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제비 역사연구 중요한 자료, 청지의 안타까운 전설 전해져
도남동은 청제평야의 북단지역에 위치한 부락이다. 동쪽으로는 좁은 들판을 사이에 두고 봉동과 접하고 있고 서쪽으로는 금호강이 흐르고 있다.
또 남쪽으로는 광활한 평야가 멀리 채약산 지맥과 연결되어 있고 북쪽으로는 북안천이 깎아 세운 듯한 암벽 밑으로 흐르고 있는데 바로 그 암벽위에 마을이 형성되어 있다. 마을은 윗각단, 아래각단, 불당골, 사이각단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청제비의 유적으로 보아 서기 500년대부터 사람이 살았을 것으로 추측되며 문헌에도 도동화현이 있었다는 기록이 나타난다. 영천I.C 조금 못 미쳐 도남농공단지 쪽으로 우회전해서 팻말을 따라 끝까지 들어간 후 100여미터 정도 걸으면 보물 제 517호로 지정된 청제비를 만날 수 있다.
영천 청제비는 신라시대 '청못'이라는 저수지 축조와 관련이 있는 양면비로 화강암의 자연판석으로 장방형의 형태를 취하고 있으며 크기는 높이가 114㎝이고 폭이 94㎝이며 두께는 16㎝이다.
조선 효종 4년(1653)에 두 동강으로 파손되어 아래 계곡에 매몰되면서 세인들의 관심 밖으로 벗어나 있었는데 그 고적이 전하지 않음을 안타깝게 여긴 방수열, 최일봉, 임언량 등 3인이 수창하고 박생이 감고하여 숙종14년(1688)에 다시 세우게 되었는데, 이를 기념하고 그 뜻을 전하기 위해 같은 해 9월에 건립된 청제중립비가 오른쪽에 세워져 있다.
1968년 12월 신라삼산학술조사단에 의해 발견되어 학계에 알려지게 되었다. 비면에는 행간이나 윤곽선이 없고 가공된 양면에 각자되어 있지만 각기 다른 연대와 내용이 실려 있다.
한 면에는 병진년 즉 신라 법흥왕 23년(536)이라는 간지가 적혀 있어 청제가 처음 축조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새긴 축제기라 할 수 있고, 다른 면에는 정원 14년(원성왕 14, 798)이라는 절대 연대가 적혀있어 청못의 일부 무너진 저수지 둑을 다시 수리한 사실을 기록한 수치기라 할 수 있다.
이 병진축제기는 현재 마모와 훼손이 심하여 거의 반가량의 비문을 판독할 수 없는 상태로 전문은 10행에 각행 9자 내지 12자로 새겨진 총 150자이다.
이에 비하여 보존상태가 매우 좋아 해독이 가능한 정원 14년 수치기에는 수리기간, 동원된 인원수, 청못의 규모 및 년, 사수, 옥순 등의 인물과 소내사라는 관직명 등이 기록되어 있다. 이 외에도 글씨체의 특이성, 특이한 문체 등으로 역사학적, 금석학적, 정치사적, 사회사적, 언어학적, 영천과 경산의 고호(古號)에 대한 중요한 자료가 된다.
청제중립비에는 청제비가 여기에 세워진 사연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영천의 남쪽에 청제(보통 청못이라고 함)가 있는데 이 못의 북쪽에 비가 있다. 그 글에 ‘당나라 정원 14년(798)에 임금이 양내사를 보내서 인부 일만 사천 팔백 명을 시켜 못을 막고 비를 세워 전말을 기록했다’고 말하고 있다.
대개 이 못의 관개는 삼백여석이라 지금도 이익을 보고 있는데 지난 순치 계사년(1653)에 비석이 어떤 사람의 절단한 바가 되어 흙에 묻혀 그 고적이 부전함을 애석해 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이제 여기에 고쳐 세워 이같이 기록한다.
아 후인이 이 비로 말미암아 이 못을 폐해서 안되는 까닭을 생각하게 된다면 이 비가 이 못에 있어서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강희 27년(1688) 무진 9월”삼한의 삼대 수리시설인 김제의 벽골제와 밀양의 수산제, 제천의 의림지, 거기다가 상주의 공검지를 유명한 것으로 여기지만 지금까지 못이 현존하여 관개에 이용되는 것은 없다. 또 삼국 및 통일신라시대에 걸쳐 양면비는 청제비가 처음이고 농업수리비로서 1200년 동안 제자리에 서 있는 것도 이 비가 처음이다.
청제비 조금 위쪽에 있는 청못에는 '용왕이 된 청지'라는 전설이 전하고 있다. 한낮의 햇살에 못 속의 물이 반사되고 건너편에는 자동차들이 바쁘게 다니는 이 못은 원래 동네였다고 한다.이 마을에 5대독자면서도 아들을 얻지 못해 고심하던 가정에 뜻밖에 후손을 얻게 되었다. 바로 이 아이가 천상의 특별한 점지로 태어난 청지라는 아이었다.
청지는 태어나면서부터 기골이 장대하고 범상하여 10살 때에 범을 타고 다니기도 했고 장정 20명과 줄다리기를 해도 매번 이기는 장사라서 감히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그무렵 천상의 선녀가 내려와 청지에게 멀리 마을을 내려다보고 있는 채약산의 쉰길바위를 깨뜨려 버리라고 했다. 만약 시키는 대로 하지 않으면 쉰길바위의 사악한 신기에 의하여 뜻도 펴지 못하고 죽을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청지는 바위에 무슨 신기가 있느냐고 하며 오히려 요망한 계집이라고 꾸짖으며 일축했다.
그 후 청지가 15살 되던 해 드디어 쉰길바위가 뿜어낸 신기를 따라 멀리 당나라 백정들이 내려와 동네를 허물고 못을 막게 되었다. 이유인즉 당나라 궁성에서 바라본 남쪽의 서기는 분명 천자가 태어난 징조이므로 미리 근원을 제거하자는 뜻이었다. 못 둑이 완성되던 날 갑자기 폭우가 쏟아져 눈 깜짝할 사이에 만수가 되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날부터 청지는 시름시름 앓게 되었다. 동네사람들은 병세가 악화됨을 안타까워하며 수호신에게 제사를 올리기로 했다. 제사가 막 끝나갈 무렵, 선녀가 나타나 너는 천제의 뜻을 저버렸다며 청지를 나무랐다.
그러나 15년 동안 정성을 쏟은 것이 아까워 이 못의 용왕이 되라고 하며 홀연히 떠났고 청지도 온데간데없이 보이지 않았다. 그리하여 이 못은 청못이라 부르게 되었고 아울러 청지가 15살에 용왕이 되었다고 해서 못의 둘레가 15리라고 전한다.
어리연 꽃이 아름다운 호계천 기슭에는 민속자료 제 20호로 지정된 완귀정이 자리잡고 있다. 조선 중종때 시강원 사서 설서로 왕세자 즉 인종의 스승이었던 완귀 안증이 인종이 즉위한 지 8개월 만에 승하하자 자신의 이상실현을 하지 못함을 안타까워하며 은거하여 학문을 연구하고 후학을 양성한 곳이다.
말에게 채찍을 가하여 빨리 간들 무엇하랴 / 이 강 주인 없음이 마땅하지 못한데 / 완구가 어디 있어 이 일을 보겠는가 / 술 마시며 바야흐로 뜻이 펼 때를 기다릴 때 / 동쪽 들판이 뻗어 하안으로 이어지고 / 북쪽산은 달아나듯 세월 따라 달리는데 / 구름 속을 기어가듯 뜻을 얻지 못하였어라
남명 조식의 현판 시구이다. 완귀정은 사랑채의 당호이고 정면 5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서쪽의 부속건물 식호와는 정면 5칸, 측면 3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남 북단 1칸씩 루처럼 꾸며져 있다. 흙담으로 둘러싸인 협문을 통하여 정침에 드나들게 되었고 정침 역시 방형의 흙담으로 싸여있다.
반듯한 정원을 지나 정면좌우에 보이는 어간과 문비가 조화를 이룬 아름다움에 취해 문을 열고 들어서면 매우 넓직한 느낌을 주는 대청이 나타나고 대청에 올라서면 맑은 호계천이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완귀정의 당호는 당대 명필인 미수 허목의 글씨이고 대청에는 교분이 두터웠던 남명 조식의 시를 비롯한 많은 명현달사의 시가 남아 있어 이곳이 바로 학문을 이루는 곳이며 나아가서는 많은 선비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은 유서깊은 곳임을 알 수 있다.
또한 정침을 솟을대문으로 하지 않은 것에서도 벼슬을 했으나 선비의 소박함을 간직한 안증의 뜻을 엿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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