전한다. 남진했던 이여송은 삼남대로를 통해 다시 북상하며 명으로 돌아갈 때 우리나라의 산세를 보면서 좌·우의 풍수를 보아 큰 인물이 날 만한 자리라며 수많은 명산의 혈맥을 잘라버리는 행위를 했다.

 

시안미술관이 들어서면서 영천시민은 물론 외지인들도 많이 찾아오는 화산면 가상리 주민들은 역사 이래 숱한 전쟁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단 한번도 외침을 당하지 않았다는 자부심이 대단하다.

 

화산산맥의 일지맥이 동남쪽으로 뻗고 또한 일지맥이 동일방향으로 뻗어 각 마을 앞뒤 산맥을 이루는 그 사이에 들을 형성하고 구일 안못에서 발한 냇물이 남으로 흘러 들의 중앙부를 통해 신녕천을 이루는 일지류를 형성하는 가상리. 가상리 성지와 백학서원 터가 남아있는 마을 뒤 白鶴山(백학산)의 경치가 매우 아름다운 곳이다.

 

이 마을은 원래 신녕면 대량면 지역이었으나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楸谷(추곡), 茅山(모산)을 병합, 가상리라 해 영천군 화산면에 편입되었고, 1592년 임진왜란 시 권운, 권응수, 권응심 등 일가 제종반 20인이 창의 기병했으며 시안미술관 뜰에는 신녕창의지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모산 마을에서 화남방면으로 올라가다보면 왼쪽에 가상교가 보인다. 다리를 건넌 후 농로를 따라 300~400 미터 정도 들어가면 스무곡이다.

 

지난해 한번 찾은 곳임에도 불구하고 몇 번이나 지나친 뒤 동네어르신에게 물어물어 겨우 길을 찾았고 이곳에서 다시 우거진 나무와 풀들을 헤치며 별로 멀지 않은 길이었지만 40여분 간 산을 여러 차례 오르내린 끝에 겨우 찾을 수 있었다. 3미터 정도의 산혈이 잘려 길로 사용되고 있었고 앞쪽에는 유래를 기록해 놓은 표석비가 세워져 있었다.

 

산 정상에서는 많은 위인을 배출한 걸출한 명당이었던 것이 오히려 화가 되어 혈맥을 잘린 스무골을 내려다보며 산새들을 벗 삼아 잠시 동안이나마 도인이 된 듯한 착각에 빠지기도 했다.

 

이곳에 전하는 전설은 다음과 같다.

 

1592년 임진왜란 때 용연을 선물하면서 忠毅公(충의공) 권응수 장군의 관상을 본 명의 장수 이여송이 그의 지관을 시켜 충의공의 조상묘소를 살펴보고 오라고 명령했다. 공의 조부 참판공 휘 란(鸞)공의 묘소를 보고 간 명의 지관이 충의공조부의 묘가 용이 등천하는 形山(형산)인 龍飛登天穴(용비등천혈)이라고 보고하니 그 후손이 더 이상 발복하지 못하게 용의 꼬리 부분을 잘라버리라고 했다. 山嶝(산등)을 끊은 이곳을 穴嶝(혈등)이라 하고, 아래 골짜기는 임란창의한 공의 손자 운(雲), 충의공 應銖(응수), 應銓(응전), 應平(응평), 應生(응생, 應錘(응추), 應瑞(응서) 7인과 曾孫(증손) 致㾾(치렴), 구, 遇(우), 迪(적), 乙生(을생), 蓂(명), 胤(윤), 建(건), 進(진), 逸(일) 등 10인과 孫婿(손서) 金聲達(김성달), 曺舳(조축), 鄭于藩(정우번) 3인 등 20인의 충의의사가 임란공신에 敍勳(서훈)되었다고 스무골이라 전해 오고 있다. 지난 2002년 10월 임란신녕의병창의추모회에서 왜구의 잔인한 만행을 보존하기 위해 이에 표석을 세워 두었다.

 

 

5백여 년 풍상 지킨 느티나무 ‘풍영정’

 

한편, 고된 농사일을 하면서 땀을 식히고 시원한 바람을 느끼며 위안을 삼는 가상리 추곡마을 중앙에 ‘풍영정’이라는 이름을 가진 느티나무가 5백여 년의 풍상을 묵묵히 지켜오고 있다. 나무가 심어질 당시를 생각하며 잠시 쉬고 있으려니 한 할머니가 노구를 이끌고 나무 밑 의자로 힘든 걸음을 했다. “할머니, 혼자 오셨어요?”라고 물으니 “60여 년 간 거의 매일 찾아왔다”며 이곳은 이 마을 안동권씨 문중의 마음의 고향이라고 말했다.

 

이 느티나무는 수령이 5백여 년이 넘은 것으로, 안동권씨 신녕입향조인 九宜軒(구의헌) 권열(1424-1507)이 조선 연산군 2년(1496) 광주목사 재임 시 연산의 난정을 직간하고, 안동으로부터 楸谷里(추곡리)로 은거해 살면서 심었으리라 추정되는 것으로 후손들이 대를 이어 이 나무아래에서 공자의 유풍에 힘입어 시와 학문을 강론하고 예절과 활쏘기를 익혔다고 한다.

 

후손들은 임진왜란을 당해 同堂(동당)의 형제숙질들이 이곳에서 창의, 이름이 靑史(청사)에 올랐으나 자신들의 공적을 자랑하지 않았음은 모두 이 나무를 보호하는 뜻에서 예의와 사양(辭讓)하는 가풍을 얻었기 때문이었다고. 창의는 예의에서 발휘되고 무공은 활의 힘에서 비롯된 것이기에, 훗날의 자손들로 하여금 모두 여기에서 節文(절문)하며, 여기에서 덕행을 보게 된다면 곧, 九宜軒公(구의헌공)이 후손들에게 내려준 두터운 그늘이 이 나무와 더불어 모두 크다 할 것이다.

 

후일 공의 현손(玄孫) 풍영정(風詠亭) 權應道(권응도, 1616-1674)가 이 나무의 이름을 풍영정이라 하고 자신의 아호 또한 이것으로 하여, 나무주위에 培根築石(배근축석)하여, 때때로 冠童(관동)들과 시 읊고 習禮(습례)하였다고 안내판에 기술(1669)되어 있다.

 

중국의 동북공정 프로젝트가 도를 넘고 있는 듯하다. 고구려와 부여, 발해 역사를 포함해 한강유역까지 자신들의 역사로 삼으려는 술책을 부리고 있다. 일본의 망발에 대해서는 쉽게 흥분하는 한국인들이 중국의 만행에 대해서는 너무 초연한 것 같아 많은 걱정이 된다. 역사를 제대로 보고 우리 것을 지키려는 노력이 어느 때 보다도 절실히 요구되는 시점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