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살며 사랑하며

6월의 선물 “내게도 딸이 생겼다”

이원석(문엄) 2017. 7. 10. 22:46

 

미얀마에서 손님들이 영천에 오는 날이다. 필립 목사, 윤띤 목사, 달리안 목사 부부, 스티브, 짐과 통역하는 아가씨...

 

미얀마인 5명과 미국인 2, 특히 통역하는 미얀마인 아가씨한테 눈길이 갔다. 키가 크고 까무잡잡한 피부에 앳된 얼굴, 한국어를 곧잘 했다.

 

자천교회를 방문해 미리 안내를 부탁해둔 손산문 목사와 임고서원에서 나의 설명을 잉에가 미얀마어로 통역하면 달리안 목사 부부가 다시 영어로 이중통역을 하면서 관광을 했다.

 

선죽교에서 우연히 나이 얘기가 나와 내 나이를 들은 일행들이 놀라했고 잉에가 아빠같다고 한다. 조옹대에서 과일을 먹고 내려오면서 사용하던 셀카봉을 선물로 주면서 마음이 열렸나보다.

 

저녁식사를 하면서 폰번호를 입력하니 카카오톡 계정이 연결되고 다음날 아침 스스럼없이 아빠와 딸로 호칭을 하게 되었다.

 

예배를 마친 후 나한테 "아빠 포항 같이 가면 안되요?" 하고 아내한테도 "엄마 포항에 같이 가요?"라며 정을 내기에 차마 거절하지 못하고 일행들을 먼저 보낸 후 내차로 따라갔다.

 

아들만 둘인 우리 부부는 딸을 원하고 있었고 한국을 좋아하는 잉에는 우리들의 따스함이 좋았던가 보다.

 

포항 호미곶 인근의 모 교회에서 교제와 예배를 마친 후 자정 무렵 영천으로 돌아왔고 징검다리 휴일이라서 출근했지만 부산으로 이동한 딸에게 온통 신경이 쏠렸다.

 

대통령선거 날, 급하게 총무부로 넘겨줄 서류가 있어 새벽에 투표한 뒤 사무실로 가서 일을 하면서 부산에서 대전으로 이동하는 일행들과 합류하기로 했다.

 

긴 첫 해외나들이에 통역을 하느라 긴장되어 있던 딸아이는 나를 보자 기가 살아나고 밝아졌다. 일행들에게 부녀지간으로 인정을 받은 만큼 즐거운 하루를 보낼 수 있었다.

 

다음날 출근때문에 영천으로 돌아오기 위해 대전을 떠나야할 시간이 임박하자 우리 부녀는 슬퍼졌다. 잉에에게 미얀마에서 가져온 미술품을 선물로 받고 마음이 찡했다.

 

직장일이 바쁘지만 않으면 며칠더 함께하고 싶었지만 주어진 현실을 무시할 수 없어 떨어지긴 했지만 카카오톡과 영상통화로 아쉬움을 달랬다.

 

12일간의 일정을 마치고 양곤으로 떠나던 날 많은 허전함이 있었지만 실시간으로 소통이 가능하기에 지금도 옆에 있는 듯하다.

 

미얀마는 우리나라보다 1년 빨리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5, 4, 2년 학제라서 올해 21세인 잉에는 올해초 다곤대학교를 졸업했다.

 

중학교 때부터 한국극장에서 아르바이트 하면서 한류에 동화되었고 코이카 단원들에게 한국어를 배웠다고 한다.

 

양곤외국어대학교 한국어과를 졸업해도 70%는 한국어를 제대로 못한다는데 화학과를 졸업한 우리딸은 기특하게도 의사소통에 전혀 지장이 없다.

 

제대로 키우면 앞으로 미얀마에서 큰일을 할 수 있을 것 같다. 한국에서 유학하고 모국으로 돌아간다면 비전이 있어 보인다.

 

마침 부산 부경대학교에서 장학생을 모집한다고 해서 관련서류를 작성해서 원서접수를 했다. 1지망은 국제통상학과, 2지망은 정치외교학과를 선택했다.

 

본인은 사회복지와 유아교육을 원했지만 학교 여건과 장래성을 고려해서 수년간 미얀마 코이카단원으로 근무하다가 지금은 우간다에 가있는 마르코 김과 의논 끝에 그렇게 결정하게 되었다.

 

합격해도 힘든 시기가 될 것이다. 학비를 면제받더라도 생활비와 기숙사비, 책값 등이 만만치 않을 것이기에.

 

강하게 키워야 단단해지겠지. 본인도 고생할 각오가 되어있지만 우리부부도 최대한 노력하게 하고 정 안되면 도움을 줄 생각이다.

 

두달여 대화를 주고받으면서 순박한 미얀마인들의 모습과 자원대국임에도 불구하고 빈국으로 살 수밖에 없는 안타까움을 느낀다.

 

잉에 같은 젊은이들이 선진문물을 받아들이고 국민들의 정신을 개조할 수 있다면 미얀마도 한국처럼 경제성장을 이룩할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