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천 문화유산 자료/영천문화유산 답사기

33. 반가형식 갖춘 만취당 사대부 생활모습 '물씬' - 금호 오계리

이원석(문엄) 2011. 11. 13. 08:20

마을 뒤 수고 12m, 나무둘레 1.1m인 180년 된 280본의 소나무 위용 과시

 

금호에서 대창으로 가다 고속도로 조금 못 미친 왼쪽마을인 오계리로 들어가다 보면 오계1리 쉼터옆에 산림유전자원보호림(천연보호림)으로 지정(96. 4. 10)된 수고 4~16m, 수령 30~200년된 소나무외 4종의 나무가 나타난다.

 

이곳과 같은 날짜에 산림유전자원보호림으로 지정된 뒤쪽의 오계 숲은 전라도 병마절도사를 지낸 조학신(1732~1800)이 만취당을 건립한 뒤 직접 심었다고 전하는데 수고 12m, 나무둘레 1.1m인 180년 된 280본의 소나무가 1.31㏊의 면적에 그 위용을 과시하며 줄지어 서있다.

 

새소리, 맑은 바람소리와 함께 이날따라 유난히 크게 들리는 개 짖는 소리를 들으면서 상추와 무, 열무 등이 심긴 텃밭을 바라보며 소나무 숲을 한 바퀴 돌아 나오니 만취당 초입에 자리 잡은 유형문화재 제333호(01. 11. 1) 금산당이 자잡고 있다.

 

금산당은 능참봉 조병문이 둘째아들의 살림집으로 건립했다고 하는데 건물의 배치는 ‘ㄱ’자형 평면의 사랑채가 전면에 남향으로 자리하고 뒤쪽에 ‘ㅡ’자형 안채가 위치하고 있다. 그러나 초건 당시에는 안채 전면 좌측에 3칸 집이 자리하여 전체적으로 트인 ‘ㅁ’자형 배치를 이루고 있었으며, 안채 우측 쪽으로 협문을 두어 만취당으로 직접 연결했으나 만취당 보수 시 협문을 없앴다.

 

현재 출입부에 대문채가 있었고 사랑 좌측 편에 고방 및 방앗간채가 자리하였다 한다. 그리고 고방채 앞쪽으로 마구 및 초당방이 있어 반가의 형식을 갖추었으나 현재는 안채와 사랑채 2동만 자리하고 있다.

 

중요민속자료 제175호(84. 1. 10)인 만취당(晩翠堂)은 지산 조호익의 7세손인 조학신이 젊은 시절 송림조성과 함께 지은 살림집으로 앞쪽의 광명헌(光明軒)과 후방에 배치된 별묘(別廟) 및 보본재(報本齋)는 후대에 추가로 건축된 것으로 전해진다.

 

조학신은 치재 선적의 아들로 태어남에 도량과 사람됨이 뛰어났고 1759년 영조의 부름에 나아가 칼 쓰는 시합을 보였더니 왕이 장하다고 크게 칭찬하여 사복(司僕) 내승(內乘)으로 임명했다. 내직으로는 국가의 중요 직책을 맡았고, 밖으로는 여러 고을의 목사(牧使)를 지냈다.

 

그가 백성을 다스림에 정성을 다하니 정조가 높이 칭찬하여 규장각지(奎章閣誌)와 대전통편(大典通偏) 등 각각 1부와 말 한 필을 하사했고 세상을 하직하매 왕으로부터 부조와 제문이 내려졌다.

 

이 집은 야산의 송림이 낮게 둘러싼 평지마을의 중심부에 넓게 자리 잡았으며 길 쪽의 새 사랑채와 행랑채의 솟을대문 지붕사이로 사랑채와 안채의 지붕마루가 조금씩 보이는 평면적인 경관을 이루고 있다. 대문을 들어서기 전에 만취당을 한번 올려다보면 담장과 솟을대문 지붕사이로 살림채의 모습이 조금씩 보인다. 솟을대문, 평대문, 월광문, 정려문과 사립문까지.

 

행랑채를 넓은 사랑마당을 통하여 멀리 떨어지게 배치한 사랑채는 안채와 튼 ‘ㅁ’자를 이루었고 오른편에 사당이 위치했으며 그 뒤쪽에 체천위[遞遷位, 봉사손의 대가 끊긴 신주를 최장방(最長旁)의 집으로 옮겨서 제사 지내는 것]를 모신 별묘와 보본재 등이 자리 잡고 있어서 사대부 저택의 면모를 갖추었다.

 

안채는 ‘ㅁ’자형으로 남향했으며 그 중앙부 4칸 중 오른쪽 2칸은 툇마루의 뒤쪽에 안방을 통칸으로 구성했다. 중앙부 4칸의 양끝에서는 마당을 에워싸듯이 동향, 서향한 양익(兩翼)이 남쪽으로 뻗어내려 대칭을 이루었는데 안방 쪽에는 부엌 3칸과 고방 2칸을 설치했고 대청 쪽에는 모서리에 작은방 1칸을 두고 그 앞쪽으로 아랫방과 마루방 등을 같은 크기인 5칸 크기로 배설했다.

 

만취당이라는 현판이 붙은 큰 사랑채는 현주인인 조익현씨의 할아버지 조석환씨가 한말 독립군의 군자금 헌납사건으로 일제관헌에 의해 재해를 당한 것을 중수한 것이다. 정면 5칸인데 그중 왼쪽 2칸은 사랑방으로 앞쪽에 툇마루를 꾸몄으며 오른쪽 2칸에는 앞이 트인 대청을 드렸다.

 

그리고 오른쪽 끝 1칸은 앞뒷면에 툇마루를 시설한 재방(齋房)으로 꾸몄으며 재방의 뒷벽에는 두 짝 여닫이 살문을 달아 뒤쪽의 사당과 밀접하게 연결되도록 했다. 설날과 추석의 경우에는 사당에서 재를 지내고 일반제사의 경우에는 재방에 신주를 모셔 와서 지낸다고 한다.

 

사랑채의 왼쪽으로는 사랑마당에서 안마당으로 통하는 중문간 및 2칸의 중 사랑방과 마루 1칸이 ‘一’자로 배열된 중 사랑채가 있다.

 

안채의 구조는 잡석기단 위에 거칠게 다듬은 방형(方形)초석을 놓아 네모기둥을 세웠고, 대창상부는 3량(三樑)으로 구름 위에 달이 떠있는 형상을 조각한 것으로 보이는 판대공을 세워서 마루도리와 장여를 받고 있다.

 

사랑채는 마루 주위에는 두리기둥(圓柱)을, 방에는 네모기둥(方柱)을 세웠고 대청의 상부가구는 5량으로 초각(草刻)한 판대공을 사용했다. 두리기둥을 둥근 주춧돌이 받치고 있는 모습은 이질적으로 느껴질 수도 있는 나무와 돌의 개념을 깨고 있다.

 

두리기둥의 다른 부분과 달리 둥근 주춧돌과 접한 부분은 하얗게 탈색되어 있는데, 이것은 나무가 썩지 않도록 하기위해 돌 밑에 소금을 넣었기 때문이다. 길가에서 느껴지는 장중함과 사랑채 뒤쪽으로 접근하면서 경사지를 적극 이용한 동선을 만나게 된다.

 

대문채가 가장 오래되었다는 이집은 조선후기의 주택으로 방엇간채는 철거되었으나 정침(正寢)을 비롯하여 사랑채, 새 사랑채, 별묘재사인 보본재, 전국에서 유일하다는 체천위별묘에 이르기까지 사대부 주택의 구성요소를 두루 갖추고 있어서 당시의 건축양식과 주생활의 모습을 살필 수 있는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오계리에는 만취당과 금산당 이외에도 을사사화 때 부당한 정사를 충간하여 반대파의 무고로 장살(杖殺)당한 경재 곽순을 추모하기 위해 후손들이 지은 사당인 경재사당(警齋祠堂)과 고려 우왕 때 문과에 급제하여 회천군수로 봉직했고 조선조에 강계도 좌익병마사로 제수되었으나 두 왕조를 섬기지 않는다는 절의로 영천으로 은둔한 조신충의 묘소를 수호하기 위해 후손들이 지은 재사인 사효재(思孝齋), 그리고 창녕 조씨들이 후손들의 학업을 위해 세운 서당인 함양재 등이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