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지도를 통해 본 내고향 영천(김명희)
★ 古地圖를 통해 본 내 고향 永川 ★
20020133 김명희
목 차 |
Ⅰ. 들어가며
Ⅱ. “해동지도”안에서 들여다본 내 고향 '永川' 1. 성안의 세계 2. 성밖의 서계
Ⅲ. “광여도”안에서 들여다본 내 고향 “永川” 1. 비슷하면서 다른 “해동지도”와 “광여도”
Ⅳ. 나오면서 |
Ⅰ. 들어가며
하루가 다르게 변하고 있는 오늘날의 생활에서 지나온 것에 대한 냉철한 판단이 앞날을 더 살찌우게 한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들은 여러 옛 것들을 통해 오늘을 되돌아 보고, 앞날에 대한 설계를 하기도 한다. 지금부터 살펴볼 고지도 또한 이러한 관점으로 볼 때 참으로 가치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단순히 지도라 하여 객관적인 정보만을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관심을 가지고 그 지도를 들여다보면 그 안에서 그 당시의 우리 고장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 지도안에 있는 향교를 통해 우리 조상들의 배움의 숨결을 느끼기도 하고, 그 지도안에서 보여지는 낯선 이름을 통해 어찌하여 오늘날과 같은 이름으로 불려지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도 생각해 볼 수 있다. 모든 것이 내가 그 안에 작은 의미를 부여하는 순간부터 나에게 큰 의미가 되어서 다가온다는 것을 이 고지도를 통하여서 알 수 있는 듯 하다. ?어찌하여 이렇게 되었는지..?이러한 작은 관심을 시작으로 고지도를 들여다보겠다.
나의 고향 영천의 옛 모습은 해동지도와 광여도를 중심으로 살펴보기로 한다.
Ⅱ. 해동지도 안에서 들여다본 내 고향 '영천'
1. 성안의 세계
1) 성을 둘러싸고 있는 네 문(四門) - 동문(東門), 서문(西門), 남문(南門), 북문(北門)
성을 둘러싸고 네 문(四門)이 표현되어 있다, 성 내부는 지도적인 특성이 반영되어 각종 관청이 표시되어 있다. 이 해동지도가 성곽 안쪽을 중심으로 그린 “도성도”와는 다른 것이므로 성안이 그다지 상세하게 나타나 있지는 않았다. 성안에는 도로와 하천의 표시는 따로 없으며 성밖을 나와서는 그런 표시가 상세하게 나타나 있다.
2) 성안의 관청
여기에서 객사(客舍)라는 곳은 그 시대 때 공적인 임무를 띄고 오는 귀빈들의 숙박을 위한 곳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아사(衙舍)는 관아 가운데 지방관이 집무하던 곳을 일컫는 말이었다. 열무각(閱武閣)은 정확한 임무에 대해서는 알 수가 없었지만 열(閱)자의 의미를 살펴보면 문서를 관리하고 조사하던 곳이었음을 짐작 할 수 있다. 또한 성안에도 두 개의 면이 있었는데 내서면(內西面), 내동면(內東面)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었다.
3) 유서 깊은 향교
뿌리깊은 유서를 가진 곳은 어디를 가든 향교라는 곳이 있는데 우리 영천 또한 예외는 아니었다. 성안을 자세히 살펴보면 향교가 표시되어 있는데 현재 영천에는 이 향교가 있는 곳은 성내동임을 알 수 있었다. 이 성내라는 말은 이 당시 향교가 성안에 위치하고 있는 것으로 봐서 성안의 동이라는 뜻으로 쓰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성내동에는 향교를 비롯하여 보물 제 521호 숭열당. 보물 제 652호 병와유고 등 중요민속자료, 유형문화재, 경상북도문화재자료 등이 있어 교육문화의 중심으로 자리매김해왔다.
2. 성밖의 세계
1) 뚜렷하게 드러나는 산지와 도로
이제는 성밖으로 눈을 돌려보도록 하겠다.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선명하게 표시되어 있는 산지와 도로의 모습이다. 우리 지역의 지도에는 역원의 표시가 없지만 다른 지역을 보면 역원과 고개 등이 표시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2) 오늘날과 다른 마을의 이름
다음으로 지도를 들여다보면 내가 사는 고장이지만 그 마을의 이름이 낯선 곳이 많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이것은 마을의 이름이 변천되었음을 알 수 있는데 대표적으로 내가 알 수 있는 곳을 설명해 보도록 하겠다.
지도를 자세히 살펴보면 고촌면(古村面)이라는 곳을 찾아 볼 수 있다. 이 이름은 현재 존재하지 않는 이름으로 오늘날에는 “고경면(古鏡面)“으로 불리는 곳이다. 이 곳은 1914년 행정 구역 폐합이 있기 전에 25개의 동리를 관할하였는데, 폐합이 이루어지면서 개편의 과정을 반복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고촌면에서 서쪽으로 내려오다 보면 아천면(阿川面)을 찾을 수 있다. 이곳은 오늘날의 “임고면(臨皐面)“을 말하는 것이다. 그 당시 아천면이라는 지역 명이 생기게 된 것은 영천지역에서 금호강의 상류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 아천면이라는 말은 변천의 과정을 거치면서 영천의 옛 이름인 임고의 명칭을 따서 오늘날에 임고면이라 불리게 된 것이다. 서쪽으로 바라보면 산저면(山底面)이 있다. 이 산저면은 봉화산 밑이라는 뜻으로 붙여진 이름으로 오늘날의 청통면(淸通面)을 말하는 것이다. 이 청통면이라는 이름은 이조 때 청통역의 이름을 따서 붙여진 것이다. 이 밖에도 이 지도에 나타나 있는 면은 거여면(巨餘面), 겁림면(迲林面), 고촌면(古村面), 고현면(古見面), 구리내면(仇里內面), 내동면(內東面), 내서면(內西面), 명산면(鳴山面), 모사동면(毛沙洞面), 비소곡면(比召谷面), 완산면(完山面), 우곡면(又谷面), 원곡면(原谷面), 원당면(元堂面), 자천면(慈川面), 창수면(蒼水面), 추곡면(追谷面), 칠백면(七百面), 환귀면(還歸面)이 있다.
3) 훌륭한 인재양성 - 서원
또한 이러한 것 외에 이 지도에서는 각 서원의 모습도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조선시대의 많은 학자와 유학자를 배출한 곳인 송곡서원(松谷書院)이 있으면 서남쪽을 바라보면 임고서원(臨皐書院)이 자리잡고 있다. 이 임고서원은 포은 정몽주를 모신 곳으로서, 이조 명종 8년에 노수, 김응생, 정윤량 등이 서론 의논하여 서원을 짓고 사액을 받았는데, 선조 25년 임진왜란 때 불타 없어지고 다시 지금의 자리에 서원을 짓고 사액을 받아 임고서원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이다. 이 뿐만 아니라 현재 대창면에 위치하고 있는 도잠서원이 있다. 이 도잠서원(道岑書院)은 퇴계 선생의 문인으로 관서부자로 추앙 받은 지산 조호익 선생을 향사하기 위해 광해군 5년에 건립하였다가 숙종 4년에 현 위치로 이전하였다고 한다. 이 밖에도 입안서원이 있다.
4) 차곡차곡 저장해두는 영천의 창고
이 밖에도 이 지도에서는 영천에는 많은 창고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먼저 성곽을 중심으로 각 방위별로 동창, 서창, 남창, 북창이 자리잡고 있다. 이 창고들은 위의 지도에서 살펴볼 수 있듯이 모두가 강을 끼고 자리잡고 있다. 이것을 통해 우리는 이 당시 이러한 창고들이 어떠한 역할을 하였는지에 대해서 알 수 있다. 강을 이용하여 물자를 운반하고, 주변의 세곡을 모아 저장하고 이를 뱃편으로 강 하구로 운반하였을 것이라는 짐작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조운 역할을 한 창고뿐만 아니라 그 마을의 이름을 딴 창고도 살펴볼 수 있는데 그 예로 위의 지도에서 찾을 수 있는 자천창(慈川倉)이 그것이다. 아마도 이 창고에는 운송할 물자가 있었다기보다는 그 마을 주민들의 편의를 위해서 곡식을 저장해두거나 다른 물자를 저장해두는 그 마을만의 창고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렇듯 이 지도에서도 잘 나타나지만 영천이라고 하면 예로부터 교통이 잘 발달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하여 오늘날에도 이 영천은 모든 지역과 통하고 있는 중심된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5) 사묘의 모습
다음으로 이 해동지도에는 여러 사묘도 찾아 볼 수 있다. 여기에는 성황단(城隍壇), 사직단(社稷壇), 여제단(厲祭壇)이 있다.
6) 알뜰살뜰 지도의 여백
마지막으로 이 지도의 여백에서도 우리는 많은 것을 볼 수 있다. 여기에는 호구, 전결, 곡물, 군병, 건치연혁, 산천, 군명, 고적, 역원, 서원, 불우, 토산 등의 항목과, 방위를 표시하는 방면주기가 들어 있다. 이 중에서 호구, 전결, 곡물, 군병 항목과 방면주기는 대부분의 군현지도에 공통적으로 들어 있으나, 건치연혁에서 토산에 이르는 항목들은 일부 군현지도에서만 발견되는 것으로 특이한 사례라고 할 수 있다.
Ⅲ. '광여도' 안에서 들여다본 내 고향 '영천'
앞서 살펴본 해동지도와는 달리 광여도에는 도로의 표시가 없다. 반면에 해동지도에는 없는 것을 이 광여도에서 찾을 수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주요 교통로 상의 역원과 고개가 표시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 지도는 그다지 복잡한 설명이 없으므로 지도 자체가 깜끔하며 지도를 본 다기보다는 그림을 보는 듯한 착각을 일게끔 하기도 한다. 뿐만 아니라 해동지도와는 달리 이 지역에 대한 설명이 여백에 있지 않으니깐 지도 자체가 더 한눈에 들어오는 듯 하다. 또한 이 광여도는 설명문이 별도로 도면과 함께 쓰여져 있는데 이 명문에는 호구, 전결, 부세, 군정 등 군현의 사회경제적 사정을 알려주는 항목들이 주로 설명되고 있다. 이 밖에는 해동지도와는 그리 큰 차이가 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Ⅳ. 나오면서
이상으로 고지도를 중심으로 내고장 영천의 옛날 모습을 살펴보았다. 20년이란 시간을 이곳에서 살아오면서 너무나 무심히 살아왔다는 생각을 하여 보았다. 지금의 모습에 치운 친 생각으로 이 시간 이전에는 어떠한 모습이었는지 관심이 전혀 없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이러한 기회로 말미암아 새롭게 찾아보는 기회가 되었다.
어떤 새로운 곳을 찾아 떠나갈 때 우리의 손에는 어김없이 길의 안내자가 되어주는 지도가 들려져 있다. 그 지도를 통해 낯선 곳도 조금은 편안한 마음으로 찾아가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우리에게 새롭다는 것에 대한 불안을 덜어주는 것이 지도라면 그 지도는 충분히 자신의 임무를 다하여야 할 것이다. 그 만큼 들여다보았을 때 쉽게 알 수 있도록 되어 있어야 하며, 누구 나가 보아도 그 지도를 이해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오늘날의 지도를 보면 이러한 것에서 어려움을 느끼지는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드는데 고지도는 지도를 보는 순간 전혀 그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냥 하나의 그림으로 보일 뿐 지도를 해석하고, 그 지도를 가지고 무언가를 찾는 것은 나에겐 무리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지도로서의 기능을 하지 못한다고 하여 이 고지도의 가치는 오늘날의 지도보다 떨어진다는 말인가? 이러한 질문에 대해서는 선뜻 대답을 할 수 없다. 물론 고지도가 오늘날의 지도처럼 객관적이며 정확한 지리정보를 제공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고지도에서 선조들의 가치관이나 그에 대한 사상을 엿볼 수 있어야 한다. 고지도를 통해서 느껴지는 우리 선조들의 깃든 정신과 진정 이 고지도에 내포되어 있는 역사적인 의미 또한 도출해 낼 수 있는 능력을 길러야 할 것이다.
처음이라는 것이 사람을 조금은 비겁하게 하는 둣 하다. 처음이라서 서툴렀다는 핑계와 함께 우리 고장의 고지도를 통해 그때의 모습에 대해 잠시나마 살펴볼 수 있는 좋은 기회를 가지게 되었음을 다행으로 여기며 이 레포트를 마무리할까 한다.
참 고 문 헌 & 참 고 사 이 트 |
1. 한영우, 『해동지도 上』, 한국광양사, 1995. 2. 한글학회, 『한국 지명 총람 6 (경북편)』, 평강 정밀 인쇄 공업사, 1979. 3. 민족문화추진회, 『新增東國輿地勝覽』, 민족문화추진회, 1969 4. 박영언, 『영천군정사』, 한진종합인쇄사, 1994. 5. http://e-kyujanggak.snu.ac.kr/class/servlet/MapList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