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천 문화유산 자료/영천 문화유산자료 모음

骨火城에 대하여 -骨火小國과 關聯하여-

이원석(문엄) 2012. 5. 4. 22:23

骨火城에 대하여

-骨火小國과 關聯하여-

李 在 洙

Ⅰ. 머 리 말 Ⅳ. 骨火城과 骨火小國

Ⅱ. 骨火城의 位置比定 Ⅴ. 맺 음 말

Ⅲ. 骨火城의 現狀과 周邊

Ⅰ. 머 리 말

三韓小國에 대한 올바른 이해는 古代國家의 形成 문제를 해결하는 데 중요한 관건이 된다. 따라서 각 小國과 관련되는 문헌자료나 유적에 대한 개별연구는 긴요한 작업이며, 본고에서 다루고자하는 骨火城에 대한 검토도 骨火小國과 관련해 볼 때 그 중요성이 인정될 수 있다고 본다.

骨火小國이 있었던 곳으로 알려져 있는 경북 영천은 지리적으로 경주에 인접하여 고대 신라의 성장과 그 王京의 방어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였다. 그런데 신라 지역에는 이미 BC 37년에 築城의 기록이 나오고 있으며, 《三國志》東夷傳 韓傳에 小國들의 國名이 열거되는 가운데「…馬韓…無城郭…辰韓…有城柵…弁辰…亦有城郭…」이라고 기록되어 있어서, 비록 이 韓傳에 骨火國이라는 국명은 보이지 않지만 骨火小國에도 城柵이 있었다고 생각된다.

필자는 수년 전부터 영천 지역의 골화소국에 관심을 가지고, 이와 관련한 城柵의 존재를 확인하기 위하여 이 지역의 여러 山城과 古墳遺蹟 등을 답사한 바 있는데, 특히 骨火城과 金剛山城의 실체와 그 위치를 조사하면서 이를 골화소국과 관계하여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였다.

여기서는 먼저 골화성과 관련되는 문헌자료를 현지 답사결과와 함께 고찰하면서 골화성의 구체적 위치를 比定하여 보겠다. 다음으로 골화성으로 비정되는 城의 現狀과 주변환경을 살펴보면서 이 城이 갖는 의의를 생각해 보겠다. 그 다음 골화성과 관련하여 골화소국의 主治所를 비정하고, 골화소국과 관련한 몇 가지의 문제를 검토하고자 한다.

자료가 부족하고 발굴을 통한 연구가 아닌 지표조사에 의존한 고찰이라는 점에서 한계는 어쩔 수 없었다. 많은 질정을 바란다.

Ⅱ. 骨火城의 位置比定

骨火城에 대한 기록이 문헌에 처음 보이는 것은 《三國史記》新羅本紀 智證麻立干 5年條의

(1) 「…秋九月 微役夫 築波里․彌實․珍德․骨火等十二城」

이다. 여기서 골화성은 지증왕 5년(504년) 9월에 役夫를 징발하여 축성한 12개 성 가운데 波里․彌實․珍德과 함께 대표적인 城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增補文獻備考》(이후로 《備考》약칭하기로 함) 輿地考13 城郭條에 「補 智證王五年九月 築骨火等十二城」이라 나오며, 《大東地志》永川 典故條에 「新羅智證王五年 築骨火城」으로, 《永陽誌》 城郭條와 《永川全誌》古墳條에는 「骨火城(新羅智證王時築骨火等十二城)」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 골화성의 대체적인 위치는 오늘날 영천으로 비정된다. 《三國史記》雜誌 祭祀條

(2) 「大祀三山 一 奈歷(習比部) 二 骨火(切也火郡) 三 穴禮(大成郡)…」

에 의하면 骨火가 切也火郡에 있는 것으로 되어 있고, 《備考》 禮考8 祭志條에는「…骨火( 切也火郡今永川)…」이라고하여 切也火郡이 永川임을 備考해 놓았다. 또 《三國史記》雜誌 地理1 良州條에서도

(3) 「…臨皐郡 本切也火郡 景德王改名 今永州 領縣五 長鎭縣 今竹長伊部曲 臨川縣 助賁 王時 伐得骨火小國 置縣 景德王改名 今合屬永州 道同縣 本刀冬火縣 景德王改名 今合 屬永州 新寧縣 本史丁火縣 景德王改名 今因之 黽白縣 本買熱次縣 景德王改名 今合屬 新寧縣」

라하여 切也火郡이 지금 永州라고 하였다. 骨火가 切也火郡에 있고, 切也火郡은 永州 곧 永川이므로 골화는 영천지역임이 분명하다. 따라서 골화성은 골화 즉 영천지역에 축성된 것으로 간주된다. 그러나 이것으로 그 구체적인 장소가 어느 곳인지는 알 수가 없다.

골화성의 구체적 위치를 찾기 위해서는 다음의 몇 가지 점을 고려해 볼 수 있다. 첫째로, 골화성은 영천지역에 있었다는 골화소국과 관련하여서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지증왕 때에 축성한 골화성은 골화소국이 있던 지역에 쌓았을 것이며, 이 때의 축성은 골화소국의 기존 城柵을 이용했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둘째로, 골화성이 있는 영천지역은 경주에 인접한 곳이므로 신라王京인 경주지역의 방어와 관련될 수 있다. 따라서 경주로 통하는 길목이고, 지형상 경주방어에 합당한 곳에 축성했을 것이라는 점이다. 셋째로, 현재 알려지고 있는 영천지방의 城을 모두 조사하여서 앞의 두 가지 점과 부합되는 지역을 비정할 수 있을 것이다.

먼저 骨火小國과 관련하여 생각해 보자. 골화소국의 위치가 영천지역이라는 데는 이의가 없으며, 다음 사료

(4)①「臨川廢縣(本骨火小國新羅助賁王時伐取之置縣景德王改臨川爲臨皐郡…在郡東南五 里金庚信…宿于骨火館此其地見三國遺史)」(《新增東國輿地勝覽》永川郡 古跡條

②「臨川縣(古骨火國助賁王爲縣智證王築城)」(《備考》輿地考5 郡縣役革3)

③「骨伐國…輿地勝覽曰骨伐今永川所屬臨川廢之地在今州治」(《備考》輿地考2 曆代國 界條)

에 보듯이 臨川(廢)縣에 골화소국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臨川縣은 骨火縣으로도 기록되고 있다. 《慶尙道地理志》安東道 永川郡條의 다음 사료

(5) ①「一在三國時 稱臨皐郡 本切也火郡 在高麗太祖統合之時 以郡人金剛城將軍皇甫能長 輔佐之功 合骨火縣 苦也火郡 道同縣 史丁火縣爲永州 臨皐合骨火縣今郡邑也 苦也火今 郡村珍村里也」

②「太宗時永樂癸巳改永川郡 別號益陽或云永陽或云二水…新羅時領縣五 長鎭縣臨川縣 本(骨大小國) 道同縣 本(刀冬火縣) 新寧縣 本(史丁火縣) 黽白縣 本(買熱次縣) 在高麗 長鎭移屬慶州 今竹長部曲也 臨川今郡村骨山里也…」

③「一當新羅之季 骨火縣金剛城將軍皇甫能長 見高麗太祖勃興…乃合能長所起之地骨火 等四縣爲永川 此土姓皇甫所由始也… 」

에서 ―친 부분을 유의해 보자. 임고군은 원래 切也火郡인데, 위 사료(5)①과 (5)③에는 고려초에 골화․고야화․도동․사정화현의 네 개 현을 합해서 영천으로 하였다고 되어있고, (5)②와 앞의 사료(3)을 보면 신라때 임고군은 領縣이 長鎭․臨川․道同․新寧․黽白縣 등 다섯이었는데 이중 장진현은 고려 때에 경주에 이속되었다고 한다. 앞의 네 개 현과 뒤의 다섯 현 중 장진현을 제외한 네현을 대비해보면 골화현이 임천현임을 쉽게 알 수 있다. 따라서 골화성은 골화소국의 위치와 관련하여 볼 때 임천현 다시말해 골화현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골화현(임천현)에 금강성이라는 또 하나의 지명이 신라 말에 보인다. 즉 사료(5)의 음영( ) 부분을 유의하면, (5)①에서 삼국 시대 임고군은 고려 태조시 金剛城將軍皇甫能長의 공으로 골화 등을 합하여 永州가 되었다고 한다. 또 (5)③에서도 신라 말에 골화현의 金剛城將軍 皇甫能長이 일어난 지역인 골화 등 네 개 현을 합하여 영천이 되었다고 한다.

여기서 金剛城將軍이라한 것으로 미루어 능장은 금강성을 중심으로 세력을 일으켰으리라 생각되며, 그곳이 골화현이므로 골화현지역에 금강성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永陽誌》 城郭條에

(6)「金剛城(在郡東五里金剛山新羅末嶺南諸州爲甄萱所陷金剛城將軍皇甫能長復骨火道同等 縣築城據之一境賴安民多歸之及麗太祖立國歸附今城址遺存)」

라 하여 신라 말 영남의 諸州가 견훤에게 함락될 때 황보능장이 골화․도동현 등에 성을 쌓고, 이 성에 의거하여 백성을 안심시키고 사람들도 다시 돌아오게 하였는데, 태조가 나라를 세우자 歸附하였고 현재 성지가 남아있다고 한다.

이들 사료를 통하여 皇甫能長은 나말에 골화․도동을 중심으로 일어난 호족으로 이 금강성을 중심으로 세력을 유지하였음을 알 수 있다. 또 일어난 곳이 골화현이니 과거 골화소국의 古土를 바탕으로 독립적인 세력을 유지하였을 것임에 틀림없다.

이러한 能長의 金剛城은 이전의 골화성을 보완하여 축성하였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것은 두 성이 모두 같은 골화현 지역에 있었다는 점, 또 6세기초의 골화성이 골화소국지역은 물론 신라의 경주지역 방어를 위하여 축성하였을 것이고 금강성도 신라가 방어능력을 상실한 시기에 견훤의 부대와 대립하여 있었다는 점을 고려해 보면 골화성과 금강성의 위치는 거의 일치할 것이라는 것이다.

이점은 다음 사실에서 더욱 분명해진다. 《三國史記》新羅本紀 景哀王條의

(7)「…二年冬十月 高鬱府將軍能文 投於太祖 勞諭還之 以其城迫近新羅王都故也…四年…秋 九月 甄萱侵我軍於高鬱府 王請救於太祖命將出勁兵一萬往救 甄萱以救兵未至 以冬十一月 掩入王京…」

을 보면 앞서의 皇甫能長과 같은 시기 같은 장소인, 경애왕2년 10월 고울부 즉 영천에 能文이라는 장군이 나오고 있다. 이 能文은 能丈의 誤記일 가능성이 높고, 이 丈과 長은 音이 같다. 그들의 활동시기․지역․내용을 함께 고려해 보면 能文과 能長은 동일인일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면 이 사료에서 능문 곧 황보능장의 금강성이 신라왕도에 가까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9월에 견훤이 이곳에 침입했을 때 왕은 태조에게 구원병을 청했고, 구원병이 이르기 전인 11월에 王京에 들어갔다는 사실로 보아, 이 성은 상당한 기간(약 2개월) 견훤의 침입을 막을 수 있었던 것으로 여겨지는 것이다. 이러한 堅剛한 성의 입지를 갖춘 곳은 과거 지증왕때 축성한 골화성이 있던 곳일 것이고, 금강성은 이 기존에 있던 성을 보완했을 것은 당연한 것으로 생각된다.

(지도1)

따라서 골화성의 위치는 골화소국 지역에 축성한 금강성의 위치를 찾으면 될 것이다. 동시에 두 번째로 고려할 것은 경주지역을 방어하기에 적당한 지형상의 위치이다. 즉 경주로 가는 통로의 길목이 되며 상당한 군민이 웅거할 수 있는 곳이면서도 전략상 유리한 지역을 찾아야 할 것이다. 영천 지역의 지형적 위치에서 보면 골화성은 전략상 영천의 江(南川)북쪽에 보다 남쪽에, 下流쪽 보다는 上流쪽에 있는 것이 외적방어에 유리한 입지일 것이다.

그러면 金剛城의 위치를 찾아보자. 김정호의 <大東輿地圖>(<지도1>)에는 금강성이 臨川 南亭院 東쪽에 표시되어 있다. 그리고 《勝覽》卷22 永川郡 山川條에는 「金剛城山(在郡東八里)」라 되어있고, 《永陽誌》에는 사료(6)에 보듯이 郡東五里 金剛山에 있다고 한다 여기서 금강성이 금강산에 있다고 하니 금강산의 정확한 위치를 알 필요가 있는데, 그 위치를 알려주는 사료는 다음과 같다.

(8) ①「在郡東八里 自舞鶴山下 有藥泉」(《永陽誌》)

②「在郡東八里 來自慶州舞鶴山」(《慶尙道邑誌》)

③「在郡東十里 來自慶州舞鶴山」(《嶺南邑誌》)

④「淸鏡山(在郡東三十里來自雲往山一名舞鶴山)…鵲山(在郡南八里來自金剛山俗傳 )…」( 《永陽誌》)

위의 사료에서 금강산은 대체로 郡東八里에 있다고 되어 있다. 郡東八里의 거리는 같은 《永陽誌》山川條에 일명 무학산인 청경산이 郡東三十里에 있다는 것과 금강산에서 비롯된 작산이 郡南八里에 있다.(사료(8)④)고 한 점, 《慶尙道邑誌》․《嶺南邑誌》에는 청경산이 郡東三十里, 작산은 郡南六里로 되어있는 점 등, 이들 관련 산과 읍과의 거리를 고려하여 현재의 지도에서 찾아보면, 대체로 현재 영천시 완산동과 범어동 그리고 고경면 대의동에 걸쳐있는 산(해발186m가 가장 높은 지점)으로 비정할 수 있다.(<사진1~①>) 지금 완산동에서 이 산으로 가는 골짜기를 금강골이라고 하며, 금강골에는 금강사라는 암자가 있는데 이 암자에는 앞의 사료(8)①의 금강산條에 나오는 藥泉이 있어서 이 산이 금강산임을 더욱 분명히 해준다.

그리고 이 산 정상을 중심으로 土城址가 상당히 남아 있으며, 이 금강산은 骨火城을 찾는데 있어서 두 번째 고려하고자 한 지형적 이로움 즉, 골화소국의 방어 및 신라왕경을 방어하기에 유리한 조건을 모두 갖추고 있어서 골화성의 옛터가 분명하다고 생각된다.

다음으로 이상에서 살펴본 바를 고려하면서 영천 지방에 지금까지 알려지고 있는 성을 모두 조사하여 골화성을 찾아보기로 하자. 영천 지방의 성을 《永陽誌》를 비롯한 各 邑誌의 城郭記事 그리고《文化遺蹟總覽》을 중심으로 하여 조사한 《朝鮮城郭一覽》을 참고하여 적어보면 다음과 같다.

城 名

位 置

現狀(高 ×長 ×幅)

비 고

①骨火城

②金剛(山)城

③臨川古縣城

④永州城

⑤古邑城

⑥(永川)邑城

⑦大儀洞城

⑧金大洞城

⑨栢巖城

⑩佳上洞城

⑪官基洞城

⑫蓮亭洞城

⑬華南洞城

⑭雉山洞城

⑮治日洞城

⑯桂芝洞城

⑰新德洞城

在郡東五里 金剛山 東八里

在南亭院西 邑距東南五里

在南亭院西

在郡西二里

古鏡面 大儀洞

臨皐面 金大洞

臨皐面 水城洞

花山面 佳上洞

新寧 官基

新寧 蓮亭

新寧 華南

新寧 雉山

淸通 治日

淸通 桂芝

淸通 新德

有遺址卽道洞縣城

×1300 尺×

×1902 尺×

0.9~1.8×900×1.8

1×700×3

1×720(250)×2.5~3

0.9~1.8×670×3.6

1.7×1100×

2×(50)×

3×30×

1233 東京賊反亂

1382

金剛山

1592

八公山

烽燧

이상의 城에 대한 기록은 자료마다 다소 차이가 보이며 ①~⑥까지는 《永陽誌》등 주로 문헌에 보이는 것이며, ⑦이하는 《文化遺蹟總覽》의 성곽기사를 중심으로 정리된 것이다. 따라서 ⑦이하의 城과 ①~⑥의 城이 중복될 수 있으며, ①~⑥의 城도 시대를 달리하여 축성하였을 경우 같은 곳에 축조한 성이 다른 이름으로 표현된 경우도 있을 것이다.

이들 城 가운데 골화성과 관계가 있을만한 것들을 찾아보자. 앞에서 살펴본 대로 骨火小國과 관련하여 볼 때 臨川縣에 있을 것이라는 점과 지형적으로 경주를 방어할 수 있는 이점이 있는 곳을 고려하여 찾아보면 우선 ⑩이하의 성과는 관련짓기가 어렵다. 그리고 ⑧과 ⑨는 壬亂때 축성된 洞城으로 답사 결과 城址가 일부 남아 있는데, 축성 목적이 뚜렷하고 규모나 입지 조건으로 보아 骨火城과 관련짓기는 어렵다.

또, ⑤와 ⑥은 각각 현재의 영천읍에 있는 것으로 축성시기나 목적이 분명하다. ⑤의 古邑城은 郡西二里에 있는 것으로 고려 우왕8년(1382년)에 쌓았다고 하며, 현재 영천읍 西門通일대로 비정되고 있다. ⑥의 永川邑城은 선조24년(1591년)에 郡守 元士容이 新築한 것으로, 壬辰倭亂이래 영천 지역 방어에 중요한 역할을 한 조선시대 邑城이다. 古邑城의 동쪽인 현재 郡廳舍를 중심으로 東․西․南․北門通이라는 지명이 남아있고, 城址의 흔적을 극히 부분적이나마 남기고 있다. 이러한 ⑤와 ⑥의 城도 축성 시기나 내용을 볼 때 骨火城과는 관계가 멀다. 그러므로 골화성과 관련하여서는 ②․③․④ 및 ⑦의 성을 집중하여 조사할 필요가 있다.

②․③․④ 및 ⑦의 城 가운데 ②와 ⑦은 모두 금강산에 있다는 것이다. ②의 郡東五里 또는 東八里라는 지점은 문헌상의 里數를 비교하여 지도에서 찾아보고 수 차례 답사해본 결과, 그 위치가 대체로 ⑦의 大儀洞城과 같은 곳이다. 만약 ⑦의 大儀洞城이 ②의 金剛城과 다른 곳에 있었다면 금강성으로 비정되는 城 건너편에 위치할 만 했으나 城址 흔적을 찾지 못하였고, 대의동만이라면 기존 羅末이래의 금강성을 이용하였을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된다.

따라서 금강성은 대의동성과 일치하며,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금강성은 골화성을 보완하였을 것이므로 골화성․금강성․대의동성은 같은 곳에 축성된 성이나 시대를 달리하여 補築이 이루어지고 달리 불리어진 것으로 생각된다.

다음 ③의 臨川古縣城과 ④의 永州城에 대하여 살펴보자.

(9)①「臨川古縣城(在南亭院西距邑東南五里高麗高宗二十年李子晟據此城大破東京賊)」(《大 東地志》永川 城邑條)

②「永州城(在南亭院西高麗高宗時東京賊崔山李儒作亂王遣李子晟往擊之子晟倂日疾馳據 永州城賊以爲子城軍自遠急來欲乘其勞擊之屯南郊…)」(《勝覽》永川郡 古蹟條 및 各邑誌)

위의 사료를 보면 臨川古縣城과 永州城이 모두 南亭院西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고, 그 뒷부분의 記事가 같은 점을 주목하여 두 성이 동일한 것으로 파악할 수 있다.

그러나 (9)①의 臨川古縣城에 대한 기록 중 南亭院西 다음에 距邑東南五里라고한 점을 주목하여 보면, 두 성이 동일한 것이 아닐 가능성도 있다.

이 두 성의 위치와 관련하여 주목되는 것은 南亭院이다. 남정원은 濟川院․要看院․普通院 등과 더불어 각 要路에 두어 숙식과 편의를 제공하던 영천 지방의 대표적인 院의 하나다. 지금 영천 신시장에서 작산동으로 넘어가는 길목에 있었다고 하며, 《永陽誌》에는 郡南五里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남정원의 위치가 郡南五里에 있다는 것이 인정된다면 (9)①의 臨川古縣城에 기록된 南亭院西와 距邑東南五里는 서로 방위가 틀리게 된다. 즉 南亭院北東의 誤記이거나 東南五里가 잘못 기록된 것이 된다.

한편 永州城에 대한 《勝覽》을 비롯한 各邑誌의 기록은 모두 「距邑東南五里」라는 구절이 없다. 또 《大東地志》에는 永州城의 항목이 없고, 다만 臨川古縣城에 「在南亭院西」라고 기록되고 또 「距邑東南五里」가고도 기록되어 있어서, 《大東地志》를 기록할 때 착오로 잘못 수록했을 가능성도 있다고 본다. 그리고 사료 (9)①에 기록되었듯이 고려 고종 때 東京賊 崔山과 李儒가 亂을 일으키자 李子晟을 보내서 치게 하였는데, 자성은 영주성에 웅거하였고 敵은 南郊에 주둔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때 자성이 웅거한 영주성은 경주를 공략하는 위치에 있다는 점을 유의하여 보면 유봉산 일대나 전술한 古邑城과 관련지워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영주성과 臨川古縣城이 동일한 것인지의 여부는 단정하기 어렵다. 아무튼 두 성이 같은 것일 경우는 모두 南亭院이 있던 지역이 개고개 지점의 서편 구릉이나 강 건너 유봉산 일대로 비정될 수 있다. 또 다른 것일 경우에는 臨川古縣城이 郡東南五里지점에 南亭院과 근접하여 있거나, 臨川古縣城은 東南五里 지점에 있고 남정원은 南五里에 있게 된다. 이때 영주성은 개고개 서편구릉이나 유봉산 일대에 있게 되며, 전술한 古邑城과도 관련지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들 城이 모두 骨火城․金剛城과 동일한 것으로는 여겨지지 않는다.

다만 임천고현성은 臨川古縣에 있었던 城임은 분명하다. 《大東地志》古邑條에 「臨川(東南五里本骨火小國…)」라고 되어있고, 《大東地志》를 쓴 김정호의 《大東輿地圖》를 보면 臨川에 古城표시(◉)와 함께 南亭院이 표시되어 있어서(<지도1>) 臨川古縣城은 임천의 縣城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이것은 骨火小國의 主治所에 있었던 城柵(骨火小國의 在城)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Ⅲ. 骨火城의 現狀과 周邊

여기서는 <지도2>를 보면서 앞장에서 살펴본 骨火城의 뚜렷한 城地가 남아있는 A성( <지도2>)을 중심으로 現存狀態를 알아보고, 아울러 주위의 지형과 환경을 살펴보기로 한다.

<지도2>에서 骨火城의 主城이라 보이는 A성은 금강산 최고지점(186m)을 중심으로 양쪽 산 능선을 따라 土築(土石混築)한 전형적인 包谷式山城의 모습을 갖추고 있다. 이 包谷式 城의 전체 둘레는(g-a에서 성을 한바퀴 돌아서 다시 g까지) 약 1,650m 이다. 능선을 따라 폭1.5m 정도의 迴郭道(b에서 f까지)가 있으며 (<사진1-②>) 현재 남아있는 성벽(土石混築한 부분)의 높이는 최고 2m 정도이다.

성의 북문지로 보이는 g에서 북동쪽으로 a 그리고b에 이르는 곳은 절벽으로 되어 있어서 자연적인 성벽을 이루고 있고, 성벽 밑에는 작은 개울이 있어 外壕(海字)를 이루고 있다. g에서 a까지는 능선을 따라 盛土한 흔적이 있으며, a에서b까지는 부분적으로 土築(土石混築)한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리고 b지역은 東門址가 있었을 만한 곳인데 뚜렷한 흔적은 찾지 못하였고 다만 지금 대의동쪽으로 나있는 小路지점이 동문지일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된다. 이 b지역과 c지역은 土石混築의 흔적이 가장 잘 남아있는 곳이다. (<사진2-①>) 지금 세 군데 성벽의 일부가 파헤쳐져 있는데 아마 땅군이 뱀을 잡기 위해 헐은 것으로 생각되나 이 헐려진 곳을 통하여 성벽이 土石混築(또는 石心土築)으로 이루어졌음을 확인할 수가 있다. (<사진2-②>) 이 지역 b′의 곳은 古瓦片과 土器片이 채집되어건물지가 있었던 곳이 분명하며 東門址나 望樓가 있었으리라 추측된다. c′지역은 상당히 평평한 곳인데 황보능장이 군사를 훈련시킨 곳이라 口傳되어 있다. 이어 d지역은 이 산성의 가장 높은 곳으로 동․서․남․북쪽을 한눈에 볼 수 있어 망루와 같은 시설이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d지역에서 e지역은 역시 능선을 따라 土石混築한 흔적이 뚜렷하며, e지역 가까이 쯤에 남문지로 여겨지는 遺址가 있다. 그리고 d지점에서 능선을 따라 범어동 및 작산동으로 연결되어 있다. e지점에서는 A2지역으로 연결되고 있는데, 그 연결되는 지점에 토축한 흔적이 있고, 서문지로 여겨지는 遺址가 있다. 또 e지점은 d지점과 같이 높은 곳으로 북서 및 남서쪽을 잘 살필 수 있다. 古瓦片과 土器片이 채집되고 있어서 건물지로 보이며 망루가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그리고 e′지역에는 古墳이 몇 기 있는데 남아있는 봉분이 높지 않았다.

다음 e에서 f지역은 역시 土石으로 쌓은 흔적이 군데군데 있으며 f지점에서 비교적 많은 양의 古瓦片을 채집하였다.(<사진3-①>) 건물지로 망루가 있었을 만하여 경관이 좋은 곳으로 앞의 단포와 조교뜰이 한눈에 보인다. 이 f지역에서 g지역까지는 북편이 가파른 절벽으로 되어 천연적인 성벽을 이루고 있다.

g지역은 북문지로 추정되는데 包谷式山城의 가장 낮은 지역으로 水口 역할도 한 것으로 생각된다. g지역 前面일대는 현재 사과밭으로 되어있으며, g′지역에서 흘러가는 물길을 터놓았고, 과수원 담을 따라 길이 있다. g′지역에서는 부식되어 잘 알 수 없지만 鐵片으로 여겨지는 것과 파손된 토기류를 여러 점 채집한 바 있다.(<사진3-②>) 그리고 g′지역은 골짜기를 이루고 있고 이 골을 따라 물줄기가 있어서 따로 우물을 깊게 파지 않아도 샘을 이용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한편 f지역에서 연결된 A1지역은 양쪽이 가파르게되어 자연적인 성벽을 이루고 있는데 능선을 따라 土築한 흔적이 보인다, 이 A1은 A성의 보조성벽 역할을 하였다고 본다. 이것은 북문 지역이 낮아서 적이 침입했을 때 보조하며 서북쪽의 침입에도 대비하는 역할도 하였다고 본다. 그리고 A2지역은 따로 성벽을 쌓지 않아도 북편이 절벽이고 남천이 흐르고 있어서 북서쪽에서의 침입을 막는데 천연적인 성벽이 되고 있다. 이것은 역시 A성의 보조성 역할을 하면서 B지역까지 연결되어 있다.

A성의 축조방식은 우선 土石混築式으로 보이나 앞장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지증왕 때의 골화성은 골화소국의 성을 이용했을 가능성이 있고, 금강성은 이 골화성을 보완하여 사용했을 것으로 생각되므로, 골화성 및 금강성으로 쓰일 때 또 후대 洞城으로 사용하면서 改築했는지를 지표 조사로서는 알 수가 없다. 특히 土城(土石混築)은 그 흔적이 잘 남아있지 않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다. 그리고 건물배치와 동․서․남․북문지나 축조시기 등은 채집된 기와편으로는 단정할 수가 없다. 따라서 이것은 장차 발굴할 때까지 기다려야 확실해질 것이며 아울러 이 지역의 고분유적 발굴이 기대되는 것이다.

이 성을 중심으로 주위를 살펴보면 앞쪽(북쪽)은 모자산(보현산) 동쪽편에서 발원하여 내려오는 자호천(㉠)과 고경에서 흘러오는 고경천(㉡)이 합류되는 곳으로 비옥한 조교들(장천평야)과 단포들을 이루고 있다. 이 하천은 현재의 영천 시가지로 흘러 남천을 이루는데 B지역 서편의 넓은 들(주남들)에 농업용수로 사용되기도 한다. 요컨데 이 성은 영천지역의 비옥한 농경지와 그와 연결되는 하천(남천)과 관계되어 있다. 이 점은 후술하게될 골화소국의 입지로도 매우 훌륭한 조건이 된다고 하겠다.

그런데 A성과 관련하여 남천은 교통 및 군사작전상 중요한 시사를 주기도 한다. 영천은 신라 경주에서 각 지역으로 통하는 중요한 군사․행정도로의 하나인 鹽池通의 주요 지점으로 알려져 있으며 신라시대 이래 현재까지도 군사․교통의 중요 지역이다. 이 지역이 북방으로 가는 중요한 통로인 것은 유명한 김유신의 설화에서도 잘 알 수 있다. 즉《三國遺事》紀異第1 金庾信條의 다음 사료에

(10)「…郞喜 親率白石夜出行 方憩於峴上 有二女隨郞而行 至骨火川留宿 又有一女忽然而 至…而共入林中 更陳情實 乃與俱入 娘等便現神形曰 我等 奈林․穴禮․骨火等 三所護國之神 今敵國之人誘郞引之 郞不知而進途 我欲留郞而至此矣 言訖而隱 公聞之驚仆再拜而出 宿於骨 火館…」

라 하여 김유신이 백석을 데리고 밤에 출발하여 敵國(고구려)을 정탐하러 가는 길에, 骨火川에 이르러서 骨火神을 만나고 骨火館에 유숙하였다고 한다. 이 내용을 통하여 骨火 즉 영천은 護國三所中의 하나며, 고구려로 가는 중요한 통로임을 알 수 있다.

골화천의 위치는 유신이 밤에 출발하여 한참을 쉬고 이른 곳이지만 보통사람은 상당한 시간이 걸리는 거리일 것이라는 암시가 있다. 또 골화천에는 유숙할 수 있는 장소(骨火館)가 있다는 점을 보면, 이 설화 내용으로도 골화라는 곳이 거리상 경주와의 통로에서 현재 영천쯤일 것으로 생각되어진다. 그리고 여기의 골화천은 臨川지역이라고 생각되어 현재의 南川으로 여겨지고, 골화관의 위치는 骨火小國의 主治所지역에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아무튼 위 사료를 통하여 골화천 그리고 골화관이 있던 지역인 영천이 경주에서 북방으로 가는 그리고 경주로 들어가는 중요한 지점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데, 이때 남천을 건너야 함을 주목해야 한다. 지금의 남천은 물도 적고 다리가 있어서 문제가 없지만 그 당시의 남천은 물의 양도 상당하고 튼튼한 다리가 없어서 배를 이용하거나 강의 상류지점을 이용하여 건넜을 것임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이점을 생각하며 그 당시 영천과 경주의 통로를 생각해 보자.

<지도2>에서 현재 영천과 경주사이의 큰 도로인 ㉲의 길은 조선시대에도 없었으며, 조선후기에는 주로 ㉰의 길을 따라 영천시가지로 들어갔다고 한다. 이 경우 南川의 C지역인 지금 구터라고 하는 곳의 나루터나 아니면 지금 남문다리지점의 나루터를 배로 건넜을 것이다. 그러나 배를 이용하지 않을 경우 ㉮의 길과 ㉯의 길이 주로 이용되었을 것이다. 그때는 남천의 상류 지점인 물이 깊지 않은 A성 앞의 하천이나 口傳하는 탕건바위(지금 주남보 조금 아래지역)지역에 나무다리 정도가 있었을 것으로 생각되는 것이다. 더욱이 현재의 영천 시가지가 이 지역의 중심촌락으로 형성되기 전인 고려 시대 이전에는 ㉮와 ㉯의 통로가 오히려 중요한 길이 되었을 것이다.

요컨대 A성 상류지점이 고려 이전시대에는 경주로 가는 주요한 길목이었을 것이고 따라서 A성은 그 길목을 지키는 요충지일 것이라고 생각된다. 더구나 대규모의 군사가 이동할 때 남천 하류는 도하작전이 필요했을 것이고 상류는 필요치 않았을 것이므로 더욱 그렇다. 때문에 앞의 사료(7)에서 견훤이 영천지방에 침입하여 두 달 뒤인 冬十一月에 경주로 들어간 것이 結氷期를 이용한 것으로 생각되기도 한다. 그리고 영천지역의 결빙기는 불과 2~3개월정도 밖에 되지 않는 것을 고려하면 더욱 A성 지역이 군사․교통상 요충지라고 할 수 있다.

또 A성이 있는 지역은 동으로는 안강, 북으로는 동북쪽에 팔공산 은해사(청통)을 거쳐 동화사․파계사를 지나 대구로, 그리고 서북지방으로는 앞서 말한 염지통의 길인 신령․의흥으로 통하는 교통의 요충지이므로 이곳의 지역적 중요성은 충분히 인식될 수 있다. 그리고 높은 산은 아니지만 A성의 최고봉인 금강산은 이 지역을 한 눈에 살필 수 있다. 따라서 골화성은 자연적 지세를 이용한 최적의 곳에 위치하였다고 생각된다.

다음으로 이 성은 B지역과 연결되어 있어서, 504년 골화성을 쌓기 이전에는 후술하게 될 골화소국의 待避城 역할을 하였을 수도 있다고 생각된다. 앞에서 말하였듯이 A성과 연결되어 A1과 A2의 자연적 지형이 북서쪽의 방파제가 되고, d와 e에서는 능선을 따라 B1․B2지역까지 연결되어 있다. 그 가운데 a1에는 큰 못(속칭 금강못)이 있고, a2에는 근래에 지은 것이지만 금강사라는 절이 있으며 이곳에는 사료(7)①에 보이는 藥泉이 있어서, 지도(1/25000)에 보이지 않는 금강산을 확인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금강산을 중심으로 한 이 지역은 산 전체가 외적의 침입시 군사를 숨기고 적을 퇴치하기에 좋은 지형을 갖추고 있어서 후술하게될 골화소국의 바탕이 되었다고 본다. 지금 B1지역에는 규모가 큰 고총 고분이 20여기가 집중해 있으며, B2지역에도 그곳 동민들 말에 의하면 규모가 큰 고분이 여러 기가 집중해 있었다고 하며 현재 그 흔적이 일부 남아있다. 그리고 A성에도 고분이 있으며, 특히 B1지역의 고분은 직경 14m 높이 3m정도의 고분으로 영천지역의 고분군들(<지도3>참조)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큰 고분이 집중해 있다. 이것은 후술(4장)하겠지만 이 지역이 골화소국의 중심터라는 것을 입증해 주는 것으로 생각된다.

(지도3)

또 B지역에는 앞장에서 살펴본 임천고현성으로 생각되는 구릉(<사진4-①>)에 있어서 골화소국의 主治所였을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A성은 B지역에 있었다고 생각되는 골화소국의 주치소와 연결되어 소국의 대피성 역할을 하였으리라 생각되는 것이다.

한편 이 골화성이 축조된 시기는 사료(1)에서 보듯이 지증왕 5년(504)으로 기록되어 있다. 《三國史記》의 築城記事를 살펴보면 신라는 5세기 중엽(자비왕)부터 6세기초(지증왕 초)까지 축성기록이 집중되고 있다. 그 다음 진평왕까지는 많지 않다가 다시 태종 때인 7세기 중엽부터 8세기초까지 집중되고 있다. 구체적 고증과 검토는 다시 있어야겠지만 자비왕부터 지증왕 초까지는 신라가 주변소국을 병합한 후 고대국가로서의 체제를 갖추면서 內實을 다지는 시기일 것으로 생각된다. 또 주변소국과의 관계도 복속한 당초보다는 더 강력하게 지배하게 되었을 것으로 생각되는데, 이 시기에 이룩된 골화성은 이른바 염지통의 중요 길목에 위치하여 신라 王京의 방어와 함께 지방진출의 거점으로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으리라 생각된다.

또한 신라가 골화소국을 복속한 것은 236년으로 되어 있으나(후술 사료(11)참조) 이 지역에 골화성이 축성된 것은 160여 년이 지난 후이다. 그 160여 년간 신라가 골화소국 지역을 어떠한 형태로 지배하였는지는 분명하게 말할 수 없지만, 적어도 골화성이 축조된 6세기초에는 이 지역을 직접 지배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것은 이 지역(<지도2>의 b2지점에서 正南으로 4리쯤 거리)에서 발견된 菁堤碑의 연구로 좀더 구체화 될 수 있으리라 생각된다. 菁堤를 처음 쌓고 비를 세운 것이 536년 또는 그 이전으로 이해되고 있어서 골화성의 축성시기와 불과 30여 년 정도의 차이다. 또 이 청제는 王京人의 주관하에 이루어졌으며, 그리고 이 지역은 신라 王京과 인접한 곳으로 신라의 방어와 팽창에 중요한 지역이었다. 따라서 골화성을 축성하는 과정의 노동력 확보는 물론 축성후에 신라가 주도하여 수비․관리까지 했을 것을 전제하여 볼 때, 골화성의 축성이라는 것은 이 지역에 대한 신라의 보다 직접적인 지배 속에 가능할 수 있으리라 여겨지기 때문이다.

Ⅳ. 骨火城과 骨火小國

이 골화성은 골화소국과의 관계 속에서 보다 구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여기서는 골화소국 주치소의 위치를 비정하면서 골화성의 의미를 살펴보겠다. 아울러 골화소국에 대한 몇 가지 문제들을 검토하여 골화소국의 실체에 접근하여 보고자 한다.

골화소국에 대한 문헌상의 기록으로 다음 사실이 주목된다. 《三國史記》新羅本紀2 助賁尼師今 七年條에는

(11)「…春二月 骨伐國王阿音夫 率衆降 賜第宅田莊安之 以其地爲郡」

라 하여 신라 조분왕 때인 236년에 골벌국왕 阿音夫가 무리를 거느리고 와서 항복하므로 저택과 田莊을 주어 安居케 하고 그 곳을 郡으로 하였다고 한다.

한편 《三國史記》雜志 地理1 良州條(사료(3))에는 임고군이 본래 切也火郡인데 경덕왕 때(757) 改名한 것으로 지금 永州이며 領縣이 다섯이라 하고, 臨川縣은 조분왕때 골화소국을 정벌하여 설치한 현으로 경덕왕 때 개명한 것이라고 한다.

이 두 사료에서 골벌국 즉 골화소국이 신라에 복속된 것은 조분왕 때라는 사실과 신라에 복속된 소국 중에서 阿音夫라는 소국의 王名이 기록된 특별한 例를 볼 수 있다. 특히 이 두 사료 중 本紀의 기록에는 阿音夫가 來降한 것으로 되어있고 郡이 되었다고 하지만, 雜志에는 伐得하여서 縣을 설치하였다고 각각 다르게 표현된 것이 주목된다.

그리고 신라에 병합된 지 160여 년 뒤에 골화성을 쌓았다는 기록이 나온다.(사료(1)) 또, 骨火는 신라의 大祀를 모셨던 곳으로 三山의 하나가 있었던 지역이다. (사료(2)) 그리고 앞장에서 살펴본 김유신의 설화(사료(10)) 속에 護國三所之神의 하나인 骨火神이 있었던 곳으로 骨火川 骨火館이 있었다는 것이 주목된다.

이상의 골화소국과 관련된 사료를 염두에 두면서 먼저 골화소국의 위치를 구체적으로 비정해 보자.

Ⅱ장에서 이미 골화소국의 대체적 위치는 臨川縣에 있었음을 살펴보았다. 또 臨川縣은 骨火縣이라고도 하며 切也火는 骨火와 통한다고 지적한 바 있다. 앞의 사료(11)에서 骨火小國 阿音夫王이 來降했을 때 신라는 이 小國지역에 郡을 설치하였다는데 이 郡이 사료(3)에 보이는 切也火郡으로 표현된 것으로 생각된다. 骨火와 切也火가 같은 表記이므로 骨火小國이 切也火郡으로 되었을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만 사료(3)에서는 경덕왕 때 切也火郡이 臨皐郡으로 개칭되었다고 하며, 골화소국에 두었다는 臨川縣은 臨皐郡의 다섯 領縣 中의 하나로 되었는데 이것을 어떻게 이해하는가이다. 필자의 생각으로는 처음 골화소국의 阿音夫가 來降했을 때는 그 骨火國名을 따서 骨火郡 곧切也火郡으로 칭하였을 것이고 이때의 郡은 소국의 영역을 대부분 포함한 규모이었을 것으로 본다. 이 骨火小國 왕손에 대한 신라국의 배려는 다른 소국의 경우에는 달리 특별한 것이어서 그 명맥이 비교적 오래 유지되었던 것이고, 사료(11)에 그것이 반영되어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신라에 병합된지 500여 년이 지난 뒤인 경덕왕 때가 되면 골화소국의 자취는 그만큼 없어지게 된 것이다. 따라서 경덕왕 때는 郡名이 切也火郡에서 臨皐郡으로 바뀌면서, 골화소국과 관련해서는 소국때의 中心治所가 있었던 國邑만이 臨川縣으로 정리되어서 사료(3)에 표현된 것이 아닌가 한다.

이것은 골화소국의 영역과 관련하여 중요한 시사를 주는 것으로 생각되는데, 우선 臨川縣이 골화소국의 영역 중에서도 中心지역이었음을 강하게 시사받을 수 있다.

그런데 이 臨川縣은 《勝覽》등에 臨川廢縣이라고도 나오며 「在郡東南五里」로 되어있다. 《慶尙道地理志》에서는 臨川이 「지금(조선시대) 郡村骨山里」라고 되어 있다. 또 《大東輿地圖》(<지도1>)에는 지금 南川의 동남쪽 부근에 ◉표 즉 古城郭표시를 하고 臨川과 南亭院을 같이 기록하고 있다. 동시에 이 지도를 제작한 김정호는 자신의 《大東地志》古邑條에 임천은 東南五里에 있으며 본래 骨火小國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Ⅱ장에서 살펴본 臨川古縣城이 距邑東南五里인 점을 고려하여 보면, 臨川縣 중에서도 臨川으로 표시된 곳에 臨川古縣城이 있고 그 위치는 郡 또는 邑距 東南五里지점이다. 이 위치를 같은 책들에 나오는 다른 지점의 里數와 비교하여 찾아보면 현재 행정구역상 영천시 완산1․2동 일대(<지도2>의 B지점)로 비정된다.

한편 조선시대의 完山洞은 완산면에 소속된 內洞․外洞에 해당하는데, 조선시대 완산면에는 內․外洞외에 金老․富興․錢村․泛魚등 6동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들은 금강산을 중심으로 작산까지에 걸쳐있으며, 이것이 골화소국의 國邑이 있던 臨川縣의 범위라고 생각되어진다.

그러면 이 골화소국의 主治所라 여겨지는 B를 중심으로한 주위환경을 검토하면서 골화소국의 立地를 살펴보기로 한다. 먼저 골화소국의 中心治所라 여겨지는 곳에 臨川古縣城이라는 것이 있으며, 이곳과 연결되는 동쪽 2㎞ 지점에 신라때의 골화성이 있음을 유의해 보자.

《三國志》東夷傳 韓傳에 三國小國中 辰韓小國에는 城柵이 있었다고 되어있어서, 小國과 관련하여 城柵의 존재를 일찍이 주목하여 왔고 城邑國家라는 용어가 사용되기도 한다. 小國에 城柵이 갖추어지기 전에는 촌락의 형성과 더불어 集落住民의 안전을 지키기 위하여 처음엔 자연적 지형을 이용하였을 것이나, 점차 촌락 규모의 확대와 內的 발전과 함께 외적을 방어하기 위한 인위적 城柵이 갖추어졌을 것은 쉽게 짐작해 볼 수 있다. 근래에 소국의 형성과 城郭의 발달과 관련하여 방어적 성격이 강한 高地性集落 유적의 확인과 그 발전에 주목하고 있는 것은 고무적인 일이다. 아무튼 三國小國은 이 城柵과 관련하여 연구될 수 있으며 그 각 소국에 있어서 城柵의 존재를 확인해보는 것은 중요한 작업이다.

아마 촌락의 형성과 발전에 따라 촌락에는 木柵같은 방어적 시설이 갖추어졌을 것이다. 이 촌락자체를 방어하기 위해 둔 것은 在城으로 뒷날 고대국가로 발전하면서 궁성이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대규모적인 적의 침입 등 유사시에는 보다 안전한 곳으로 노약자 및 어린이를 보호한다든가, 전술상 대피를 할 수 있는 시설로서 산성을 갖추기도 했을 것이다.

따라서 각 소국에는 이러한 在城과 대피를 위한 山城이 있었을 것이다. 아직 구체적 연구가 진전된 것은 없지만, 고구려의 국내성(在城)과 尉那巖城(山城)을 비롯, 가야지역에서 星山伽倻國의 星山洞城(在城)과 伽倻山城, 그리고 영천 가까이의 伊西小國에 伊西國邑城(在城)과 栢谷山城처럼 소국의 在城과 山城을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이곳 骨火小國에도 在城과 山城이 있었을 것으로 생각되며, 在城은 臨川古縣城에 山城은 골화성지역(지증왕 때 쌓은 골화성이 골화소국의 산성을 보완하여 축성했다고 전제할 때)에 비정할 수 있겠다. 《大東地志》의 臨川古縣城(사료(9)의①)은 《大東輿地圖》에 古縣의 성곽표시(◉)와 더불어 말 그대로 古縣에 있는 성이고 그 臨川은 같은 책에 骨火小國터로 설명되어 있으니, 臨川古縣城을 骨火小國의 在城으로 생각하는 데는 무리가 없을 것이다.

그리고 현재 이 城으로 비정되는 것은 <지도2>에서 B지역에 해발 100여m의 구릉지가 있는데(<사진4-②>), 이곳에서 古기와편과 토기편이 다수 채집되고 있으며, 서북쪽에는 가파른 절벽이고 남동쪽은 구릉을 이루고 있어서 지형상 가장 적절한 곳으로 여겨진다. 또한 남쪽 산언덕인 B1지역에 거대한 高塚古墳이 있어서 (<사진5-①>), 조상의 힘을 배경으로(조상이 지켜줄 것으로 여겨) 남쪽의 다소 약한 부분을 보완한 것으로도 생각된다. 그리고 이 성에서 골을 따라 또는 능선을 타고 골화성지역과 그대로 연결되어 있어서 이 지역(A성)은 대피성으로 매우 적절하게 위치하여 있다고 하겠다.

따라서, 이 臨川古縣城지역이 바로 골화소국의 主治所로서 城柵(在城)이 있던 곳일 것이며, 유사시 보다 안전한 곳에 대피하기 위한 곳으로서 골화성지역에 대피성이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골화국이 신라에 복속된 지 160여 년 뒤인 지증왕 때에, 교통의 중심지이고 골화소국지역은 물론 신라방어에 유리한 곳인 골화소국시의 待避山城을 중심으로 골화성을 쌓았을 것이다. 또 350년 쯤 뒤에 황보능장은 골화소국터를 중심으로 일어나 기존 골화성을 보충하여 금강성을 쌓고, 골화소국의 在城을 중심으로 활동하였을 것이다. 그 뒤에도 골화성의 중심성인 A성은 유사시 보완하여 사용되었을 것이고, 대의동에 있어 지금은 대의동성으로도 불리는 것으로 생각된다. 요컨대 소국의 하나인 골화소국의 國邑主治所에 城柵의 존재와 그 가까이에 산성의 존재를 잠정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다음 골화소국의 중심이 되는 B지역에는 대규모의 고총고분이 있으므로 고분과의 관계를 살펴보기로 한다.〈지도2〉에서 B1지역에는 직경14m 높이3m여의 고총고분이 10여기, 그 보다 좀 작은 것이 10여기 등 20여기의 고분이 있다.(<사진5-②>)B2지역에도 봉분은 훼손되어 확인할 수 없지만 지역 주민의 말에 의하면 고총고분으로 생각되는 고분이 10여기 있었다고 하며 그 일부 흔적이 지금도 많이 남아 있다.(<사진6-①>) 이 고분들이 골화소국 당시의 어느 시점에 축조되었는지는 발굴하여 연구하지 않고는 단언할 수 없지만, 적어도 이 지역의 골화소국과 관계되는 것만은 분명하리라 생각된다.

그리고 영천지역에는 그밖에도 많은 고분군이 있는데 (<지도3>참조), 이들은 봉분이 B지역의 것처럼 큰 것은 보이지 않으며, 아마 골화소국의 領域內에 있는 소국에 연맹된 城村과 연결지워 볼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골화소국의 중심터라고 생각되는 B지역은 북쪽으로 현재 南川이 있고, 그 동북편의 단포와 조교들(장천평야), 서남편에 남천을 이용하여 경작할 수 있는 넓은 주남들을 끼고 있다. 이 하천과 평야는 소국의 경제적 바탕이 되었을 것이다. 이러한 입지는 다른 소국들도 다소의 차이는 있겠지만 대체로 마찬가지로 적용될 수 있으리라 생각된다. 따라서 골화소국이 위치한 이 곳의 입지인 1. 國邑의 主治所에 城柵과 그 가까이에 대피성으로서의 山城이 존재할만한 산을 포함하고 있고, 2. 고분 특히 고총고분이 집중하여 있으며, 3. 하천과 비옥한 평야를 낀 구릉지라는 집락조건등은 다른 소국의 입지에도 그대로 반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동시에 이것은 완산동 지역이 골화소국의 國邑임을 분명히 하여주는 것이라 생각된다.

한편 이 골화소국의 규모는 주변의 다른 소국과( 압독국과 召文國 및 伊西國․音汁伐國 등) 비교하여 결정될 수 있으리라 생각되지만 우선 문헌기록을 통해서 살펴본다. 골화소국의 규모는 대체로 초창기 切也火郡의 영역으로 생각되는 사료(3)의 臨皐郡 領縣인 長鎭․臨川․道同․新寧․黽白縣을 포함하는 정도일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것은 임고군이 원래 切也火郡이고(사료(3)), 이 切也火郡은 골화소국지역에 처음 설치할 때의 郡(切也火〓骨火)으로 이해되기 때문이다.

이 다섯 지역 중 골화소국의 국읍이 있었던 임천현을 제외한 네 지역의 현재 위치를 비정해 보면 長鎭縣은 죽장리, 道同縣은 도동과 유상리일대, 新寧縣은 현재 신령지방, 黽白縣은 미상이지만 지금 자천면 대평동일대라고 생각된다. 따라서 현재 영천시․군 일대와 영일지역 일부가 골화소국의 세력권이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된다.

그리고 골화지역은 신라 護國三神중의 하나인 骨火神이 있었던 곳으로 三山의 하나가 있던 곳이다. 이 골화의 산은 Ⅱ장에서 이미 살펴 보았듯이 금강산일 것으로 생각하고, 大祀를 지낸 곳은 분명하지는 않지만 B지역의 구릉지일 가능성도 있다.(<사진6-②>)

Ⅴ. 맺 음 말

이상에서 골화성에 대하여 그 위치, 현상과 주변환경, 그리고 골화소국과 관련하여 살펴 보았다. 이제 지금까지 언급한 바를 요약하여 맺는 말로 한다.

《三國史記》에 지증왕 5년 축성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 골화성의 대체적인 위치는 골화 즉 영천 지역으로 간주되나, 그 구체적인 위치를 찾기 위하여 첫째 골화소국과 관련하여 생각하였으며, 둘째 축성 목적에 비추어 적합한 지형상의 입지를 고려하였으며, 셋째 영천 지방의 성들을 조사하여 앞의 두 가지와 부합되는 지를 확인하여 보았다.

먼저 골화소국과 관련하여 볼 때 골화성은 골화소국 지역에 있던 기존 城柵을 이용하여 축성하였을 가능성이 높으므로 골화소국의 터인 臨川縣에 있었다고 생각되었다. 이 임천현의 다른 이름인 골화현에는 신라말에 금강성이 나오는 데, 이 금강성은 그 성격상 골화성을 보완하였을 것으로 보아 골화성과 금강성은 일치하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이 금강성은 금강산에 있다고 하므로, 금강산의 정확한 위치를 찾아서 현재 영천시 완산동과 범어동 그리고 고경면 대의동에 걸쳐있는 산으로 비정하였다. 그리고 이 산에 남아 있는 토성지가 금강성이며 곧 골화성지라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위 금강성은 골화소국 및 신라 왕경을 방어하기에 유리한 지형적 이로움을 모두 갖추고 있었다.

다음 영천지역의 성들을 조사하면서 골화성, 금강성, 대의동성은 같은 곳에 축성된 것이나 시대를 달리하면서 補築이 이루어지고, 달리 불리어진 것으로 생각하였다. 한편 臨川古縣城의 위치를 조사하면서, 이것은 골화성과는 다른 것으로 골화소국의 在城이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보았다.

이 골화성으로 비정되는 금강산의 토성지를 중심으로 현존상태를 살펴보았다. 이 성은 금강산 최고지점(해발 186m)을 중심으로 양쪽 산 능선을 따라 土石混築한 전형적인 包谷式 山城으로 主城의 둘레는 약 1650m로 현재 남아 있는 성벽의 높이는 최고 2m정도이며 동쪽 부분의 성벽이 비교적 잘 남아 있었다.

이 성을 중심으로 주변환경을 살펴보면서 이 성은 자연적 지세를 이용한 최적의 곳에 위치하였음을 살필 수 있었다. 특히 성의 앞으로 흐르는 남천과 옛 교통로를 고찰하면서 골화성이 입지한 곳이 교통 및 군사상의 요충지임을 알 수 있었다.

또한 이 성은 골화소국의 중심지역으로 여겨지는 완산동과 연결되어 있어서 골화소국 때에는 소국인의 대피성 역할을 하였을 것으로 여겨졌다. 골화소국이 신라에 복속된 후 이 성이 축조되기까지 160년간을 신라가 어떠한 형태로 이 지방을 지배하였는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이 골화성 지역은 이른바 염지통의 중요한 길목에 위치하여 신라 왕경의 방어와 함께 지방 진출의 거점으로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으리라 생각되며, 적어도 이 성이 축조된 시기에는 이 지역을 직접 지배하였으리라 생각하였다.

골화소국과 관련하여 《三國史記》新羅本紀 助賁尼師今 七年條의 기사와 《三國史記》雜誌 地理1 良州條의 기사에 주목하여, 골화소국의 국읍이 임천현지역이며 고총고분과 관계하여 지금의 완산동 임을 밝혔다. 아울러 臨川古縣城을 골화소국의 在城으로 보고, 대피성인 산성이 골화성 지역에 있었으리라고 생각하였다. 또한 좋은 하천과 큰 들 그리고 구릉지를 끼고 있는 이 지역은 골화소국의 입지로 좋은 조건을 갖추었다고 생각하며, 고총고분의 집중된 존재, 주치소로 여겨지는 곳에 재성과 그 가까운 산에 대피성 역할을 할 산성, 그리고 하천과 비옥한 들을 낀 구릉지 등은 다른 소국의 입지에도 적용될 수 있으리라 생각된다.

또한 골화소국의 대체적인 영역은 切也火郡의 초기영역으로 생각하였으며, 한편 신라 三山의 하나인 골화은 골화성이 있었던 금강산으로 생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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