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천 문화유산 자료/영천 지명유래 및 마을변천사

139. 평천리(平泉里)

이원석(문엄) 2011. 11. 14. 15:44

1) 마을의 자연환경

임진왜란 이후 거듭되는 가뭄으로 온 마을의 식수가 고갈 상태에 이르렀지만 들판 아무 곳에나 우물을 파면 샘물이 잘 나왔으므로 평천이라 하였다.

2) 마을의 역사

영천군 환귀면(還歸面)에 속했던 마을이며 평천(平泉), 임천(林泉), 행화(杏花), 다산(茶山), 신촌(新村)의 일부가 합하여된 마을로서 농업용수가 풍부하여 농산물이 매우 잘되는 곳이기도 하다. 1914년 일제가 강침한 후 우리의 정신과 풍습 및 전통을 말살시키려고 지명도 임의로 변경시키고 또 행정구역도 통폐합했던 것이다. 이 마을도 예외는 될 수 없이 여러 마을과 합하여 행정리 명칭이 된 것이다.

▶ 밑덤ㆍ다칭ㆍ다산(茶山) 덤 밑으로 강이 흘렀으나 어느 날 벼락으로 덤이 무너져 강을 메웠고 그 터에 사람 살기가 좋아 마을이 생겼다고 한다. 벽진이씨와 성산이씨가 주성이다.

▶ 들새미ㆍ평천(平泉) 원래 영천군 환귀면(還歸面) 지역으로 들 가운데 샘이 있으므로 이렇게 불리어 왔다. 또 임란 이후 거듭되는 한발로 온 마을의 식수가 고갈 상태에 이르렀을 때도 들판 아무 곳에나 우물을 파면 물이 잘 나왔다 하여 평천(平泉)이라고도 하였다 한다.

▶ 부연ㆍ부련리(浮蓮里) 평천 동쪽에 있는 마을로 들 한가운데가 아주 낮아 마치 연꽃이 떠 있는 형상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벽진이씨 등이 살고 있다.

▶ 새마<신촌(新村)> 평천 남쪽에 새로 생긴 마을이다. 들판을 개척하여 집을 세우고 농사를 짓는데 농작물이 잘 되어 새로운 마을을 형성하였다 하여 새마라고 한다.

▶ 임천(林泉) 평천 북서쪽에 있는 마을로 숲이 있었고 옛날에는 횡기 장터로 주막이 많았다 하며 숲<林>과 샘<泉>이 많다 하여 임천(林泉)이라 하였으며 동래정씨가 주성이다.

▶ 행화촌(杏花村) 옛날 이 마을에 살구꽃이 만개하여 아름다운 경치를 이루었으므로 행화촌(杏花村)이라 불렀다. 또 이곳은 수원이 좋아 아무리 극심한 가뭄일지라도 식수가 고갈되는 일이 없고 어디든지 파면 물이 나온다고 한다.

3) 마을의 특징

영천댐을 만들 정도로 다량의 수경(水景)이 저 멀리 영덕군(盈德郡) 지품면(知品面)에서 발하여 흐르는 자호천(紫湖川)의 많은 물이 퇴적하여 비옥한 평야를 형성한 그 한 가운데 위치하고 있는 마을로서 풍부한 농산물, 편리한 교통, 옛날에 각종 물품의 교역지였고 모든 물자가 풍부한 곳이다. 지금도 그대로 존속되기에 인심이 매우 후하고 인정미가 넘치는 마을이다.

비옥한 토지이기에 일찍부터 사과 재배가 성했다. 1920년대에 이미 일본인들이 침입하여 사과생산을 했으며 또 벼 후기작으로 도내에서도 가장 일찍이 딸기 재배를 하였다. 1960년에 이미 일본과 계약 재배하여 딸기를 일본으로 수출한 사실이 있을 정도로 농업분야는 예나 지금이나 앞선 마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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