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육신 이맹전 충절기린 용계서원ㆍ부조묘ㆍ제단
영천댐 물과 산수 조화, 3백년된 은행나무 눈길
영천의 진산인 보현산은 불교의 깨달음을 실천하기 위해 옛날부터 많은 사람들이 수행처로 삼았던 곳이다.
법화→보현→자천→정각으로 이어지는 서쪽 길이나 공덕→정각으로 이어지는 남쪽 길 모두 마찬가지이지만 임고 선원마을에서 용화→원각→정각에 이르는 동쪽 코스 역시 극락세계를 갈망하는 수행자들의 발걸음이 꾸준히 이어져 왔다.
자양댐을 거쳐 경은 이맹전의 충절이 배어있는 용산마을을 찾았다. 기룡산에서 뻗은 일지맥이 동남쪽으로 향하다가 갑자기 낮아져서 연봉을 이루고 이 산에서 발한 계곡이 원각 중앙을 흐르고 있어 계곡좌우에는 구릉지와 기암이 절경을 이루고 있다. 마을 앞에는 영천댐 물이 넘실거리고 동서로는 높은 산이 솟아 산수가 조화를 이루고 있는 마을이다.
용산리는 댐 수몰전 면소재지였던 마을로 원각, 월연, 인구가 있었으나 1974년 이후 원각을 제외하고는 모두 수몰되고 말았다. 남은 원각은 가장 산중에 있는 마을로 이지백이라는 선비가 개척했으며 개척할 당시 3개 자연부락 중 가장 윗마을이라 하여 원각이라 하였다고 한다. 마을 어귀에서 만난 한 아주머니는 비 오는 날 방문한 객을 반갑게 맞아주며 친절하게 안내를 해주었다.
입구의 원각쉼터에는 300년 된 은행나무가 보호수로 자리잡고 있는데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정월달에 이곳에서 당굿을 하였다고 전한다. 한밤중에 장작불을 피워놓고 살아있는 닭을 묶어 이 불무더기 앞에 둔다. 사람들이 호랑이 가죽을 그려서 덮어쓰고 농악을 울리면서 불더미 부근을 왕래하다가 그 불더미를 뛰어넘어 닭을 안고 가버린다.
이 당굿은 옛날에 호랑이가 자주 나타나서 마을사람을 해치므로 이와 같은 의식이 생겼다고 전하며 닭을 안고 가는 것은 호랑이에게 제물을 먹이는 것을 의미한다. 마을 서쪽 산아래에 자리잡은 용계서원(유형문화재 제55호)은 조선중기의 문신이며 생육신의 한 사람인 경은 이맹전의 학덕과 충의를 추모하기 위하여 정조 6년(1782) 왕명으로 토곡동에 건립된 것이다. 고종 5년(1868)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따라 노항리로 옮겨 서당으로 사용되다가 1976년 영천댐 건설공사로 인해 현 위치로 옮겨졌다.
생육신 이경은선생부조묘(유형문화재 제53호)는 정조 10년(1786)에 어명으로 건립된 것이라 하는데 화강암 기단 위에 세운 정면 3칸, 측면 2칸 맞배지붕 건물이며 제단(유형문화재 제54호)은 숙종 39년(1713) 어명에 의하여 후손 이유룡, 이승룡 등이 건립한 것으로 화강암 석대 위에 정면 5칸, 측면 1칸 홑처마 맞배지붕의 건물이다.
“나라가 망한 것을 멀쩡히 눈을 뜬 채 본 사람인데 눈을 떠서 뭘 하겠는가…”병조판서 심지의 9자녀 중 장자로 금오산(金烏山) 밑 경북 선산군 구미읍 형곡리에서 태어나 선산에서 자란 경은 이맹전(1393∼1481)은 어린 조카 단종을 왕위에서 몰아내고 세조가 대신 왕위를 차지하자 ‘충신은 불사이군’이라 하여 27년 간이나 거짓 봉사, 거짓 귀머거리 행세를 하며 충절을 굳게 지켰다.
성삼문 등 죽음으로 단종의 복위를 도모한 사육신에 비하여 세상을 등지고 살던 선비 김시습, 남효온, 원호, 성담수, 조려 등과 더불어 생육신으로 불리고 있다.
세종 9년(1427) 친시문과에 급제하여 한림, 정언을 거쳐 외임을 자청, 거창현감이 되어 청렴결백하게 선정을 베풀고 있을 때, 수양이 단종을 쫓아내고 왕위를 빼앗았다는 소식을 들은 후 즉시 현감직을 내어놓고 선산 강정리로 돌아왔다. 그때부터 전원에 묻혀 문을 닫고 손님을 사절하여 문밖출입을 하지 않았다. 혹 누가 찾아오기라도 하면 자기 눈이 멀었다고 하며 사람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조정에서 여러 차례에 걸쳐 불렀으나 응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대궐을 향하여 앉지도 않았다. 세상에 뜻이 없으니 생계의 걱정을 할 리도 없었다. 방바닥에는 까는 자리조차 없고 밥 먹을 때는 수저조차 없었으나 조금도 그런 것에는 개의치 않았다.
때때로 아홉 명의 자녀들을 모아놓고 “너희들이 아비를 잘못 만나 세상에 나가지 못하게 되었으니 내 면목이 없구나. 그러나 시대가 바뀌면 한번 세상에 출사하여라. 나는 이 세상에 나가지 않겠지만 후일이면 반드시 너희들에게 좋은 날이 올 것이다”라고 위로했고 자녀들도 “아버님을 너무 염려하시게 해드려 죄송합니다. 아버님 뜻하신 대로 행하시옵소서. 소자들도 좋은 시대가 오면 세상에 나갈 것입니다” 하고 순종했다고 한다.
이맹전은 한평생 왕에 대한 의리를 지킨 후 89세의 고령으로 세상을 떴고 정조 때 이조판서 홍문관 대제학을 추증받았으며 정간공의 시호를 받았다.
용계서원 맞은편 개울 건너에는 용산정사와 독락당, 원계재가 나란히 배치되어 있고 마을 입구에서 동쪽으로 100여 미터 떨어진 곳에 용강정과 인구초당이 있다.
용산정사는 구한말의 선비로 청렴 강직하여 일제의 무수한 고문과 박해에도 굴하지 않고 자주민의 긍지를 지킨 영남학맥의 마지막 거유였던 이태일(1860∼1944)이 학문을 연마하며 후학을 양성하던 학당이고 독락당은 조선 선조시대의 학자인 이지백을 추모하여 지은 정자이다.
또 원계재는 벽진이씨 영천종중에서 종사를 논의하기 위해 고종 말엽에 지은 재사이며 용강정은 조선 숙종 때 문과에 급제한 정석임과 아들 중직 양대를 추모하여 지은 정자, 인구초당은 조선 고종시대의 인물로 덕행 면학하였던 정진성의 사저이다.
용산마을에는 비가 오는 날씨 탓인지 외부에서 찾아드는 사람들의 발길은 보이지 않았으나 10여 년 전에 방문했을 때보다 오히려 단아해 보였고 인심 좋은 시골의 정겨움을 느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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