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도 성곡리 출토유물에서 이서국의 실체를 엿볼 수 있을까?”
|
 |
|
▲ 3G 13호 석곽묘 유물노출후 전경 |
경상북도문화재연구원(원장 이재동)은 11일 오후 2시 연구원 전시실과 시청각실에서 청도와 영천의 문화원관계자 및 향토사학자, 도청과 시군문화재 담당부서 직원 등 1백5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청도 성곡리 유적 기획전시회 및 초청강연회를 개최한다.
이번 전시회는 5세기 이후의 유물 3천6백여점이 출토된 청도 성곡리의 유물을 소개, 이서국과의 연관성을 재조명하기 위해 기획됐다.
2008년 조사가 끝난 성곡리 유적에서는 창녕계통의 토기가 대량으로 쏟아져 나와 학계의 집중적인 관심을 모았다.
|
 |
|
▲ 3Gr 13호 석곽묘 유물세부 |
지금까지 청도지역에서 창녕 계통의 토기양식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단편적으로 알려지기는 했으나 이처럼 정식 발굴조사에서 대량의 창녕 양식 토기가 쏟아진 것은 처음이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창녕지역에서도 교동, 계성리 고분군이 조사돼 비화가야의 면모가 일부 밝혀졌으나 이 정도의 대규모 유적이 조사된 예가 없는 점도 성곡리 유적의 가치를 더하고 있다.
토기 양식과는 달리 성곡리 고분양식이 창녕지역에서도 확인되지 않은 이 지역의 고유한 특징을 간직하고 있는 것으로 확인돼 앞으로 학계의 종합적인 분석이 이뤄진다면 청도 지역 고대사회의 문화상을 복원하는데 중요한 단서가 될 것으로 보인다.
전시회와 함께 기획된 강연회에서는 이형우 영남대 국사학과 교수가 ‘사료로 본 이서국이야기’를 주제로 강연을 하고 김옥순 조사1팀장이 성곡리 유적조사 성과를 발표한다.
이재동 원장은 “경북문화재연구원은 이번 전시회를 시작으로 경북도내의 여러 유적에서 조사된 성과를 기획ㆍ전시함으로써 우리지역 문화의 우수성과 다양성을 도민에게 알려나가겠다”고 밝혔다.
한편 이번 전시회는 오는 12월 10일까지 계속된다.
사료(史料)로 본 이서국(伊西國) 이야기
|
|
이 형 우 (영남대)
Ⅰ
경상도 지역은 동쪽과 남쪽이 바다와 맞닿아 있으며 내륙은 백두대간에 의하여 한반도의 중북부지역과 나누어지므로 흔히 영남이라고도 부른다.
강원도 함백산에서 시작하여 남해로 들어가는 장장 520여 km의 낙동강은 그 유역의 면적이 남한의 약 ¼에 해당 될 만큼 많은 분지와 퇴적평야를 이루고 있어 ‘영남의 젖줄’이라고 한다.
이 지역의 안동을 비롯한 밀양, 영덕 등지에서 구석기유물이 발견된 것을 보면 일찍이 선사시대부터 사람들이 활동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대륙으로부터 금속문화가 유입되면서 급속한 사회적 변화를 가져오게 되었으며 서력기원 전후한 시기에 이르러서 여러 개의 작은 정치집단들이 형성되었다.
현재 전해지고 있는 우리나라의 최고 역사서인『삼국사기』와『삼국유사』를 보면 신라의 전신이었던 사로국과 금관가야를 비롯한 6가야 등 약 20여 소국이 존재하였다고 하며 3세기 중엽에 편찬된 중국의 사서인『삼국지』위지 동이전에는 진ㆍ변한이라 하여 훨씬 구체적인 당시의 모습을 기록하고 있다.
국내외의 기록이 상반되어 많은 논란이 되고 있으나 국내의 사서가 보다 정확한 사실을 전해주는 것으로 생각되며 이들 중 신라의 고대국가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던 청도지역 이서국의 성격에 대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Ⅱ
이서국에 관한 기록은 국내 최고의 사서인『삼국사기』와『삼국유사』에 단편적인 내용들이 전하고 있다.
먼저『삼국사기』신라본기 유례이사금 14년조에
○ (전략) 이서고국이 금성으로 쳐들어오므로 사로국은 크게 군사를 동원하여 적을 방어하였으나 능히 이를 격파하지 못하였다. 그런데 갑자기 이상한 군사들이 몰려왔는데 그 수는 헤아릴 수 없이 많았고 군사들은 모두 댓잎을 꽂고 적을 격파하였다. (후략)
라 하여 신라 제14대 유례왕 14년(297)에 옛 이서국이 금성을 공격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또한『삼국유사』기이편에는 각각 다음과 같은 내용이 전하고 있다.
○ 노례왕 14년(37)에 이서국 사람이 와서 금성을 공격하였다. 운문사에 예부터 전해 내려오는『제사납전기(諸寺納田記』를 살펴보면, 정관 6년 임진년(632)에 이서군 금오촌의 영미사가 토지를 바쳤다고 하였는데, 금오촌은 지금의 청도 땅이니, 곧 청도군은 옛 이서군이다. (권1, 이서국조)
○ (전략) 건무 18년(42)에 이서국을 정벌하여 멸망시켰으며, 이해에 고구려의 군대가 와서 침범하였다. (권1, 제3대 노례왕조)
○ (전략) 제14대 유리왕 때 이서국 사람들이 금성을 공격해 왔다. 신라는 크게 군사를 동원하여 막았으나 오랫동안 저항 할 수가 없었다. 홀연히 이상한 군사가 와서 도왔는데, 그들은 모두 댓잎을 귀에 꽂고 있었으며, 신라 군사와 힘을 합쳐 적을 격파하였다. (후략) (권1, 미추왕 죽엽군조)
이와 같이『삼국유사』에는 이서국의 위치와 멸망, 죽엽군의 설화 등 다양하고 구체적인 내용들이 전하고 있다.
이는『삼국유사』를 저술한 일연의 출생지가 청도와 가까운 지금의 경산이었으며, 한때 운문사와 용천사 그리고 말년에는 화산 인각사에서 많은 저술 활동을 하였으므로 이서국에 관한 내용을 보다 자세히 기록하였다고 하겠다.
『삼국사기』와『삼국유사』에는 신라 2대 유리(노례)왕과 14대 유례왕을 혼돈하였기 때문에 이서국의 멸망 내용 등에 서로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삼국사기』의 유례왕 14년조 기사와『삼국유사』의 미추왕 죽엽군조의 기사에 금성을 공격한 군대를 옛 이서국의 군사라 한 것을 보면 이서국은 이보다 훨씬 전에 사로국에 병합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삼국유사』의 이서국조를 참고하면 이서국의 옛 터는 지금의 경상북도 청도 부근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서국과 더불어 비교적 사로국과 가까운 지역에 위치하고 있었던 압독국(경산), 음집벌국(안강) 등이 2세기 초 무렵 사로국에 합쳐졌으며, 이들은 약 40년 후 다시 모반을 일으켰으나 곧 진압되고 말았다고 한다.
따라서 이서국도 사로국이 대외 팽창을 본격적으로 개시하였던 2세기 초에 압독국과 더불어 병합되었다.
다만 점령지역에 대한 직접적인 통치체제가 완벽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잔존세력이 비교적 강성하였던 압독국이나 이서국 등은 모반이나 금성까지의 공격이 가능하였을 것이다. 그러므로 신라본기 유례왕조의 기사에 옛 이서국의 침공사실을 분명히 밝히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양 사서에 사로국이 일대 위기를 맞을 정도로 이서고국이 대규모로 반격하였다는 기사는 역사적 사실로서 보다 설화적 내용 그 자체에 의미가 있다고 보인다.
Ⅲ
|
 |
|
▲ 대동여지도 상의 청도 |
청도군의 명칭은『고려사』지리지에 고려 초에 대성군과 오악, 형산, 소산 등 3현이 합해져 형성되었으며, 밀성군의 속읍으로 삼았다가 예종 4년(1109)에 감무를 파견하였다고 한다.
또 같은 책 밀성군조를 보면 청도군의 전신은 신라의 대성군과 오악, 형산, 소산 등 3현으로 대성군과 오악 등 3현은 별개의 지역 인 것으로 보여진다.
한편 대성군은『삼국사기』지리지에 본래 구도성이었으며 솔이산성(소산현), 가산현(경산성), 오도산성 등 3성은 청도군에 약장현과 동기정은 경주에 합속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 같은 책 밀성군조에는 오구산, 형산, 소산 등 3현이 그 속현으로 되어 있다.
이후의 지리지 역시 한결같이 이서국 → 이서군 → 대성군 → 청도군으로 연결시키고 있다. 따라서 대성군은 바로 청도군의 전신으로만 보게 되었다.
하지만 이는『삼국사기』의 오류에서 비롯된 것으로 청도군의 전신이었던 이서군의 중심세력이었던 3성은 그 이전이거나 당시에 밀성군에 편입되었으며, 따라서『삼국사기』지리지의 대성군은 청도군의 전신이었던 이서군이 개편된 것이 아니고 약장현, 동기정을 포함하는 경주의 동쪽에 위치하였던 대성군이며, 이서국의 중심세력 집단이라 할 수 있는 3성은 밀성군에 편입되었다가 고려초에 청도군으로 개칭된 것으로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즉『삼국사기』의 대성군조는 구도성 지역 내에 솔이산성 등 3성이 존재한 것처럼 기술되어 있으나 사실은 3성이 이서국의 중심세력이었으므로 구도성이라 총칭하게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Ⅳ
청도군의 지역적 특성과 유적의 분포를 보면, 현재의 청도천 유역의 화양읍과 이서면, 동창천 유역의 매전면 등 세 지역이 일찍부터 취락을 형성하였으며 중심세력으로 성장하였다고 하겠다. 따라서 이서국의 중심세력으로 전해지고 있는 솔이산성은 매전면 일대로, 가산현은 폐성ㆍ견성이라 전해지는 화양읍 소라리로 비정함에 큰 무리가 없을 것 같다.
다만 오도산성은 문헌마다 명칭이 다르게 전해지고 있으나 현재의 유천 북쪽 해발 약 500m 지점의 오리산성(오혜사성)을 지칭하는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이곳은 앞의 두 지역처럼 일찍부터 집단취락지가 형성되어 이서국의 중심 세력으로 성장하였다고 할 근거가 희박하다.
사로국이 이서국을 병합한 후 밀양을 거쳐 낙동강 하류 방면과 창녕을 거쳐 고령 방면으로 진출하는 과정에서 전초기지였으며, 그 후에도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였으므로, 구도성ㆍ대성이라 불리었고 나아가 원래의 대성군과 혼돈을 하게 된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이서국의 성지에 대해서는 김정호도『삼국사기』지리지의 대성군이 청도가 아니라 형산(폐성, 견성)이라 하였으며, 폐성의 유래를 신라 유리왕의 이서국 침공 때의 설화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한『오산지』에도 폐성이 바로 이서산성이라 하였다.
그러나 현재의 화양읍 소라리의 폐성지는 주구형상을 한 용각산 지맥의 돌출부분으로 ‘자연암석 위에 주위 1km 미만의 토성이 있었다.’는 점 등으로 미루어 이서국의 고지라 추정하기에는 망설여진다.
그런데 1832년 간행된『청도군 읍지』고적조를 보면 이서고성은 ‘군의 북쪽 10리에 있으며 4면이 모두 토성으로 주위가 일천여척이며 이 곳을 이서고지라 전한다.’고 하였으며,『조선보물고적조사자료』에도 이서면 토평리를 이서국의 고지라 지적하였다.
현재의 토평리는 행정구역상 화양읍에 속하며 서쪽으로는 이서면 학산리와 접하고 있다. 토평리의 ‘와촌’에서 ‘둔직’까지는 화양읍과 이서면의 경계선인 약 2km의 구릉이 길게 뻗어 있으며, 다시 류등리의 ‘짐터’까지 이어지면서 커다란 반월 모양의 지형을 갖추고 있다.
반면 남쪽은 청도천까지 토평이란 명칭처럼 넓은 평지가 전개되며 서쪽의 이서면 학성리, 서원리와 연결되어 군내에서 가장 넓은 들판을 형성하고 있다.
토평리의 동ㆍ서ㆍ북을 연결하는 반월형의 구릉에 백곡토성의 흔적이 있었다고 전하나 현재는 민가와 경작지로 변하여 유물의 채취도 불가하며 서쪽에 인접한 구라리 일대에서만 많은 토기편들이 채집된다.
한편 성지 북편의 자연부락인 ‘둔직’은 이서국의 왕성을 지키기 위한 군대가 주둔하였던 곳에서 비롯되었으며, ‘근바위’, ‘근방우’의 명칭도 이서국의 서쪽 왕성을 지키는 곳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따라서 이서국의 고지는 현재 화양읍 토평리 백곡마을을 중심으로 반월의 지형을 갖춘 곳에 비정하며, 종래 ‘이서국기’라 하였던 화양읍 소라리의 폐성지(대성, 이서산성)는 이서국성을 지키는 중요한 전초기지이며 요충지였다고 생각된다.
Ⅴ
이상에서 살펴 본 이서국 관계의 내용이 얼마만큼 타당한 것인가를 알아보기 위하여 청도지역의 자연지리적환경과 고고학적 자료에 대하여 살펴본다.
현재 청도군은 남북을 가로지르는 용각산맥에 의하여 동서 두 지역으로 크게 구분되며, 양 지역의 면적은 비슷하나 군의 동부는 8할이 산지인 반면, 서부지역은 분지로 청도천 유역의 평지와 구릉이 대부분 경작지로 농경지의 면적은 동부의 20배가 넘는다.
또한 경주시 산내면과 운문산에서 시작되는 동창천이 서부지역의 청도천과 합류하여 밀양강을 이루는 곳이 유천이다. 따라서 이곳은 현재 경상남도와 경상북도의 경계이며, 서쪽으로 경산과 창녕, 동쪽으로 경주를 연결하는 교통상의 요지이다.
이 지역의 고대 취락집단의 존재, 정치적 지배자의 출현 및 사회체제를 알려주는 중요한 선사유적인 고인돌의 분포를 보면 청도천 유역과 동창천 유역에 약 200여기가 분포되어 있다.
군의 서부지역에는 청도천 상류에 해당되는 각북면과 풍각면에 고인돌 20여기가 남아 있으며 특히 하류의 각남면ㆍ화양읍ㆍ청도읍에 밀집되어 있다.
동부지역의 동창천 유역에는 경주시와 접하고 있는 동창천 상류의 운문면 마일리와 공암리, 지촌리, 봉하리에 고인돌이 밀집되어 분포하고 있으며, 운문천과 합류하는 지점의 대천면과 금천면의 신지동과 사전동, 매전면에 분포하고 있다.
이곳의 지형적 특징은 동창천 유역에만 조그만 들판이 있을 뿐 강의 양쪽은 거의가 높은 산지로 되어있다. 따라서 고인돌의 분포도 해발 약 400m의 마일리에서부터 유천까지 부분적으로 밀집되어 있어 동창천에서 100m이내의 들판과 구릉을 따라 일직부터 소규모 취락들이 형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1978년 각남면 화동에서 마제석검, 마제석촉 등이 출토되어 김해 ․ 창원식 마제석검이 내륙지방에서도 나온다는 것이 확인 되었다. 따라서 김해ㆍ창원지역과의 관계도 주목된다.
한편 영천ㆍ대구ㆍ경주 등 주변 지역에서는 청동유물이 비교적 풍부하게 출토되었으나 청도에서는 지금까지 청동기 및 철기 유물이 거의 발견되지 않았다. 다만 운문ㆍ화양ㆍ이서ㆍ각남ㆍ풍각ㆍ매전면 등지에 상당수의 고분이 산재하여 있다.
해발 120~250m 사이의 능선에 남아있는 고분들은 직경 5m, 높이 1m 정도이며 대부분 파괴된 봉분주위에서 영남지역의 고분들에서 많이 출토되는 토기편들이 주로 발견되었다.
이처럼 삼국시대 및 그 이전에 해당되는 출토유물과 이들 고분의 양식이 기본적으로 고인돌의 하부구조와 석관묘의 구조로 확대ㆍ계승한 것이라는 사실을 참고할 때 이들 고분축조 집단은 고인돌을 축조한 선주집단을 계승하여 상당한 지배집단으로 성장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밀양강의 상류인 동부지역의 동창천과 서부지역의 청도천 유역에 일찍부터 고인돌 축조집단이 취락을 형성하였으며, 또한 이를 계승한 보다 강력한 정치집단이 화양읍 토평동 일대를 중심으로 하여 이서국으로 발전하였다.
한편『삼국지』나『삼국사기』에 전하는 ‘국’의 하위지역 단위가 ‘성’이었으며, 특히 산성은 방어적인 고지성 집락이 발전한 것으로 본다면 운문ㆍ매전ㆍ이서ㆍ각남ㆍ화양ㆍ풍각면 등의 13곳 성지가 주목된다.
Ⅵ
한편 청도지역과 이서국이 사로국이 성장 발전하는데 어떠한 역할을 하였는지 살펴보겠다.
사로국이 위치하였던 경주지역은 태백산맥의 지맥들이 형성한 마북산, 금강산, 주사산, 단석산, 토함산 등으로 둘러싸여 있다. 따라서 서남부 지역과의 교통은 경주시 효현동에서 합류하는 형산강의 세 지류 가운데 남천 유역을 따라 울산방향과 통하고 형산강 상류를 따라서 언양 방향과, 건천 유역을 따라서는 서부지역으로 각각 통하고 있다.
사로국이 가장 먼저 대외진출을 시도한 것은 남부지역 이었는데 이는 탈해 집단이 이주해 들어오면서 성장하여 정착한 근거지가 울산과 동래 지역이었는데 탈해가 왕이 되면서 이들 지역이 자연스럽게 사로국의 영토가 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남쪽의 금관가야의 포진으로 더 이상의 진출은 불가능하게 되었다.
다음으로 사로국은 서남쪽의 유일한 통로인 대천유역의 건천방향으로 진출을 시도하였다. 이 지역은 인내산과 건천남쪽 부산성이 있는 주사산 사이 고개를 지나면 서쪽으로 아화ㆍ영천ㆍ경산ㆍ대구로 이어지며, 건천에서 남쪽으로 단석산과 주사산 사이의 계곡을 지나면 동창천과 연결되어 청도ㆍ밀양ㆍ창녕지역과 통하게 된다.
이들 지역에는 사로국과 같이 일찍부터 유력한 정치집단으로 성장하였던 이서국ㆍ골벌국ㆍ압독국 등이 존재하고 있었다. 이들 3국중 압독국은 파사왕 23년(101)에 사로국에 내항하였으며 이서국도 이와 비슷한 시기에 사로국에 병합되었다고 보여지며 골벌국은 조분왕 7년(237) 사로국에 항복하였다.
특히 파사왕대 압독국과 이서국의 병합은 사로국이 낙동강 중류 가야지역으로 진출하는데 있어서 절대적인 요충지를 확보한 셈이었다. 사로국이 낙동강유역으로 진출하기 위해서는 경산과 대구를 지나는 길과 건천에서 고개를 넘어 청도를 지나는 길이 있는데 압독국과 이서국을 병합함으로써 이들 통로를 모두 확보하게 된 것이다.『밀주징신록』을 보면 지증ㆍ 법흥ㆍ진흥왕대에 이사부, 사다함 등에 의한 신라의 금관가야와 대가야의 정벌내용이 구체적으로 언급되어 있다.
이외에도 이서국과 사로국의 전투장이었던 마전암과 어정, 오산, 풍류현, 영정사, 왕당, 왕정자 등 신라왕의 유행소에 관한 내용들을 참고해보면 신라의 가야지역 진출은 이서국의 고지였던 청도를 전초지로 하여 밀양과 창녕의 양 방향으로 진출하였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신라의 낙동강지역 양 가야세력의 정벌과정에서 일시 머무름에 연유된 파서막(파서리)을 비롯한 기타 내용을 보면 청도ㆍ창녕ㆍ밀양을 통하여 진출하였음을 알 수 있다.
현재 경주시에서 청도로 통하는 동창천유역에도 마곡(馬谷), 마전현(馬轉峴), 창리(倉里) 등 장수와 기마군의 이동 및 전투에 얽힌 설화의 내용을 전하는 많은 지명들이 남아있는 것으로 보아 이서국의 멸망과 그 후 신라의 서남방 진출의 중요한 통로로 이용되었으며 신라 통일 후에도 밀양지역과 연결하는 중요한 교통로였음을 알 수 있다.
또한『삼국사기』잡지, 제사조에는 신라 최고의 제사인 대사를 지낸 삼산이 기록되어 있다. 첫 번째는 내력(奈歷)[習比山]이고 두 번째는 골화(骨化)[切也火郡]이며, 세 번째는 혈례(穴禮)[大城郡]이다. 이들 삼산신은 종묘를 능가하는 호국신으로 추앙되었고, 삼산은 신라 건국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 가운데 혈례는 대성군에 있다고 하였으므로 곳 청도에 위치했던 것이다.
이는 곧 청도지역이 신라의 가장 큰 제사인 대사를 지낼 만큼 중요한 곳이었음을 말해 주고 있다고 하겠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