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천뉴스24/시와 연애를 하자(장병훈 편집위원)

나팔꽃씨 - 장병근

이원석(문엄) 2010. 6. 7. 14:12

장병훈 편집위원 siijang@hanmail.net

                                                                              
녹슨 쇠울타리에
말라죽은 나팔꽃 줄기는
죽는 순간까지 필사적으로 기어간
나팔꽃의 길이다
줄기에 조롱조롱 달린 씨방을 손톱으로 누르다
깍지를 탈탈 털고
네 알 씩 여섯 알씩 까만 씨들이 튀어나온다
손바닥 안의 팔만대장경,
무광택의 암흑 물질이
손금을 빨아들이고 있다
마음에 새기는 것은 얼마나 힘겨운 일이냐
살아서 기어오르라는,
단 하나의 말씀으로 빽빽한
화약같은 나팔꽃씨
입 속에 털어넣고 물을 마셨다
오늘 밤, 온몸에 나팔꽃 문신이 번져
나는 한 철 환할 것이다

 

 

아, 그렇구나. 나팔꽃씨를 먹을 수도 있구나. ‘화약같은 나팔꽃씨’, 입 속에 털어넣으면 ‘나팔꽃 문신’이 번지는구나. 그래서 한 철 환해질 수 있구나.

시인의 상상력도 녹슨 울타리 같은 이 세상에, 나팔꽃줄기처럼 필사적으로 뻗어나가는 나팔꽃의 길이구나. 그래서 밤새 입술을 닫고 힘겨운 사투를 벌이다가, 아침 햇살 비치면 세상을 향해 나팔을 부는구나.

두고 보자. 나팔꽃. 올 여름에는 나도 뜨겁게 네 입술을 향해 거칠게 나팔 한 번 불고 말 터이니.


   
▲ 시인 장병훈

시인 장병훈은 월간 시전문지 <심상>을 통하여 문단에 나왔으며, 동리목월문학관의 ‘詩作나무’ 동인으로 활동하고 있다.

현재 화룡동 산 7번지의 선화여고에서 한국어를 가르치며 문학동아리 ‘좁은문’지기를 하고 있다.

* 영천뉴스24 블로그인 <별빛촌닷컴>(http://www.01000.in)을 방문하면 장병훈의 <시와 연애를 하자> 전편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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