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천 문화유산 자료/영천 문화유산자료 모음

조양각시문집(영천문화총서 1집)

이원석(문엄) 2011. 12. 8. 11:12

朝陽閣詩文集․5

□ 발간사

영천문화원장 김 종 대

영천 역사의 산 증인으로 영천 중심부에 우뚝 서 있는 서세루(瑞世樓) 즉 조양각(朝陽閣)은 우리 영천 사람들의 마음의 고향입니다.

그곳에는 포은 정몽주 선생을 비롯한 사가 서거정, 율곡 이이, 노계 박인로 등 많은 명현달사들의 시액이 아직까지 선명하게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한문으로 되어 있어 누구나 쉽게 읽어볼 수 없어 늘 안타까웠습니다.

20여 년 전 영천시에서 국역본을 낸 적이 있으나 외지에서 이 곳을 찾는 많은 사람들이 그 책을 보려고 하였지만 지금에 와서는 찾아보기 힘든 지경에 이르러 영인본을 제공하곤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재판을 발행할 계획으로 준비를 하던 중 그 내용을 그대로 영인할 것이 아니라, 지난 번 국역은 다섯 사람이 나누어 하셨는데 이번에는 한 사람이 풀어 통일성을 기하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을 받아들여 새롭게 풀고, 인명에 대한 내용을 더 찾아 넣고, 지난번에 빠진 상량문 두 편도 넣고, 책의 판형도 현대에 맡게 줄이는 것으로 가닥을 잡아 작업을 진행하게 되었습니다.

6․發刊辭

특히 이 책의 발간을 서두른 것은 현재 조양각이 비스듬히 넘어가고 있어 빠른 보수를 요구하여야 한다는 주변의 여론을 받아드리기로 하였기 때문입니다.

역시 신녕 고을의 누각 역할을 한 환벽정의 기와가 떨어져나가는 등 빠르게 퇴락 되어 가는 것이 심히 안타까워 부록으로 신녕에 있는 환벽정의 시문과 기문도 함께 넣기로 하고 신녕향교 교지를 참조하여 수록하였습니다.

글은 어딘가 남겠지만 이 두 건물은 우리 영천의 자존심이기에 제대로 된 모습으로 후손에게 물려줄 책임이 우리에게 있다는 것을 우리 모두가 깨닫고, 다른 무엇보다도 우선하여 보수하여 줄 것을 청원하는 의미를 담아 이 책을 발간함을 다시 한 번 천명 드리며, 부족하나마 이 책이 영천 역사의 정체성 확립에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끝으로 이 책이 나오기까지 많은 도움을 주신 이진기(李震基) 영천향교 전교님께 깊이 감사를 드리며 발간사를 대신합니다. 감사합니다.

2004년 12월

 

■ 目 次 ■

□ 發刊辭 / 永川文化院長 金 鍾 大 3

□ 朝陽閣의 來歷 16

□ 詩 篇

․ 鄭夢周(정몽주) 23

․ 李 容(이 용) 25

․ 崔元祐(최원우) 26

․ 咸傅霖(함부림) 27

․ 柳方善(유방선) 28

․ 徐居正(서거정) 29

․ 楊熙止(양희지) 30

․ 金宗直(김종직) 31

․ 許 琛(허 침) 32

․ 曺 偉(조 위) 33

․ 辛永禧(신영희) 34

․ 李賢輔(이현보) 35

․ 成世昌(성세창) 37

․ 李 荇(이 행) 38

․ 李仲樑(이중량) 39

․ 權 容(권 용) 40

․ 鄭惟吉(정유길) 41

․ 李 珥(이 이) 42

․ 朴仁老(박인로) 43

․ 曺友仁(조우인) 45

․ 李安訥(이안눌) 46

․ 李敏求(이민구) 47

․ 尹順之(윤순지) 48

․ 沈東龜(심동구) 49

․ 林 담(임 담) 50

․ 具鳳瑞(구봉서) 51

․ 崔孝騫(최효건) 52

․ 愼景尹(신경윤) 53

․ 金洪福(김홍복) 54

․ 李重協(이중협) 55

․ 金殷礪(김은려) 56

․ 金鎭商(김진상) 58

․ 鄭觀河(정관하) 59

․ 鄭亨復(정형복) 60

․ 李箕鎭(이기진) 61

․ 李萬稙(이만직) 62

․ 尹鳳五(윤봉오) 63

․ 尹得聖(윤득성) 64

․ 鄭夏彦(정하언) 65

․ 金尙星(김상성) 66

․ 尹東度(윤동도) 67

․ 林象元(임상원) 68

․ 李得宗(이득종) 69

․ 李獻慶(이헌경) 70

․ 鄭存謙(정존겸) 71

․ 李性源(이성원) 72

․ 李 瀰(이 미) 73

․ 金履鐸(김이탁) 74

․ 鄭大容(정대용) 75

․ 沈公著(심공저) 76

․ 咸正禧(함정희) 77

․ 吳鼎源(오정원) 79

․ 吳翰源(오한원) 80

․ 尹益烈(윤익렬) 81

․ 金羲淳(김희순) 82

․ 南公轍(남공철) 83

․ 鄭東觀(정동관) 84

․ 李尙度(이상도) 86

․ 沈象奎(심상규) 87

․ 李泰熙(이태희) 88

․ 鄭基重(정기중) 89

․ 鄭基善(정기선) 90

․ 鄭世昌(정세창) 91

․ 李晦淵(이회연) 92

․ 李希英(이희영) 93

․ 黃 䆃(황 도) 94

․ 朴友采(박우채) 95

․ 金陽淳(김양순) 97

․ 咸英錫(함영석) 98

․ 李寅元(이인원) 100

․ 鄭基轍(정기철) 102

․ 鄭㝡朝(정취조) 103

․ 鄭基洛(정기락) 104

․ 李鶴儀(이학의) 105

․ 金東獻(김동헌) 106

․ 鄭寅國(정인국) 107

․ 金箕晳(김기석) 108

․ 金箕絢(김기현) 109

․ 沈明奎(심명규) 110

․ 李寅卨(이인설) 111

․ 張錫龍(장석룡) 112

․ 李建栻(이건식) 113

․ 黃河一(황하일) 114

․ 姜駿秀(강준수) 115

․ 李敦相(이돈상) 116

․ 李鶴來(이학래) 117

․ 金奎升(김규승) 118

․ 林時益(임시익) 119

․ 沈定澤(심정택) 121

․ 鄭煥圭(정환규) 124

․ 許 烒(허 식) 125

․ 鄭善朝(정선조) 126

․ 許 혁(허 혁) 127

․ 李道宰(이도재) 128

․ 南廷獻(남정헌) 129

․ 權載紀(권재기) 130

․ 權重海(권중해) 131

․ 金命求(김명구) 132

․ 姜永瑞(강영서) 133

․ 金鎭協(김진협) 134

․ 李啓夏(이계하) 135

․ 李鍾瀅(이종형) 136

․ 李權祚(이권조) 137

․ 李章鎔(이장용) 138

․ 曺兢燮(조긍섭) 140

․ 李鍾洙(이종수) 141

․ 崔恒黙(최항묵) 142

․ 盧根容(노근용) 143

․ 朴敬遠(박경원) 144

․ 李祥璿(이상선) 145

○斗熙 ○두희 146

○熙民 ○희민 147

□ 永川朝陽閣四友契題名圖 148

□ 記文編

․ 明遠樓記 / 徐居正 153

․ 朝陽閣重修記 ① / 李建式 160

․ 朝陽閣重修記 ② / 張潤圭 163

․ 朝陽閣重修記 ③ / 鄭島榮 167

․ 朝陽閣重修記 ④ / 鄭崋植 170

․ 朝陽閣重修記 ⑤ / 曺圭喆 174

․ 朝陽閣重修記 ⑥ / 馬龍洙 177

□ 上樑文

․ 朝陽閣上樑文 183

․ 朝陽閣重修上樑文 / 李箕元 190

□ 附 錄 / 環碧亭

․ 徐居正(서거정) 197

․ 李世南(이세남) 198

․ 李彦迪(이언적) 199

․ 李 滉(이 황) 200

․ 黃俊良(황준량) 201

․ 金克一(김극일) 202

․ 金尙容(김상용) 203

․ 李民宬(이민성) 204

․ 洪翼漢(홍익한) 205

․ 李景奭(이경석) 206

․ 李敏求(이민구) 207

․ 張應一(장응일) 208

․ 南九萬(남구만) 209

․ 李龜錫(이구석) 210

․ 尹鳳五(윤봉오) 211

․ 安處宅(안처택) 212

․ 金慶基(김경기) 213

․ 權爾範(권이범) 214

․ 金麗宅(김려택) 215

․ 權致經(권치경) 216

․ 丁甲祖(정갑조) 217

․ 權致穆(권치목) 218

․ 曺克承(조극승) 219

․ 權致直(권치직) 220

․ 金準聲(김준성) 221

․ 丁鳳翰(정봉한) 222

․ 曺文敬(조문경) 223

․ 金命熙(김명희) 224

․ 金璡聲(김진성) 225

․ 金大玉(김대옥) 226

․ 權宅綸(권택륜) 227

․ 韓鎭殷(한진은) 228

․ 安慱鎭(안단진) 229

․ 曺秉秀(조병수) 230

․ 金在坤(김재곤) 231

․ 權相洛(권상락) 232

․ 權祺鉉(권기현) 233

․ 環碧亭記 / 宋浚吉(송준길) 234

 

16․朝陽閣의 來歷

조양각(朝陽閣)의 내력

지정사항 : 유형문화재 제144호

소 재 지 : 영천시 창구동 1-1

지 정 일 : 1981년 4월 25일

조양각의 원래 명칭은 명원루(明遠樓)였다. 고려 공민왕 17년(1368) 당시 부사(副使)였던 이용(李容)이 보현산(普賢山)에서 원류가 된 남천과 북천이 영천 중심지에서 합류하여 금호강을 이루는 남천의 절벽 위에 지은 건물이다.

명원루라는 이름은 당나라 문장가인 한퇴지(韓退之)의 시 가운데 원목증쌍면(遠目增雙明 : 훤히 트인 먼 경치를 바라보니 두 눈 마저 밝아오는 듯 하다)라는 말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사가(四佳) 서거정(徐居正)이 밝힌 것처럼 아득한 주남평야(周南平野)를 거슬러 육중하게 버티고 있는 채약산(採藥山)까지 이르는 원경은 속인의 감회라도 이해가 간다. 그래서 전해오는 말로는 밀양의 영남루(嶺南樓), 진주의 촉석루(矗石樓)와 함께 영남삼루(嶺南三樓)라고 하며, 안동의 영호루(暎湖樓), 울산의 태화루(太和樓), 양산의 쌍벽루(雙碧樓), 김천의 연자루(燕子樓)와 합쳐 영남칠루(嶺南七樓)라고 적혀있다.

1482년 군수 신윤종(申允宗)이 동서 별실을 고쳐서 동을 청량당(淸凉堂), 서를 쌍청당(雙淸堂)이라 이름을 고쳤다.

1592년 임진왜란으로 인해 소실되고, 1637년 군수 한덕급(韓德及)이 그 자리에 누각 15칸과 협각 3칸을 지어 조양각이라 이름하였다.

朝陽閣詩文集․17

다시 1742년 당대의 명필가 군수 윤봉오(尹鳳五)가 조양각을 중창하여 손수 서세루(瑞世樓)란 현판을 써 달았다.

현재는 좌우 별실 등 부속 건물은 모두 허물어져 없어지고, 정면 5칸 측면 3칸의 조양각 건물만은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 사가(四佳) 서거정(徐居正), 점필재 (佔畢齋) 김종직(金宗直), 율곡(栗谷) 이이(李珥), 노계(蘆溪) 박인로(朴仁老) 등 당대 명현들의 시액(詩額) 70여 점을 간직한 채 날아갈듯 웅장하게 서 있다.

문화재 지정 당시 건물의 현황을 살펴보면,

정면 5칸 측면 3칸인데 그 중 한 칸이 구둘방이다. 구둘방은 전면에서 건물을 향하고 서서 어간(御間) 다음의 협칸(挾間)에 있는데 고주(高柱)에 전단(前端)을 의지하여 전퇴일칸(前退一間)이 형성되어 있다.

방의 천장은 평천장(平天障)이나 우물로 꾸몄고 단청을 하였는데 원형이 이런 모양이었는지는 불분명하다.

고주(高柱)에는 벽선을 세워 문얼굴을 구성하였다. 여기에 문짝을 설비하였다. 현재 4면의 벽이 모두 열려져 있는데 이것 역시 원형인지 불분명하다. 보통의 경우는 후면벽은 벽체가 되는 것이나 여기서는 잘 확인되지 않는다.

방 이외의 마루는 모두 우물마루이다. 우물마루는 마루가 큼직하여 청판이 길쭉길쭉하다. 이들 청판은 고색이 짙지 않은 것으로 보아 보수된 것 같다.

방의 고주 주간(柱間)의 인방(引枋) 위는 흙벽이다. 지금은 분벽(粉壁)이나 원래는 사벽(沙壁)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퇴량(退樑)은 고주에 걸렸다. 고주는 더 높이 솟아 중대공이

18․朝陽閣의 來歷

되었는데 이는 매우 견실한 가구법(架構法)이다.

청의 가구(架構)는 오량가(五樑架)이다. 긴 대량(大樑)이 결구(結構)되었는데 그 단면이 두형(頭形)에 가까운 원형이다. 이는 口形의 선박처럼 생긴 조선조 일반적인 대량(大樑)과는 약간 차이가 있는 형상이다.

대량상(大樑上)에 종량(宗樑)이 있다. 삼분변작(三分變作)한 기법에 따라 구성되었는데 중대공은 일종의 포대공이다.

대량상(大樑上)에 주두(柱頭)를 놓고 보아지를 두공(頭工)처럼 짜고 중도리 및 바침 장혀를 받는 이중의 첨자를 결구시켰다. 포대공으로도 그리 흔한 양상은 아니다.

종대공(宗台工)은 거대하다. 판대공(板台工)인데 종량(宗樑)의 길이만큼을 다 차지하는 범위에 안좌(鞍坐)를 정하고 삼각상(三角狀)으로 솟아올라 종도리를 받았다. 파연대공(波蓮台工)의 일종이다.

천장은 연등이다. 방을 제외한 부분에서 전부 서까래를 올려다 볼 수 있는데 단지 층량보 위에서만은 눈썹천장에 가려졌다.

측면이 3칸이어서 충량(衝樑)은 두 가닥 휘어 올라 대량(大樑)에 걸렸다. 자연히 중대공에 결구되게 되었는데 그것이 포대공의 일원이 되는 방안은 그리 흔하지 않는 기법이다.

우미량처럼 충량이 휘어 올라서 중도리의 왕찌 부분이 충량의 등에 타고 앉게 되었다. 따로 바침을 두지 않게 된 것도 흥미 있는 구성이다.

눈썹천장은 우물이고 소란천장이다.

평주상(平柱上)의 공포 구성은 익공형(翼工形)이다. 쇠서의

朝陽閣詩文集․19

존재로 보아서는 이익공형(二翼工形)이나 실제의 구성에서는 전형(典型)에서 벗어났다.

귀공포에서 쇠설을 절단 생략한 기법도 특색이 있으며 익공(翼工)의 전형적인 양식에서는 벗어나는 양태이다. 창방머리가 점차로 발전한 예도 보기 드문 법식이다.

이런 양식은 익공이 아니며 그렇다고 주심포도 아니다. 결국 절충형인데 창방과 짜인 주두 아래의 헛점차와 대량바침의 보아지가 뒤쪽에서는 한몸의 보아지가 되었고 앞머리에선 그것이 이제공(二諸工)이 되었다.

이 구성으로 익공 전형의 두 주두의 설치는 벗어나고 말았다.

주심포계가 아니어서 외목(外目)이 없다. 그리고 주간(柱間)에는 화반(華盤)이 있다. 앙화반(仰華盤)이다. 각간(各間)에 2매씩이나 전후 퇴간만은 1매씩이다.

누 아래 기둥은 짧고 원형으로 된 나무기둥이다. 손질한 주초(柱礎)에 정초(定礎) 좌우 우주(隅柱)는 콘크리트 두 겹을 씌워 주초도 보이지 않는다.

처마는 겹처마이며, 지붕은 팔작지붕이다. 누(樓)는 전면이 고상식(高床式)이고 배면은 접륙(接陸)하였는데 이 부분의 화강석 기단은 후에 설치한 이질적인 것이다. 이것은 어느 때인가 반드시 없어져야 할 구조물이다.

인조 15년(1637)에 군수 한덕급이 명원루 터에 누사(樓榭) 15칸을 중건하고 조양각이라 하였다. 숙종 2년(1676)에 군수 이만봉(李萬封)이 중수하고 이 보다 26년 후인 1702년에 군수 권영경(權寧經)이 중창하였다.

20․朝陽閣의 來歷

영조 18년(1742) 군수 윤봉오가 세번째로 중창하였다. 불과 40년만에 중건설인데 어떤 까닭에 이 때에 다시 충창했는지는 의문이 간다. 아무래도 전대의 공정에 하자가 있었던지 아니면 증대 등의 변형이 있었던지 어떤 연유가 있었을 것이다.

군수 윤봉오는 중창한 누사(樓榭)에 서세루(瑞世樓 : 현재 배면에 현판되어 있음)라 편액하고 내문(內門)을 남덕문(覽德門), 외문(外門)을 곤구문(崑邱門)이라 하였다.

이 후 영조 38년(1763), 정조 21년(1797), 순조 10년(1810), 고종 7년(1870), 고종 23년(1886)과 1921년에 각각 중수하였다고 전한다.

1920년대에 이르러 일본인들이 영천 심상소학교를 지을 때 누사의 내외문을 비롯한 건축물을 철거하여 지금과 같이 위축되고 말았다.

당시 조사자는, 본 건물은 조선조 중기 이후의 누사로서는 단아(端雅)하다. 금호강의 경관과 어울려 영천의 면모처럼 보인다. 만일 이 건물이 철거된다면 그 썰렁함에 영천 주민들은 안타까울 것으로 짐작되므로 생존 조치를 취하고 문화재로 지정보호 해야 한다는 의견을 보였다.

 

朝陽閣詩文集․23

鄭夢周 정몽주(1337~1392) 고려 말기 문신․학자, 자는 달가(達可), 호는 포은(圃隱), 시호는 문충(文忠), 본관은 영일(迎日), 영천 임고면 우항리 출생이다. 1360년 문과에 급제하여 예문관의 검열을 시작으로 수문하시중에 이르렀으며, 선죽교에서 피살당하였다. 후에 성리학의 조종(祖宗)으로 추앙받고, 충효의 사표(師表)로 불리웠으며, 문묘(文廟)와 영천의 임고서원(臨皐書院)을 비롯하여 많은 원사(院祠)에 모셔져 제향되고 있다.

淸溪石壁抱州回 청계석벽포주회

更起新樓眼豁開 갱기신루안활개

南畝黃雲知歲熟 남묘황운지세숙

西山爽氣覺朝來 서산상기각조래

風流太守二千石 풍류태수이천석

邂逅故人三百盃 해후고인삼백배

直欲夜深吹玉笛 직욕야심취옥적

高攀明月共徘徊 고반명월공배회

맑은 시내 돌벼랑은 고을을 안고 도는데

다시금 새 누각 이룩하니 눈이 활짝 트이네

남쪽이랑 누른 벼는 풍년이 왔음을 알리고

서산의 서늘한 기운은 아침이 되었음을 깨닫네

풍류를 좋아하는 태수(군수)는 녹봉이 이천석인데

옛 벗을 우연히 만났으니 술이 삼백 잔이라

곧바로 밤이 깊어 옥피리를 불면서

밝은 달 높이 휘어 잡아 함께 배회하고자 하네

朝陽閣詩文集․25

李容 이용(?~?) 1368년부터 1370년까지 영주(永州 : 현 永川) 부사(副使)를 역임하였으며, 명원루(明遠樓 : 朝陽閣의 前身)를 창건하였다.

新樓突兀鳥飛回 신루돌올조비회

懷抱登臨得好開 회포등림득호개

異縣故人難再會 이현고인난재회

今年此日不重來 금년차일부중래

溪虛水影撓歌扇 계허수영요가선

山近秋光落酒盃 산근추광락주배

五斗二年成底事 오두이년성저사

更堪千里獨徘徊 갱감천리독배회

새 누각이 우뚝 솟으니 새는 날아 돌아오고

포부를 품고 올라오니 가슴이 활짝 트이네

다른 고을 옛 벗은 다시 만나기 어렵고

금년의 이날은 거듭 오지 아니하네

시내가 맑으니 물 그림자에 가선(노래하는 무희의 부채)이 흔들리고

산이 가까우니 가을빛이 술잔에 떨어지네

고을살이 이년만에 무슨 일을 이루었나

다시 어찌 견디랴? 고향 떠나 천리 밖에서 홀로 배회하네

24․詩 篇

鄭夢周 정몽주(1337~1392) 고려 말기 문신․학자, 자는 달가(達可), 호는 포은(圃隱), 시호는 문충(文忠), 본관은 영일(迎日), 영천 임고면 우항리 출생이다. 1360년 문과에 급제하여 예문관의 검열을 시작으로 수문하시중에 이르렀으며, 선죽교에서 피살당하였다. 후에 성리학의 조종(祖宗)으로 추앙받고, 충효의 사표(師表)로 불리웠으며, 문묘(文廟)와 영천의 임고서원(臨皐書院)을 비롯하여 많은 원사(院祠)에 모셔져 제향되고 있다.

板上留名今的的 판상유명금적적

樓前流水亦悠悠 루전류수역유유

此生重面固難事 차생중면고난사

獨伴沙鷗又再遊 독반사구우재유

현판 위에 남긴 이름 지금도 선명한데

누 앞에 흐르는 물 또한 끊임없이 흘러가네

내 생애에 다시 오기는 진실로 어려운 일

홀로 갈매기 벗을 삼아 또 다시 놀리라

26․詩 篇

崔元祐 최원우(?~?) 1347년 박광후(朴光厚)와 더불어 서해도에 파견되어 민전(民田)을 조사하고 안렴존무사가 되었다. 1365년 감찰, 집의를 역임하고 1366년 정해(貞海 : 지금의 海美) 감무로 좌천되었다.

登臨日日却忘回 등림일일각망회

傍眼奇觀次第開 방안기관차제개

何處瑤岑雲外出 하처요잠운외출

有時飛雨野邊來 유시비우야변래

晩凉倚柱風生帽 만량의주풍생모

夜靜吹簫月滿盃 야정취소월만배

流水亦知人愛着 유수역지인애착

樓前直到故徘徊 루전직도고배회

누각에 올라 노는 날마다 도리어 돌아가기를 잊었노라

눈 곁에 기이한 광경이 차례로 펼쳐지네

어느 곳에 옥 같은 산 봉오리 구름밖에 솟았느냐?

때때로 흩날리는 비 들 가로 모여드네

석양의 서늘함에 기동에 기대니 바람은 모자에서 일고

밤이 고요함에 퉁소를 부니 달은 술잔에 가득하네

흐르는 물도 또한 사람의 애착하는 마음을 알아

누 앞에 직도하여 일부러 돌고 도네

朝陽閣詩文集․27

咸傅霖 함부림(1360~1410) 고려 말 조선 초 문신, 자는 윤물(潤物), 호는 난계(蘭溪), 시호는 정평(定平), 본관은 강릉(江陵)이다. 1385년 문과에 급제, 예문검열을 거쳐 1389년 우헌납이 되었으나, 탄핵을 받고 지춘주사(知春州事)에 좌천되었다가 후에 형조정랑이 되었다.

上樓終日不知回 상루종일부지회

襟韻平生獨好開 금운평생독호개

野草如烟隨地有 야초여연수지유

楊花似雪滿空來 양화사설만공래

感今懷古愁聞笛 감금회고수문적

對月臨風更引盃 대월림풍갱인배

南守功名差底疾 남수공명차저질

行裝未便尙徘徊 행장미편상배회

누각에 올라 하루가 저물도록 돌아갈 줄 모르고

평생에 흉중에 생각했던 마음 홀로 좋게 틔이네

들풀은 연기 같이 땅에 깔려 있는데

버들 꽃은 눈 같이 하늘 가득 날려오네

지금에 감동하고 옛날 생각하며 근심스레 피리소리를 듣고

달을 보고 바람 쐬며 다시 술잔을 잡네

남으로와 수령하는 공명에 파견령(派遣令)이 어찌 빨라

떠나려도 행장이 되지 않아 아직도 서성거리네

28․詩 篇

柳方善 유방선(1388~1443) 조선 초기 학자. 자는 자계(子繼), 호는 태재(泰齋), 본관은 서산(瑞山)으로 일찍부터 권근(權近)․변계량(卞季良)의 문하에서 배웠다. 1405년 사마시에 합격하였으나 1409년 아버지가 민무구의 옥사에 연루됨에 따라 그도 청주․영천 등에서 유배 생활을 하였으며, 영천 송곡서원(松谷書院)에 봉안되었다. 저서로 『태재집』이 남아있다.

百尺高樓愜所聞 백척고루협소문

登臨半日獨凭軒 등림반일독빙헌

數年漂泊長爲客 수년표박장위객

萬里歸來尙戀君 만리귀래상련군

濃翠靄空芳草野 농취애공방초야

暗香浮地落花村 암향부지락화촌

題詩欲記才華薄 제시욕기재화박

苦恨當時不學文 고한당시불학문

백 척 높은 누각 듣던 대로 마음에 합당하여

올라 놀던 반나절에 홀로 헌함에 기대었네

수년동안 떠돌아 다녀 길이 나그네 되어

만리 길을 돌아와서 아직 임을 그리네

짙푸른 아지랑이가 낀 하늘에 방초 우거진 들이오

그윽한 향기 땅에 서리고 꽃이 지는 마을이네

시를 지어 쓰고자 하나 빛나는 재주가 없으니

젊을 당시에 글을 배우지 못했음을 몹시 한하네

朝陽閣詩文集․29

徐居正 서거정(1420~1488) 조선 초기 문신․학자. 자는 강중(剛中), 초자는 자원(子元), 호는 사가정(四佳亭)․정정정(亭亭亭), 시호는 문충(文忠), 본관은 달성(達城)이며 권근(權近)의 외손이다. 1444년 식년문과에 급제, 사재감직장을 시작으로 여섯 왕을 섬겨 45년간 조정에 봉사하며 달성군(達城君)에 봉하여졌다. 저술로 『역대연표』 『태평한화골계전(太平閑話滑稽傳)』 『필원잡기』 『동인시문(東人詩文)』 등이 있고, 대구의 구암서원(龜巖書院)에 제향되었다.

白雲黃鶴幾時回 백운황학기시회

二水三山次第開 이수삼산차제개

崔灝風流人不見 최호풍류인불견

謫仙才調客重來 적선재조객중래

登臨千古復千古 등림천고부천고

離別一盃又一盃 이별일배우일배

爲被主人苦挽袖 위피주인고만수

朱欄徙倚醉徘徊 주란사의취배회

백운과 황학이 몇 번이나 돌아왔던고

이수와 삼산이 차례로 열렸네

최호같은 풍류객은 볼 수 없지만

적선 같은 재주 있는 시객은 다시 왔다네

올라서 노는 사람 천고에 천고를 거듭하고

이별하는 술잔은 한잔에 또 한잔이로다

주인이 굳이 내 소매를 당기고 만류하였으므로

붉은 난간에 서성거리며 술에 취해 배회하네

朝陽閣詩文集․31

金宗直 김종직(1431~1492) 조선 전기 문신. 자는 효관․계온, 호는 점필재, 시호는 문충(文忠), 본관은 선산(善山)이다. 고려 말 정몽주(鄭夢周)․길재(吉再)의 학풍을 이은 아버지 김숙자에게 수학, 절의를 중요시하여 도학(道學)의 정맥을 이어가는 중추적인 역할을 하였다. 저서로는 『점필재집』 『청구풍아(靑丘風雅)』 『당후일기(堂後日記)』 등과 편저로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등이 있다.

元戎新向辰韓回 원융신향진한회

幕客愁懷到處開 막객수회도처개

臨皐飽聞山川好 임고포문산천호

春色遙隨旌旆來 춘색요수정패래

閒霑小雨蘼蕪渚 한점소우미무저

獨把高樓鸚鵡盃 독파고루앵무배

更待使君吟畵戟 갱대사군음화극

欄干終日共徘徊 난간종일공배회

원수(元帥)가 새로이 진한을 향하여 돌아오니

막객(원수를 보좌하는 참모)의 울적한 회포 가는 곳마다 풀리네

임고는 산천경치가 좋다고 익히 들었더니

봄빛이 멀리 깃발 따라 펼쳐지네

조금 내리는 비 궁궁이 싹이 돋는 물가 한가로이 적시는데

높은 누각에 앵무조개로 만든 술잔을 홀로 잡았네

다시 사또님의 행차를 기다려서

난간에서 날이 다하도록 함께 배회하네

40․詩 篇

權容 권용(1509~1558) 조선시대의 문신. 자는 공택(公擇), 호는 기재(奇齋). 본관은 안동(安東)이다. 1552년 영천군수를 역임하고, 1544년 별시문과(別試文科)에 갑과(甲科)로 장원급제, 1545년 이래 부수찬(副修撰)․수찬(修撰)․부교리(副校理)를 지냈다. 52년 홍문관부교리로서 경연시강관(經筵侍講官)을 겸직하며 춘추관 기주관(春秋館記注官)으로 『중종실록(中宗實錄)』 편찬에 참여하고 1557년 직제학(直提學)에 올랐다.

川從母子遠縈回 천종모자원영회

樓向蓬瀛向日開 누향봉영향일개

楚客愁邊明月照 초객수변명월조

虞民樂處慶雲來 우민락처경운래

登玆幾費仲宣賦 등자기비중선부

對此須傾太白盃 대차수경태백배

圃隱舊居詩在壁 포은구거시재벽

長郊東望重徘徊 장교동망중배회

냇물은 모자산으로 부터 멀리 구비쳐 돌아오는데

누각은 봉래산 영주산 그리고 해를 향하여 열렸네

초나라 손님 시름하는 곳에 밝은 달 비치고

순임금 백성이 즐기는 곳에 경사로운 구름이 떠오네

여기에 올라 중선루의 부를 읊는데 얼마나 시간을 허비했나

이 달을 대하여 모름지기 이태백의 술잔을 기울이네

포은 선생의 옛 거처에 시는 벽에 결려있고

동으로 긴 들을 바라보며 거듭 배회하네

34․詩 篇

辛永禧 신영희(1454~1511) 조선 중기 학자. 자는 덕우(德優), 호는 안정(安亭), 본관은 영산(靈山)이다.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으로 1483년 사마시에 합격하였으나 화가 있을 것을 예견한 김굉필의 충고를 받아들여 벼슬을 단념하고 직산(稷山)에 은둔하며 죽림의 학자들과 사귀면서 학문에 정진하였다. 학덕과 문장실력으로 학자들로부터 존경을 받았고, 저서로는 『사우언행록(師友言行錄)』과 시문이 실린 『안정실기(安亭實紀)』가 있다.

益陽鳴洛下 익양명락하

鬱鬱竹坊林 울울죽방림

猿鶴歸山僻 원학귀산벽

魚鰕喜水深 어하희수심

新亭城主興 신정성주흥

遺躅圃翁吟 유촉포옹음

西望歌遊鳳 서망가유봉

翶翔若下臨 고상약하림

익양(영천)의 물이 울리며 흐르는 아래에

훌창한 것은 죽방의 숲이더라

잔나비와 학은 산 궁벽한 곳으로 돌아가고

물고기와 새우는 물 깊은 곳을 좋아하네

새 정자는 성주가 흥을 내는데

포은 선생의 읊은 자취가 남아 있네

서쪽을 바라보며 유봉산을 노래하니

봉황새 날아와서 내려앉는 것 같네

38․詩 篇

李荇 이행(1478~1534) 자는 택지(擇之), 호는 어택(漁澤)․어수(漁叟)․용재(容齋)이며 본관은 덕수(德水)이다. 1495년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시화에 능하였다.

蕭蕭白髮照淸秋 소소백발조청추

徙倚元龍百尺樓 사의원룡백척루

最是永州堪賞處 최시영주감상처

野邊煙霧鎖滄洲 야변연무쇄창주

쓸쓸한 백발에 맑은 가을빛이 비취는데

호기로운 원용이 백 척 누 가에 서성거리네

여기는 영천에서 가장 구경할만한 곳이라

들녘의 연기와 안개가 창주를 가득 메웠네

42․詩 篇

李珥 이이(1536~1584) 조선 중기 학자․정치가. 자는 숙헌(叔獻), 호는 율곡(栗谷)․석담(石潭), 시호는 문성(文成), 본관은 덕수(德水)이며 강원도 강릉(江陵) 출생. 1548년 13세로 진사시에 합격을 시작으로 전후 9번의 과거에 모두 장원하였으며, 이황과 더불어 유학의 쌍벽을 이루는 학자로 기호학파(畿湖學派)의 연원을 열었다. 선조의 묘정(廟庭)과 문묘에 배향되었고, 파주의 자운서원 등 전국 20여 개의 서원에 봉안되었다. 저서에 『율곡전서(栗谷全書)』가 있다.

白雲黃鶴幾千秋 백운황학기천추

爲愛靑山不下樓 위애청산불하루

吏退庭空無一事 이퇴정공무일사

夕陽鷗鷺下汀洲 석양구로하정주

백운과 황학이 깃든 지 몇 천 년이 되었던고

청산을 사랑하여 누각에서 내리지 못하네

아전을 물러가고 뜰은 비어 할 일이 없는데

석양에 갈매기와 백로는 정주에 내려가네

朝陽閣詩文集․41

鄭惟吉 정유길(1515~1588) 조선 중기 문신. 자는 길원(吉元), 호는 임당(林塘), 본관은 동래(東萊)이다. 1531년 사마시를 거쳐 1538년 별시문과에 급제, 곧 정언에 올랐다. 그 뒤 공조좌랑․중추부도사 등을 지냈으며 1544년 이황(李滉)․김인후(金麟厚) 등과 함께 사가독서(賜暇讀書)하였다. 능란한 시문과 탁월한 대인관계로 이름이 높았으며, 서예에도 능하여 임당체(林塘體)로 일컬어졌다. 저서로는 『임당유고』가 있다.

明遠樓前屬晩晴 명원루전속만청

淸凉堂裏偃行旌 청량당리언행정

天空塞雁寒無侶 천공새안한무려

人靜風灘夜有聲 인정풍탄야유성

老去浮萍從萬里 로거부평종만리

秋來明月轉三更 추래명월전삼경

行藏欲向君平問 행장욕향군평문

惆悵危欄獨倚情 추창위란독의정

명원루 앞에 저물게 날이 개였는데

청량당 안에서 여장을 풀었네

하늘은 비어 변방에 오는 기러기 추워서 짝이 없고

인적은 고요한데 바람결에 여울은 밤들어 소리나네

늙어 가는 인생 부평같이 만 리 길을 쫓으니

가을이라 밝은 달은 삼경에 더욱 밝네

나아가고 물러남을 군평에 묻고자 하여

비통하다 높은 난간에 홀로 기대고 있는 내 심정이여

朝陽閣詩文集․51

具鳳瑞 구봉서(1597~1644) 조선 중기 문신. 자는 경휘(景輝), 호는 낙주(洛洲), 본관은 능성(綾城)이다. 권필에게 시(詩)를 배웠다. 1617년 생원시(生員試)를 거쳐 1624년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승문원(承文院)에 등용된 뒤 검열(檢閱)을 지냈다.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고 참의(參議)․승지(承旨)․전라도관찰사 등을 역임, 병자호란(丙子胡亂) 후 평안도관찰사가 되었다. 저서에 『선원강도록(仙源江都錄)』 『정축록(丁丑錄)』 등이 있다.

平郊物色雨新晴 평교물색우신청

古國江山住客旌 고국강산주객정

宮柳亂蟬催暮景 궁류난선최모경

塞城回雁送秋聲 새성회안송추성

日邊歸路元千里 일변귀로원천리

醉後橫參已五更 취후횡삼이오경

多少樓臺興廢裏 다소루대흥폐리

檻前流水亦傷情 함전류수역상정

평평한 들녘 경치에 비가 처음 개었는데

고국 강산에는 나그네의 깃발이 멈추었네

집 가 버들에는 요란한 매미소리 석양을 재촉하고

변방 성에서 돌아오는 기러기 가을소리를 보내오네

날은 졌는데 돌아갈 길은 천리나 되고

취한 뒤에 삼성이 비끼니 밤은 이미 오경이네

많고 적은 누대가 흥하고 폐하는 속에

헌함 앞에 흐르는 물은 또한 정을 상하게 하네

46․詩 篇

李安訥 이안눌(1571~1637) 조선 중기 문신․시인. 자는 자민(子敏), 호는 동악(東岳), 시호는 문혜(文惠), 본관은 덕수(德水)이다. 1599년 문과에 급제하고 예조․이조 정랑을 지내고, 1601년 서장관으로 명(明)나라에 다녀온 뒤 성균관 직강 겸 봉조하(奉朝賀)가 되었다. 담양(潭陽)의 구산서원과 면천(沔川)의 향사에 배향되었다. 저서에 『동악집』이 있다.

海天霜落塞鴻回 해천상락새홍회

節近重陽細菊開 절근중양세국개

高閣凌雲山勢斷 고각능운산세단

長沙畫野水聲來 장사획야수성래

二年南國身千里 이년남국신천리

萬事西風酒一盃 만사서풍주일배

目極鳳城何處是 목극봉성하처시

半峰斜日獨徘徊 반봉사일독배회

바다와 하늘에 서리 내리니 변방의 기러기 돌아오는데

절계는 중양이 다가오니 실국화 피어나네

높은 누각은 구름 위에 솟았고 산의 형세 가파르고

긴 사장은 들을 가로지르니 물소리 들려 오네

이년을 남국에 머물렀으니 몸은 고향 떠나 천리 밖이고

만사는 가을바람에 맡기고 술 한 잔을 드노라

눈길을 다하여 바라보니 서울은 어느 곳인고

기우는 해가 반쯤 산에 걸렸음에 홀로 배회하네

48․詩 篇

尹順之 윤순지(1591~1666) 자는 낙천(樂天), 호는 행명(涬溟), 본관은 해평(海平). 종조(從祖) 윤근수(尹根壽)에게 사사. 형조참의 때 통신사로 일본에 다녀왔으며, 선조의 수정실록 편찬에 참여하고 벼슬은 대제학, 공조판서에 이르렀다.

野桃纔落鷰初回 야도재락연초회

江閣迢迢傍晩開 강각초초방만개

遷樹乍看黃鳥出 천수사간황조출

捲簾時許白雲來 권렴시허백운래

沙邊芳草供詩料 사변방초공시료

波底流霞入酒盃 파저류하입주배

未向名區酬宿債 미향명구수숙채

暫停征旆爲遲徊 잠정정패위지회

들 복숭아 꽃 겨우 떨어지자 제비 처음 돌아오고

강가의 누각은 우뚝하게 강 곁에 석양빛에 열렸네

숲을 옮겨 잠시 꾀꼬리 나오는 것을 보겠고

주렴을 걷어 때때로 흰 구름 들어오는 것을 허락하네

모래밭 가의 꽃다운 풀은 시 재료를 제공하고

물밑에 흐르는 놀 술잔에 비춰 들어오네

이름난 땅에 묵은 빚을 갚고 떠나지 못해

잠깐 가는 깃발 멈추고 느릿느릿 머뭇거리네

朝陽閣詩文集․47

李敏求 이민구(1589~1670) 조선 중기 문신. 자는 자시(子時), 호는 동주(東洲)․관해(觀海). 본관은 전주(全州). 1612년 증광문과에 급제하여 수찬․지평․교리․응교 등을 지냈다. 병자호란 때 강도검찰부사(江都檢察副使)로서 왕을 강화에 모시지 못하여 아산(牙山)에 유배되었다가 1649년 풀려나 부제학․대사성․도승지 등을 지냈다. 저서로는 『동주집』 『독사수필(讀史隨筆)』 『간언귀감(諫言龜鑑)』 등이 있다.

臨皐院裏瓣香回 림고원리판향회

路入荒城積霧開 로입황성적무개

千里江山孤鳥沒 천리강산고조몰

百年宇宙幾人來 백년우주기인래

逢場且撤楊朱泣 봉장차철양주읍

命酒仍傾太白盃 명주잉경태백배

醉後紗籠生慷慨 취후사롱생강개

只今明月獨徘徊 지금명월독배회

임고서원에 분향하고 돌아오는데

길이 황성에 다다르니 쌓인 안개 개이누나

천 리 강산에 외로운 새 간 곳 없고

백년 세계에는 몇 사람이나 왔던고

만나는 자리에 갈라지는 슬픔은 아예 말고

술을 불러 이백의 풍류나 즐겨보세

취한 뒤 밤이 되니 강개가 살아나

다만 오늘밤에 밝은 달 아래 홀로 배회하네.

52․詩 篇

崔孝騫 최효건(1608~1671) 자는 성허(聖許), 호는 하산(何山), 본관은 수원(水原)이다. 1644년(인조 22)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부사(府使)에 이르렀다. 1667년 영천군수를 역임하였다.

朝陽高閣碧流回 조양고각벽류회

百里潺潺洞壑開 백리잔잔동학개

白鳥在前還在後 백조재전환재후

靑山如去又如來 청산여거우여래

秋聲半落天邊雁 추성반락천변안

人影相酬月下盃 인영상수월하배

瞻望故園無羽翰 첨망고원무우한

夜深虛舘獨徘徊 야심허관독배회

조양의 높은 누각이 푸른 강에 돌렸는데

백 리의 잔잔한 물줄기에 깊은 골이 열렸네

백조는 앞에 있다가 도로 뒤에 있고

청산은 가는 듯 하다가 또 오는 듯 하네

가을 소리는 하늘가 기러기 소리에 반쯤 떨어지고

사람 그림자는 달 밑에서 술잔을 서로 주고 받도다

고향을 바라봐도 날아갈 날개 없음에

밤이 깊은 빈집에서 홀로 서성거리네

56․詩 篇

金殷礪 김은려(?~?)

天南江榭夢頻回 천남강사몽빈회

雪霽朝陽眼始開 설제조양안시개

眠月鴟應幽澗伏 면월치응유간복

捿篁鳳亦潁川來 서황봉역영천래

靑蓮仙氣三山筆 청련선기삼산필

圃老風流萬古盃 포로풍류만고배

緱嶺驂鶴歸不返 구령참학귀불반

白雲何意自徘徊 백운하의자배회

하늘 남쪽 강 정자 꿈에 자주 보이더니

눈 개인 조양각에서 눈이 비로소 뜨이네

달 아래 잠든 올빼미는 깊은 시내로 숨고

대숲에 깃들인 봉황도 또 영천으로 오네

이백의 신선기상은 삼산반락(三山半落)의 글 솜씨요

포은 선생의 풍류는 만고의 술잔이네

구령에 학을 탄 사람 가고 아니 오는데

흰 구름 무슨 뜻으로 스스로 돌고 도느냐?

朝陽閣詩文集․57

金殷礪 김은려(?~?)

明月朝陽閣 명월조양각

淸吹碧玉簫 청취벽옥소

曲終鳳飛去 곡종봉비거

雪竹自簫簫 설죽자소소

밝은 달밤 조양각에서

옥퉁소 맑게 부네

곡조를 마치자 봉황은 날아가고

눈 속에 대나무만 절로 쓸쓸하구나

朝陽閣詩文集․45

曺友仁 조우인(1561~1625)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여익(汝益), 호는 매호(梅湖)․이재(蓬齋) 본관은 창녕(昌寧)이며, 예천 출생이다. 1588년(선조 21)에 사마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고, 1605년에 문과에 급제하고 1621년에는 제술관(製述官)으로 있으면서 광해군의 잘못을 풍자하였다가 3년간 옥고를 치르고 인조의 등극으로 풀려나 상주(尙州)의 매호에서 은거하며 여생을 마쳤다.

澄江木落鴈初回 징강목락안초회

愁眼遙因遠眺開 수안요인원조개

煙景助詩酬宿債 연경조시수숙채

湖山迎客喜重來 호산영객희중래

霜添旅髮慵看鏡 상첨여발용간경

醉博歡悰惜放盃 취박환종석방배

撫把吳鉤歌一曲 무파오구가일곡

起攀南斗步遲徊 기반남두보지회

맑은 강에 나뭇잎 떨어지고 기러기 처음 돌아오는데

시름에 찬 눈으로 멀리 바라보니 눈이 뜨이네

봄 경치는 시흥을 도와 옛 빛을 갚고

강과 산은 손님을 맞이하니 기쁨이 거듭 오네

나그네 머리에 서리가 더하니 거울보기를 게을리 하고

즐거운 마음에 취기가 도니 술잔 놓기 애석하도다

칼을 어루만지며 한 곡조 노래부르며

일어나 남두성 휘어잡고 느린 거름으로 배회하네

朝陽閣詩文集․59

鄭觀河 정관하(1685~1757) 본관은 영일이며, 송강 정철의 6세손으로 1738년부터 1739년까지 영천군수를 역임하고, 1747년(영조 6)에 성주목사를 역임하였다.

浮天壯勢鳳飛回 부천장세봉비회

千古危樓這裏開 천고위루저리개

翰墨昔多豪士過 한묵석다호사과

湖山今得主人來 호산금득주인래

碧空寥亮桓伊笛 벽공요량환이적

白髮酩酊杜子盃 백발명정두자배

此亦君恩先祖語 차역군은선조어

百年相感獨徘徊 백년상감독배회

하늘에 뜬 장한 형세에 봉이 날아 돌아오니

천고에 높은 누각 그 속에 열렸네

시인 묵객이 옛날에 많았으니 호걸 선비 지나갔고

강과 산은 이제야 얻었으니 주인이 왔네

푸른 하늘엔 환이의 피리소리가 은은하고

백발이 되어 두보의 술잔에 몹시 취했네

이 또한 임금의 은덕이라 하시던 선조의 말씀

오랜 세월 동안 감모하여 홀로 배회하네

朝陽閣詩文集․65

鄭夏彦 정하언(1702~1769) 조선 후기 문신. 자는 미중(美仲), 호는 지당(止堂)․옥호자(玉壺子), 본관은 연일(延日)이다. 1735년(영조 11) 증광문과에 급제하여 경상도도사, 1743년 사관(史官) 등을 지내다가 이듬해 찬집랑(纂輯郎)으로 《속대전(續大典)》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그 뒤 의주부윤(義州府尹)․좌부승지․병조참의를 거쳐 대사간에 이르렀다. 어제(御製)의 편제(篇題)와 홍화문(弘化門)의 편액(扁額)을 썼으며, 저서로 『지당집』이 있다.

簾旌闃靜鷰初回 염정격정연초회

懷抱凭高聊暫開 회포빙고요잠개

原陸莽蒼樓逈出 원륙망창루형출

關河迢遞客歸來 관하초체객귀래

不妨遲日停行靶 불방지일정행파

未易殊方有此盃 미이수방유차배

最是淸流欄下瀉 최시청류란하사

共和雲影更徘徊 공화운영갱배회

주렴과 깃발 고요한데 제비 처음 돌아오니

회포는 높은데 기대어 잠시 풀어 보노라

언덕과 들판은 끝없이 넓은데 누각은 높이 솟았고

산과 강은 멀고먼데 손님이 돌아오네

봄날에 가는 고삐 멈춤을 방해하지 말라

낯선 지방에서 이 술잔 잡기는 쉽지 않으리

가장 좋기는 맑은 물 난간 앞에 쏟아짐이라

구름그림자를 함께 보면서 다시 배회하네

朝陽閣詩文集․63

尹鳳五 윤봉오(1688~1769) 자는 계장(季章), 호는 석문(石門), 시호는 숙간(肅簡), 관은 파평(坡平), 정시문과에 급제하여 판돈령부사에 이름, 시호는 숙간(肅簡)이다. 글씨가 능하며 1740년부터 1744년까지 영천군수로 재임하면서 서세루와 임고서원 편액을 썼다.

晴川一道抱樓回 청천일도포루회

徙倚風煙萬里開 사의풍연만리개

厓有桐生朝日處 애유동생조일처

山如鳳翥碧窓來 산여봉저벽창래

圃翁百載驚人句 포옹백재경인구

太守千樽痛飮盃 태수천준통음배

聽罷陶辭還起望 청파도사환기망

歸雲天際影徘徊 귀운천제영배회

맑은 시내 한줄기가 누각을 안고 도는데

서성거리는 경치가 먼 데까지 트였네

언덕에 오동나무 나서 아침해 비치는 곳에

산은 봉새가 나는 듯이 푸른 창에 다가오네

포은 선생은 백세 후에 사람을 놀라게 한 글귀를 지었고

태수는 천 두루미 술을 마음껏 잔 질 했네

도잠(연명)의 귀거래사 다 듣고 일어나 바라보니

돌아가는 구름 하늘가에 그림자가 배회하네

66․詩 篇

金尙星 김상성(1703~1755) 조선 중기 문신. 자는 사정(士精), 호는 도계(陶溪)․손곡(損谷), 시호는 문헌(文憲), 본관은 강릉(江陵)이다. 6살 때 글을 지었고, 13살 때 영평(永平)의 「금수정기(金水亭記)」를 썼으며 신동(神童)이라는 평을 들었다. 1723년 문과에 급제하여 제학을 거쳐 이조판서에 이르렀다. 문장에 능하였고, 특히 소장(疏章)을 잘 지어 당대 조정에서 으뜸이라 하였다.

樓臺活動野縈回 누대활동야영회

官柳中間眼忽開 관류중간안홀개

芳草却憐黃鶴去 방초각련황학거

晴沙猶見白鷗來 청사유견백구래

江山不老凌雲筆 강산불로능운필

宇宙長留問月盃 우주장류문월배

怊悵賢豪今寂寞 초창현호금적막

欄干四角更徘徊 난간사각갱배회

누대는 살아 움직이듯 들판에 들렸는데

관아의 버들이 가운데 있어 눈이 활짝 트이네

꽃다운 풀이 도리어 가련하도다 황학은 가버리고

맑은 모래밭에 오히려 백구가 오는 것을 보겠네

강산은 늙지 않아 구름을 찌를 문필이 나고

우주가 길이 머무니 달을 향하여 잔 질 하네

슬프도다 현인 호걸이 이제는 적막하니

난간의 네 모퉁이를 다시 돌고 도네

64․詩 篇

尹得聖 윤득성(1699~?) 자는 군경(君敬), 호는 향서(香西), 본관은 해평(海平)이다. 1769년 정시문과 갑과로 등과하여, 1762년부터 1764년까지 영천군수를 역임하였다.

春色三番癸未回 춘색삼번계미회

當時征旆此樓開 당시정패차루개

珠沈積水龍無語 주침적수용무어

彩閟丹山鳳不來 채비단산봉불래

喬木餘庥三尺綬 교목여휴삼척수

仙槎遺跡一泓盃 선사유적일홍배

刊詩此日無窮意 간시차일무궁의

紅袖紗籠永徘徊 홍수사롱영배회

봄빛은 세 번이나 계미년이 돌아왔는데

당시에 가던 깃발 이 누각 열었도다

구슬이 쌓인 물에 잠겼는데 용은 말이 없고

채색이 단산에서 없어졌으니 봉새는 오지 않네

교목 세가의 남은 은덕은 석자의 인끈이오

신선의 뗏목 끼친 자취는 한 개의 깊은 술잔이로다

시를 새기는 오늘에 끝없는 뜻을

붉은 소매 비단 초롱에 길이 배회하네

朝陽閣詩文集․81

尹益烈 윤익렬(1752~?) 자는 가우(可友), 호는 송서(松西), 본관은 해평(海平)이다. 1792년 문과에 급제하여 통정대부로 1804년부터 1895년 경주부윤을 역임하였다. 영천군수 윤득성의 손자이다.

朝陽八百路重回 조양팔백로중회

二水三山慣眼開 이수삼산관안개

此地何年騎竹戱 차지하년기죽희

隣州今日佩符來 인주금일패부래

瞻楣敬閱傳家什 첨미경열전가집

倚檻頻斟話舊杯 의함빈짐화구배

桑宿餘緣從可續 상숙여연종가속

江樓聽篴更遲回 강루청적갱지회

조양각 팔백 리 길을 다시 돌아오니

이수삼산이 눈에 익어 열렸네

이 땅 어느 해에 죽마 타고 놀았던가

오늘날 이웃 골에 병부 차고 왔노라

처마를 보고 가정에 전한 시가를 공경히 열람하면서

헌함에 의지하여 옛날을 이야기하며 술잔을 드네

남에게 신세진 인연을 이을만 하니

강루의 피리소리 들으며 다시금 더디 도네

朝陽閣詩文集․67

尹東度 윤동도(1707~1768) 조선 후기 문신. 자는 경중(敬仲), 호는 남애(南厓)․유당(柳塘), 시호는 정문(靖文), 본관은 파평(坡平)이다. 1744년 진사가 되었고, 1745년 해주판관으로 정시문과(庭試文科) 을과로 급제, 사서․헌납․부교리․수찬을 지냈으며 1761년 우의정, 좌의정을 거쳐 1766년 영의정이 되었으며, 1768년 영중추부사를 지냈다.

玉山幽賞晩吟回 옥산유상만음회

更得朝陽眼忽開 갱득조양안홀개

平峀聯屛雲共繞 평수련병운공요

遠川流壁月俱來 원천류벽월구래

風煙色活懸楣板 풍연색활현미판

節序香深泛菊盃 절서향심범국배

入夜窓楹生灝氣 입야창영생호기

神淸不寐起徘徊 신청불매기배회

옥산서원을 조용히 감상하고 늦도록 읊고 돌아와서

다시 조양각에 오르니 눈이 활짝 트이네

평평한 산은 병풍을 두른 듯 구름과 함께 돌렸고

먼데서온 시내는 절벽에 부딛혀 달과 함께 다가오네

풍광은 빛이 살아서 현판에 달려있고

절기는 향기가 깊어 국화술잔에 뜨네

밤이 되어 창문에 맑은 공기 서리는데

정신이 말똥하여 잠 못 이루고 일어나 배회하네

朝陽閣詩文集․69

李得宗 이득종(1718~?) 자는 성중(聖仲), 본관은 전주(全州)이며, 1746년(영조 22)에 알성시(謁聖試) 갑과(甲科)로 등과하여 어사를 역임했다.

平蕪一帶水縈回 평무일대수영회

官閣東頭眼忽開 관각동두안홀개

海國風埃人易老 해국풍애인이로

名樓月夜客重來 명루월야객중래

晴沙雨過聲留楹 청사우과성류영

古峀雲歸影倒盃 고수운귀영도배

圃老也應遊鳳降 포로야응유봉강

起瞻遺板更徘徊 기첨유판갱배회

초목이 우거진 평원에 한 띠 같은 시냇물이 돌고 도는데

관사의 동쪽 끝에 눈이 번쩍 뜨이네

바다에 쌓인 나라 바람 먼지에 사람은 늙기 쉽고

이름난 누각 달밤에 손님은 거듭 오네

깨끗한 모래밭에 비가 지나가니 소리는 집에 머무르고

옛 산에 구름이 돌아가니 그림자는 술잔에 꺼꾸러지네

포은 선생은 아마 봉새를 타고 내려왔을 것이다

일어나 남기신 현판 바라보며 다시 배회하네

朝陽閣詩文集․55

李重協 이중협(1681~?) 자는 화중(和仲), 호는 삼호(三湖), 본관은 경주(慶州)이다. 1713년(숙종 39)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煙沙漠漠鳥飛回 연사막막조비회

人在樓頭夕望開 인재루두석망개

斜日拖紅簾外盡 사일타홍염외진

亂山橫翠檻前來 난산횡취함전래

逢迎特地留征轄 봉영특지류정할

滌蕩覊愁有酒盃 척탕기수유주배

怊悵西方千里隔 초창서방천리격

獨攀星斗久徘徊 독반성두구배회

연기 낀 모래밭이 넓고 넓은데 새는 날아 돌아오고

사람은 누두에 앉아 석양을 바라보네

저녁볕은 붉은 놀 끌어당겨 주렴 밖에서 극에 달하고

높고 낮은 산 푸른 안개를 띠고 헌함 앞에 다가오네

좋은 곳에서 만나니 가는 수레 멈추고

나그네 설움 씻고자하여 술잔을 기울이네

슬프다 서울 길이 천리로 막혔으니

홀로 북두성을 휘잡아 오래도록 배회하네

朝陽閣詩文集․79

吳鼎源 오정원(?~?) 본관은 나주(羅州)이며, 통정대부로 1798년부터 1800년 경주부윤을 역임하였다.

忽疑千仞鳳飛回 홀의천인봉비회

朱棟翔空翠靄開 주동상공취애개

孤城樹色千家合 고성수색천가합

故國山容萬馬來 고국산용만마래

蓬萊渺渺空依斗 봉래묘묘공의두

鴻鷰茫茫獨把盃 홍연망망독파배

夜久超然無夢寐 야구초연무몽매

滿簾淸月與徘徊 만렴청월여배회

홀연히 천길 높은 곳에 봉이 날아 온 듯 하더니

붉은 용마루 하늘에 날아 푸른 아지랑이 끼었네

외로운 성 나무빛은 일천 집 어울렸는데

옛 나라 산 모습은 만 필의 말이 달려오는 같구나

봉래산은 아득한데 공연히 북두성에 의지해 보고

기러기 제비 소식 망망하니 홀로 술잔을 잡네

밤은 깊은데 초연하여 꿈도 잠도 못 이루고

주렴에 가득 비친 밝은 달이 나와함께 배회하네

80․詩 篇

吳翰源 오한원(1750~?) 자는 공예(公藝), 본관은 나주(羅州)이며, 1755년(영조 51)에 별시(別試) 병과(丙科)로 등과하였다.

淸蟬驛路彩旌回 청선역로채정회

碧樹秋生畵閣開 벽수추생화각개

城高急雨蒼蒼過 성고급우창창과

野濶羣山簇簇來 야활군산족족래

幾番雲樹嶽南夢 기번운수악남몽

獨對歌琴關外盃 독대가금관외배

勝地分留新物色 승지분류신물색

紗籠詠罷却遲徊 사롱영파각지회

매미소리 청량한 역마 길에 채색 깃발 돌아오니

푸른 나무에 가을이 들어 그림누각 열렸네

성이 높으니 급한 비는 갑작스레 지나가고

들이 넓으니 뭇 산은 빽빽하게 몰려오네

몇 번이나 구름과 나무를 보며 영남을 꿈꾸었던고

홀로 노래와 거문고를 대하여 관문 밖에서 술잔을 드네

승지에 새로운 물색을 나누어 머물게 했으니

사롱의 글 읊기를 마치고 천천히 배회하네

86․詩 篇

李尙度 이상도(?~?) 가선대부로 1800년부터 1802년까지 경주부윤을 역임하였다.

灘流低抱曲欄回 탄류저포곡란회

簾幕秋雲霽色開 렴막추운제색개

廣野平圓飛鳥盡 광야평원비조진

晴沙溶漾白鷗來 청사용양백구래

詩留碧海千峯月 시류벽해천봉월

夢入陽關一夜盃 몽입양관일야배

去路綠蕪連極目 거로록무련극목

征麾臨發更登徊 정휘림발갱등회

여울물이 나직이 굽은 난간 안고 도는데

발과 장막에 가을구름은 개인 빛이 열렸네

넓은들 평평하고 둥그름한데 나는 새는 다 없어지고

맑은 모래밭에 물이 출렁거리니 흰 갈매기 돌아오네

시는 푸른 바다 일천 봉오리 달빛에 머물고

꿈은 양관의 하룻밤 술잔에 들어오네

가는 길은 푸른 황무지 눈가는 데까지 이어지고 있는데

가는 깃발 출발함에 이르러 다시 올라 서성거리네

54․詩 篇

金洪福 김홍복(1649~1698) 자는 자회(子懷), 호는 동원(東園), 본관은 김해(金海)이다. 1682년(숙종 8)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午經山水萬千回 오경산수만천회

此倚危欄好抱開 차의위란호포개

長夜鴈拖秋色去 장야안타추색거

短橋人帶夕陽來 단교인대석양래

吟緣往跡催拈筆 음연왕적최념필

念係民憂懶把盃 염계민우라파배

二十年來渾似夢 이십년래혼사몽

不堪臨發重徘徊 불감림발중배회

낮에 지나온 산수가 천만 구비나 되는데

여기 높은 난간을 의지하니 가슴이 탁 트이네

긴긴 밤 기러기는 가을빛을 끌어당겨 날아가고

짧은 다리 사람들은 저녁 빛을 띠고 오도다

지난 자취 읊조리고자 붓을 서둘러 잡으니

백성들 근심하는 생각에 술잔 들기 어렵구나

이십 년 세월이 꿈만 같으니

떠나기 안타까운 마음에 다시 거닐어 보노라

朝陽閣詩文集․77

咸正禧 함정희(?~?) 자는 백형(伯亨), 본관은 강릉이다. 1797년 통우후(統虞候), 1805년 연일현감을 지냈다.

星霜四百自環回 성상사백자환회

無恙華扁日色開 무양화편일색개

神鬼秘慳三壽具 신귀비간삼수구

風波閱歷萬全來 풍파열력만전래

祗緣候館猶多務 지연후관유다무

未暇仙樓繼把盃 미가선루계파배

莊誦遺章瞻望久 장송유장첨망구

送分嶺月共徘徊 송분령월공배회

사 백 년 세월이 돌고 돌았는데

편액은 그대로 햇빛에 환히 걸려 있구나

귀신도 아껴주어 삼수를 갖추었기로

풍파를 겪었어도 온전히 지켜왔구나

다만 우후의 공사가 아직 바쁜 일이 많음을 인하여

신선이 놀던 누각에서 술잔 잡을 겨를이 없구나

삼가 남은 글을 외우고 오래도록 바라보며

재 넘어 간 달빛과 더불어 거닐어 보노라.

78․詩 篇

咸正禧 함정희(?~?) 자는 백형(伯亨), 본관은 강릉이다. 1797년 통우후(統虞候), 1805년 연일현감을 지냈다.

爲瞻扁額趂朝回 위첨편액진조회

海靄初晴曙旭開 해애초청서욱개

賢祖勝遊猶有債 현조승유유유채

殘孫弊袚又今來 잔손폐발우금래

花生畵閣曾揮筆 화생화각증휘필

月印騷仙舊把杯 월인소선구파배

捿屑添先徒感淚 서설첨선도감루

摩挲遺蹟久徘徊 마사유적구배회

편액을 보고자 아침에 돌아오니

바다안개 처음 개어 아침 햇빛 쪼이네

현조의 즐거웠던 놀이에 오히려 빚이 있어서

잔손의 해어진 인끈으로 또 다시 지금 왔도다

꽃이 그림누각에 피었으니 일찍 붓을 날렸던 자취요

달이 글 좋아하는 사람에 비침에 옛 술잔 잡았네

바쁨에 쫓기어 선조를 욕되게 하니 다만 감개의 눈물이라

기친 자취 어루만지며 오래도록 배회하네

朝陽閣詩文集․53

愼景尹 신경윤(1624~?) 자는 중임(仲任), 본관은 거창(居昌), 사과(司果)에서 1666년 별시 병과로 급제하여 동지중추부사를 지냈다.

重關復嶺鬱交回 중관복령울교회

忽有高樓眺望開 홀유고루조망개

天掛夕陽鴉背閃 천괘석양아배섬

人隨秋色雁前來 인수추색안전래

波聲激激斜欹枕 파성격격사의침

山影迢迢映把盃 산영초초영파배

千古名賢詩裏月 천고명현시리월

夜深簷角又徘徊 야심첨각우배회

구중 관문과 첩첩 산길이 얽혀 도는 곳에

높다란 누각이 눈앞에 홀연히 보이누나.

하늘은 저녁 빛을 까마귀 등위에 걸어두고

사람은 가을빛 따라 기러기 앞에 오누나.

물결 부딪치는 소리 베갯머리에 들려오고

저 멀리 산 그림자가 잡은 술잔 위에 비추도다.

옛 세상 명현의 시 속에 비친 달은

밤 깊은 처마 끝에 다시금 배회하는구나.

76․詩 篇

沈公著 심공저(?~?) 자는 경회(景晦), 호는 계동(桂東), 본관은 청송(靑松)이다. 1795년부터 1798년까지 영천군수를 역임하였다.

長川十里抱提回 장천십리포제회

大野千畦繞檻開 대야천규요함개

吾祖昔年停盖處 오조석년정개처

小孫今日佩符來 소손금일패부래

傷心先蹟詩留壁 상심선적시류벽

溢目民憂酒廢盃 일목민우주폐배

頗幸名樓能作主 파행명루능작주

簿書餘暇暫徘徊 부서여가잠배회

긴 시내 십리에 뻗어 둑을 안고 도는데

큰 들 일천 이랑이 헌함을 둘러 펼쳤네

우리 조선 옛날에 차를 멈추던 곳에

소손이 오늘날에 병부를 차고 왔네

마음이 아픈 것은 선조가 남긴 시 벽에 걸려있고

눈에 넘치는 것은 백성의 근심이라 술잔을 폐지했네

다행이 이름난 누각이 능히 주인이 되니

문서 보는 여가에 잠시 배회하노라

朝陽閣詩文集․87

沈象奎 심상규(1766~1838) 자는 치교(穉敎), 호는 두실(斗室), 본관은 청송(靑松)이다. 1789년(정조 13)에 문과에 급제하여 선서(善書)를 역임하였다.

一樓今古首頻回 일루금고수빈회

川影山光滿眼開 천영산광만안개

大父治聲名郡守 대부치성명군수

小孫謫宦薄遊來 소손적환박유래

典型塵壁瞻詩版 전형진벽첨시판

情話殊鄕足酒盃 정화수향족주배

更有長風吹上月 갱유장풍취상월

羈愁渾放共徘徊 기수혼방공배회

한 누각을 예나 지금이나 머리 자주 돌리는 것은

냇그림자 산 빛깔이 눈에 가득 펼쳤기 때문

할아버지 치성은 잠시 유명한 고을의 태수로 서고

소손은 적환으로 잠시 놀러왔도다

옛 모습은 먼지 묻은 벽 위에 시판이 있음을 보겠고

정다운 이야기는 다른 고향에서 술잔으로 족하네

다시금 긴 바람이 달을 불어 올리니

나그네 시름 모두 버리고 함께 돌고 도네

朝陽閣詩文集․49

沈東龜 심동구(1594~1660) 자는 문징(文徵), 호는 청봉(晴峯), 본관은 청송(靑松)이다. 1624년 증시문과 병과에 급제하여 교리 등을 역임하고, 서상관으로 심양에 다녀왔으며, 사간으로 있을 때 심기원의 옥사에 연좌되어 장흥에 유배되었다가 효종 초에 석방되었다.

天涯倦客出關回 천애권객출관회

爲上高樓望眼開 위상고루망안개

水自竹長檻外轉 수자죽장함외전

山從太白座中來 산종태백좌중래

經年薄宦空催老 경년박환공최로

盡日羈愁獨擧盃 진일기수독거배

只是斜陽無限好 지시사양무한호

還鄕行色却徘徊 환향행색각배회

아주 먼데서 온 게으른 손이 관문을 나와 돌아와서

높은 누각에 올라 바라보니 눈이 뜨이네

물은 죽장에서부터 흘러와 헌함 밖을 굴러 돌고

산은 태백으로 따라 내려와 좌중에 다가왔네

세월 보낸 박봉 벼슬아치는 공연히 늙음만 재촉하고

해가 다되도록 나그네 시름에 홀로 술잔 들었네

다만이 저물어 가는 햇빛이 한없이 좋아서

고향으로 돌아가는 행색이 도리어 머뭇거리네

88․詩 篇

李泰熙 이태희(1761~?) 본관은 경주(慶州)이며, 1789년 식년시 병과로 등과하였다.

麗水佳山重疊回 려수가산중첩회

晩吟遐賞好顔開 만음화상호안개

簾垂石壁雲長繞 렴수석벽운장요

門對沙場月早來 문대사장월조래

昨夜忽驚湖外夢 작야홀경호외몽

今朝獨把嶺南盃 금조독파영남배

幸因王事淸遊足 행인왕사청유족

終日欄頭獨自徊 종일란두독자회

맑은 물 아름다운 뫼가 겹겹이 둘러있어

늦도록 읊조리고 멀리 구경하고 얼굴을 환히 폈네

주렴은 석벽에 드리워 구름이 길이 둘러있고

문은 모래밭으로 향하여 달빛이 일찍 오는구나

어젯밤에 홀연히 호서 밖 꿈에서 놀랐는데

오늘 아침 나 홀로 영남 고을의 술잔을 잡았도다

다행히 왕사로 인해 마음껏 놀게 되었으니

하루 내 난간 머리에서 홀로 배회하노라

 

朝陽閣詩文集․61

李箕鎭 이기진(1687~1755) 조선 후기 문신. 자는 군범(君範), 호는 목곡(牧谷), 시호는 문헌(文憲), 본관은 덕수(德水)이다. 권상하(權尙夏)의 문인이며, 1717년 정시문과에 급제, 예문관․홍문관에 재직한 뒤 신임사화(辛壬士禍) 때 파직되었다가 이인좌(李麟佐)의 난이 일어난 직후 성균관대사성에 임명되었으며, 1749년 동지사(冬至使)로 청(淸)나라에 다녀왔으며, 1751년 광주부유수(廣州府留守)로 「한봉도(汗峰圖)」를 지어 올렸다. 저서에 『목곡집』이 있다.

原野蕭條滿目秋 원야소조만목추

爲寬愁緖强登樓 위관수서강등루

葵心更覺長安遠 규심갱각장안원

坐愛朝陽遍一洲 좌애조양편일주

들판은 쓸쓸하니 눈에 가득한 가을이라

시름 끝을 달래고자 억지로 누에 올랐네

임향한 마음은 다시 서울이 먼 것을 깨닫고

앉아서 아침햇빛이 온 고을에 둘렸음을 좋아하노라

朝陽閣詩文集․83

南公轍 남공철(1760~1840) 조선 말기 문신․문장가. 자는 원평(元平), 호는 사영(思潁)․금릉(金陵), 본관은 의령(宜寧)이다.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로 급제했다. 우의정, 좌의정을 거쳐 영의정에 올랐으며, 1833년에는 봉조하(奉朝賀)가 되었다. 당대 제일의 문장가로 시와 글씨에도 뛰어나 많은 금석문(金石文)과 비갈문(碑碣文)을 썼으며, 순조 때 전사자(全史字)라는 동활자(銅活字)를 만들었다. 순조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저서에 『금릉집(金陵集)』 24권 등이 있다.

亂山一碧蘆花秋 난산일벽노화추

疎雨凉風滿古樓 소우량풍만고루

回首不堪京關遠 회수불감경관원

莫言吾道在滄洲 막언오도재창주

높고 낮은 산이 한결같이 푸르고 갈대꽃 피는 가을에

성근 비 서늘한 바람 옛 누각에 가득하네

머리를 돌림에 서울이 먼 데는 견디어낼 수 없지만

우리 고을이 창주(신선이 사는 곳)에 있다고 말하지 말라

58․詩 篇

金鎭商 김진상(1684~1755) 조선 중기의 문신․서예가. 자는 여익(汝翼), 호는 퇴어(退漁)․본관은 광산(光山)이다. 1712년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설서(說書) 등을 지냈고, 1722년 신임사화(辛壬士禍)로 무산(茂山)에 유배되었다. 1724년 영조가 즉위하자 이조정랑, 좌참찬(左參贊)에 이르렀다. 글씨가 뛰어나 많은 비문을 썼으며, 서적(書蹟)으로 「충현서원사적비(忠賢書院事蹟碑)」 「달성서종제비(達城徐宗悌碑)」가 있으며, 저서로 『퇴어당집(退漁堂集)』이 전한다.

鳳去臨皐問幾秋 봉거임고문기추

朝陽名在但虛樓 조양명재단허루

使君自是丹山羽 사군자시단산우

雕飾朱欄映綠洲 조식주란영록주

봉새가 임고(영천)를 떠난 지 몇 해나 되었던고

조양각의 이름이 다만 빈 누각에 남아있네

사군(태수)이 스스로 단산의 날개라 하여

붉은 난간을 새기고 꾸며 푸른 물가에 비치게 했네

朝陽閣詩文集․73

李瀰 이미(1725~1779) 자는 중호(仲浩), 호는 함광헌(含光軒), 본관은 덕수(德水)이다. 1757년(영조 33)에 문과에 급제하여 1769년부터 1771년까지 경상도 관찰사를 역임하였다.

細霧底雲敞閣陰 세무저운창각음

省春牙纛許登臨 성춘아둑허등림

層欄遠控溪原勢 층란원공계원세

一雨能萌草木心 일우능맹초목심

行部簿書知角定 행부부서지각정

官娃紗燭度簾深 관와사촉도렴심

山川風俗憑夷險 산천풍속빙이험

迢遞郵亭不憚尋 초체우정불탄심

가는 안개 낮은 구름에 탁 트인 누각을 그늘 지우는데

성춘의 높은 깃발이 누에 오르기를 허락했네

층계 난간은 멀리 시내와 두들의 형세를 끌어당기고

한차례 지나간 비는 능히 초목의 마음을 움트게 하네

행정부의 장부는 문서의 건수에 따라 성적이 정해지고

관기의 비단 촛불은 주렴을 따라 깊어지네

산천과 풍속은 평탄하고 험악한데 맡기고

멀고 먼 우정(역참에 있는 여관) 찾기를 싫어하지 않네

74․詩 篇

金履鐸 김이탁(?~?) 1771년부터 1775년까지 영천군수를 역임하였다.

城臨絶壁嵯峨上 성림절벽차아상

樓入晴雲縹緲間 루입청운표묘간

圃老至今如日月 포로지금여일월

使君爲愛此江山 사군위애차강산

迴塘宿雨花開落 회당숙우화개락

廣野微風鳥往還 광야미풍조왕환

石鼎朝陽餘墨在 석정조양여묵재

閒來琴酒破愁顔 한래금주파수안

성은 절벽의 높고 험한 위에 있는데

누각은 맑은 구름이 아득한 사이에 들어오네

포은 선생은 지금에도 일월과 같으니

사군(태수)은 이 강산을 사랑하겠지

지당 둘레의 묵은 비에 꽃은 피었다 지고

넓은 들판 산들바람에 새가 왔다가 돌아가네

돌솥같은 기둥의 조양각에 묵 흔적 남아있음에

한가로이 와서 거문고 타고 술 마시니 근심얼굴 펴지네

50․詩 篇

林담 임담(1596~1652) 조선 중기 문신. 자는 재숙(載叔), 호는 청구(淸臞), 시호는 충익(忠翼), 본관은 나주(羅州)이다. 1635년 문과에 급제한 뒤 이듬해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사헌부지평으로 왕을 남한산성에 호종(扈從)하였고 좌승지를 지냈으며, 이어 대사간․도승지를 거쳐 이조판서가 되고 1652년 청나라 사신의 반송사(伴送使)로 다녀오던 중에 가산(嘉山)에서 병사하였다. 성품이 강직하였으며 총명하고 지식이 해박하였다. 사후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上元今夕雨天晴 상원금석우천청

簾箔風輕月掛旌 렴박풍경월괘정

梅柳爭迎新節序 매류정영신절서

樓臺不減舊名聲 루대불감구명성

堪誇勝地酬淸賞 감과승지수청상

却恨春宵已短更 각한춘소이단경

獨凭危欄星斗轉 독빙위란성두전

望宸千里小臣情 망신천리소신정

정월 보름날 오늘밤에 비는 맑게 개였는데

주렴은 바람에 일렁이고 달은 기에 걸렸네

매화와 버들은 다투어 새 계절을 맞이하고

누와 대는 옛 명성을 감하지 아니하네

경치좋은 곳에서 수작하면서 청상(淸賞)함을 자랑할만 하고

오히려 봄밤이 이미 짧아졌음을 한하네

홀로 높은 난간에 기대었으니 북두칠성은 돌아가고

천리 밖에서 궁궐을 바라봄이 소신의 정이로다

68․詩 篇

林象元 임상원(1709~?) 자는 언춘(彦春)이며 본관은 나주(羅州)이다. 1735년 증광문과에 급제하여 홍문관을 거쳐 승정원 승지, 영광군수, 동래부사, 의주부윤을 지내고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月斷平蕪秋更晴 월단평무추경청

危樓客子倚簾旌 위루객자의염정

簷飛鳳岳寒雲影 첨비봉악한운영

門帶鷄林落木聲 문대계림낙목성

已有絃歌當此夜 이유현가당차야

且遲鍾鼓報殘更 차지존고보잔경

靑山直如愁回首 청산직여수회수

先祖詩中戀闕情 선조시중련궐정

초목 우거진 평원에 달은 지고 가을은 더욱 맑은데

높은 누각에 손님은 주렴과 깃발에 의지했네

처마에는 유봉산 찬 구름 그림자가 날리고

문은 계림 숲의 낙엽소리를 띄웠는 듯 하네

이미 가야금 노래로 이 밤을 맞이하였는데

또한 종소리 북소리 늦게 울려 새벽이 왔음을 알리네

청산을 바로 대하여 근심스레 머리 돌리니

선조의 시 가운데는 궁궐을 생각하는 정이 깃드네

60․詩 篇

鄭亨復 정형복(1686~1769) 조선 후기 문신. 자는 양래(陽來), 본관은 동래(東萊)이다. 1725년 정시문과에 급제, 1727년 세자시강원설서를 거쳐 형조판서․호조판서․지춘추관사(知春秋館事)․혜민서제조(惠民署提調) 등 여러 관직을 거치면서 관원들의 기강확립과 민심을 존중하는 올바른 행정처리, 안민(安民)을 위하여 수령선발에 신중을 기할 것 등을 상소함으로써 백성으로부터 존경을 받았으며 청렴강직한 모범관리로 이름이 높았다.

褰帷原隰屬秋晴 건유원습속추청

畵閣當年住棨旌 화각당년주계정

遺韻籠紗留手澤 유운롱사유수택

後孫持節繼家聲 후손지절계가성

江山檻外渾依舊 강산함외혼의구

歲月人間問幾更 세월인간문기경

曾讀板題猶在誦 증독판제유재송

强哀拚和少伸情 강애변화소신정

휘장 걷어올려 지방을 순회하니 가을하늘 게였는데

누각을 곱게 꾸민 당년에 행차를 머물렀네

운(시)을 남긴 사롱에는 수택이 머물었고

후손이 순찰하니 가성을 이었도다

강산은 헌함 밖에 온전히 옛 모습 그대로요

세월과 인간은 묻노니 몇 번이나 변했던고

일찍 현판의 글을 읽고 아직도 외우고 있었는데

억지로 슬픔 누르고 운에 맞춰 화답하니 조금 정이 펴지네

72․詩 篇

李性源 이성원(1725~1790) 자는 선지(善之), 호는 조은(潮隱), 본관은 연안(延安)이다. 1763년(영조 39)에 문과에 급제하여, 통정대부로 1777년부터 1778년까지 경주부윤을 역임하였다.

驛路黃花傍晩晴 역로황화방만청

永陽秋色上行旌 영양추색상행정

樓臺日射千岑影 루대일사천잠영

簾几風傳二水聲 염궤풍전이수성

丹鳳不來雲萬里 단봉불래운만리

瑤琴初奏月三更 요금초주월삼경

明朝又向華山館 명조우향화산관

怊悵欄頭送客情 초창란두송객정

역 길에 국화는 날이 개인 저녁 무렵에 피었으니

영양의 가을빛이 가는 깃발에 올랐네

누대에 햇볕 쏘이니 천 산에 그림자 짓고

주렴과 안석에 바람이 전하니 이수가 소리하네

붉은 봉은 오지 않는데 구름은 만리에 뻗쳤고

옥 거문고 처음 타는데 밤은 이미 삼경이라

내일 아침에 화산관(신녕)으로 향하려하니

난간머리에 손님 보내는 정이 몹시 서운하구나

朝陽閣詩文集․43

朴仁老 박인로(1561~1642) 조선 중기 문인. 자는 덕옹(德翁), 호는 노계(蘆溪)․무하옹(無何翁), 본관은 밀양(密陽)이다. 영천(永川) 북안 출생. 임진왜란 때 종군하였으며 무과로 등과하여 조라포 만호를 역임하였다. 작품으로는 「선상탄(船上歎)」「사제곡(莎堤曲)」「누항사(陋巷詞)」등 가사와 시조인「조홍시가(早紅柿歌)」등이 노계집』에 실려 있다. 작품세계가 매우 풍요로워서 정철(鄭澈)과 윤선도와 더불어 조선 3대 시가인으로 알려져 있다.

天作奇巖上 천작기암상

人開第一樓 인개제일루

明牕黃鶴月 명창황학월

丹檻岳陽秋 단함악양추

地接三山遠 지접삼산원

江連二水流 강연이수류

秦童如見此 진동여견차

何必訪瀛洲 하필방영주

하늘이 만든 기이한 바위 위에

사람이 제일가는 누각을 세웠네

밝은 창에는 황학루의 달이 비쳤고

붉은 헌함에는 악양루의 가을이 다가왔네

땅은 삼산의 먼 곳에 접했고

강은 이수의 흐름에 이어졌네

진나라 동자가 만일 이곳을 보았다면

어찌 반드시 영주를 찾았겠는가

44․詩 篇

朴仁老 박인로(1561~1642) 조선 중기 문인. 자는 덕옹(德翁), 호는 노계(蘆溪)․무하옹(無何翁), 본관은 밀양(密陽)이다. 영천(永川) 북안 출생. 임진왜란 때 종군하였으며 무과로 등과하여 조라포 만호를 역임하였다. 작품으로는 「선상탄(船上歎)」「사제곡(莎堤曲)」「누항사(陋巷詞)」등 가사와 시조인「조홍시가(早紅柿歌)」등이 노계집』에 실려 있다. 작품세계가 매우 풍요로워서 정철(鄭澈)과 윤선도와 더불어 조선 3대 시가인으로 알려져 있다.

飛甍高聳斷巖頭 비맹고용단암두

形勝依然十二樓 형승의연십이루

削玉丹崖凌百尺 삭옥단애릉백척

舂金碧水匯雙流 용금벽수회쌍류

憑風望遠天疑盡 빙풍망원천의진

對月臨虛地欲浮 대욕림허지욕부

氣爽神淸無世慮 기상신청무세려

身如羽化到仙區 신여우화도선구

날아갈 듯한 용마루가 절벽 위에 높이 솟았으니

빼어난 경치 의연하게 십이루와 같다네

옥을 깎은 듯한 붉은 벼랑은 백 척을 능가하고

금을 찧는 듯한 푸른 물결은 두 갈래로 흘러 모여드네

바람에 의지하여 먼 데 바라보니 하늘은 끝나는가 의심하고

달을 대하여 허공에 임하니 땅은 뜨고자 하는구나

기운이 상쾌하고 정신이 맑으니 세상근심 없어지고

이 몸에 날개 나서 선계에 오른 듯 하네

朝陽閣詩文集․71

鄭存謙 정존겸(1722~1794) 조선 후기 문신. 자는 대수(大受), 호는 양재(陽齋)․양암(陽庵)․원촌(源村), 시호는 문안(文安), 본관은 동래(東萊)이다. 이재(李縡)의 문인으로 1751년 정시문과(庭試文科)에 급제, 교리(校理)․부제학(副提學)을 지냈다. 1782년 동지사(冬至使)로 청(淸)나라에 다녀왔으며, 1791년 영의정으로 관직에서 물러났고, 봉조하(奉朝賀)가 되었다. 문집으로 『양재집』이 있다.

浮空畵閣燿新晴 부공화각요신청

日射紗籠風拂旌 일사사롱풍불정

氷坼魚龍連海氣 빙탁어룡련해기

川長鳧鴨動春聲 천장부압동춘성

曾因關雨經三宿 증인관우경삼숙

尙憶鳴琴坐五更 상억명금좌오경

按節今來增怵惕 안절금래증출척

敢忘吾祖倚欄情 감망오조의란정

하늘에 뜬 누각이 새 날에 빛나는데

햇빛이 사롱에 비치니 바람이 깃발을 휘날리고

얼음이 녹으니 고기와 용은 바다의 기운에 이어졌고

냇물이 기니 물새와 오리는 봄 소리에 움직이네

일찍 비로 인해 사흘 밤을 지냈고

지금도 울리던 거문고 추억하여 오경까지 앉았네

안절사가 되어 이제 와서 두려움을 더하는데

감히 어찌 우리 조상이 난간에 의지했던 정을 잊겠는가?

84․詩 篇

鄭東觀 정동관(1762~1809) 자는 문섬(文贍)이며, 본관은 동래(東萊)이다. 1783년 친시진사과에 장원을 하여 가선대부로 1807년부터 1809년까지 경주부윤을 역임하고 경상감사, 부제학, 이조참판을 역임하였다.

春天鼓角倚新晴 춘천고각의신청

岸柳迎人拂畵旌 안류영인불화정

此日江山如有待 차일강산여유대

昔年草木盡知聲 석년초목진지성

抽身朱墨來千里 추신주묵래천리

極目風煙坐五更 극목풍연좌오경

况是今辰回舊甲 황시근심회구갑

不堪攀慕愴神情 불감반모창신정

시간을 알리는 북소리에 봄하늘이 새로 개이는데

언덕 버들 사람 맞이하여 그림 깃발을 펄럭거리네

이 날에 강과 산은 기다리는 것 같은데

지난 해 풀과 나무 옛 명성을 알겠지

공무에서 몸을 빼서 천리 길을 달려와서

눈을 다하여 봄경치 구경하며 깊은 밤에 앉았네

하물며 지금에 옛 갑자 돌아오니

사모하는 마음 견디지 못하여 정신이 서글프네

朝陽閣詩文集․85

鄭東觀 정동관(1762~1809) 자는 문섬(文贍)이며, 본관은 동래(東萊)이다. 1783년 친시진사과에 장원을 하여 가선대부로 1807년부터 1809년까지 경주부윤을 역임하고 경상감사, 부제학, 이조참판을 역임하였다.

錦石明沙晩景晴 금석명사만경청

遠山濃翠上簾旌 원산농취상렴정

多情煙月今秋色 다정연월금추색

依舊風灘竟夜聲 의구풍탄경야성

此地便如桑梓故 차지변여상재고

重來端覺鬢毛更 중래단각빈모경

篇中敬復行藏語 편중경복행장어

徙倚危欄獨感情 사의위란독감정

고운 돌 깨끗한 모래 늦은 경치 맑은데

먼 산 짙은 푸름이 주렴과 깃발에 비치네

다정한 연기와 달은 이제 가을빛이고

옛날과 변함 없는 바람여울은 밤이 다하도록 소리하네

이 땅이 문득 뽕나무 재나무 있는 고향 같으므로

거듭와서 처음으로 귀 및 머리가 희어졌음을 깨달았네

책 속에서 공경히 나아가고 물러가는 말을 반복하며

난간에 서성거리며 홀로 정을 느끼네

朝陽閣詩文集․75

鄭大容 정대용(1749~1805) 조선 후기 문신. 자는 도이(道以), 호는 기호(耆湖), 본관은 동래(東萊)이다. 1785년 정시문과에 급제, 규장각직각을 거쳐 영남좌도어사가 되었고, 함경도에 흉년이 들자 북관위유어사(北關慰諭御史)로 파견되었다. 1791년 경상도관찰사가 되었다. 1801년 고부 겸 청시청승습부사(告訃兼請諡請承襲副使)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이듬해 수원부유수․이조판서를 지냈고, 1804년 검교직제학․한성부판윤을 지냈다.

依依塞雁喚林晴 의의새안환림청

玉節何年駐棨旌 옥절하년주계정

鳴鳥歸雲空岳色 명조귀운공악색

虛舟橫渡但灘聲 허주행도단탄성

沙暉動暝風煙暮 사휘동명풍연모

野草含霏歲月更 야초함비세월경

畵壁塵紗猶護跡 화벽진사유호적

屢經樓閣獨關情 루경루각독관정

의의(바람에 한들거림)한 변방기러기 숲 맑은데서 부르는데

사신이 되어 어느 해에 여기에 머물렀던고

우는 새 돌아가는 구름에 산 빛은 쓸쓸한데

빈배 비낀 나루에 다만 여울소리 뿐이네

모래 빛이 어두움에 움직이니 바람 연기도 저물어가고

들풀이 눈 비 머금으니 세월은 번갈아 가는구나

그림 벽에 먼지 덮인 비단은 오히려 옛 자취 보호하니

여러 번 누각을 지나감에 홀로 정이 끌리네

90․詩 篇

鄭基善 정기선(1784~1839) 조선 후기 문신. 자는 원백(元伯), 호는 수석(脩石), 본관은 동래(東萊)이다. 1812년 정시문과에 급제, 직각(直閣)․이조참의 등을 지내고 부제학을 거쳐 1829년 경상도관찰사가 되어 왜인들을 방어하는 대책을 수립하였다. 다음해 도내에 극심한 재해가 있자 이를 극복하기 위하여 중앙에 구원을 요청, 왕으로부터 1만 냥을 하사 받아 기민(飢民)구제에 성공하였다. 그 뒤 우부빈객(右副賓客)․예조판서를 거쳐 대사헌에 올랐다.

綺閣迢迢倚淡晴 기각초초의담청

長汀煙樹拂行旌 장정연수불행정

古棠紅發春無迹 고당홍발춘무적

遺藻碧籠畵有聲 유조벽롱화유석

南道山川來鳳舞 남도산천래봉무

東江星月打鵝更 동강성월타아경

承家宦業皆餘蔭 승가환업개여음

坐待流光不勝情 좌대루광불승정

화려한 누각 높고 높아 산뜻하게 게인 하늘에 기대였는데

긴 물가 연기 낀 나무에 가는 깃발이 떨치네

옛 해당화 붉게 피는데 봄은 자취가 없고

남긴 글 푸른 사롱에 그림은 명성이 있네

남도의 산천에는 봉이 와서 춤을 추고

동강의 별과 달은 거위 치기를 계속 하네

집의 환업(벼슬함을 말함)을 잇는 것은 다 남은 음덕인데

앉아서 유광을 기다리니 정을 이기지 못하겠네

82․詩 篇

金羲淳 김희순(1757~1821) 조선 후기 문신. 자는 태초(太初), 호는 산목(山木)․경원(景源), 시호는 문간(文簡), 본관은 안동(安東)이다. 1789년 식년문과에 갑과로 급제하여 사직서직장에 제수되었다. 같은 해 초계문신(抄啓文臣)에 발탁되고, 사서를 강론하였다. 1806년 호조․예조․병조․공조의 참판과 대사헌․홍문관제학 등을 두루 지냈다. 어릴 때부터 문사에 능하였으며 경술(經術)에 조예가 깊었다고 한다.

明沙一帶艶新晴 명사일대염신청

臨水樓臺捲彩旌 림수루대권채정

平楚和雲迷極目 평초화운미극목

澄流瀉壁逈傳聲 징류사벽형전성

梅花嶺外家千里 매화령외가천리

芳草江南夢五更 방초강남몽오경

原濕迢迢王事重 원습초초왕사중

凭欄遲日不勝情 빙란지일불승정

깨끗한 사장 일대가 곱게 새로 개었는데

물에 임한 누대에 채색 깃발 거두었네

평평한 들에 구름이 어울리니 멀리 바라보기에 아득하고

맑은 물이 절벽에 부딪히니 멀리까지 소리를 전하네

매화 핀 영외(영남)에서 집은 천리 길인데

꽃다운 풀 강남에 오경에 꿈을 꾸네

높은 들 낮은 습지 가는 길이 멀고멀지만 왕사는 막중하니

난간에 기대었으니 해는 더디어 정을 이기지 못하겠네

92․詩 篇

李晦淵 이회연(?~?) 호는 운설(雲雪)이며, 본관은 전주(全州)이다.

霧列朱門逆旅顔 무렬주문역려안

醉醒猶借一樓閒 취성유차일루한

江侵大埜恢恢入 강침대야회회입

山拕遙天歷歷還 산타요천력력환

鷗鷺不分靑草外 구로불분청초외

鳳凰相待白雲間 봉황상대백운간

方知勝郡風流蹟 방지승군풍류적

俗畵空踰主屹關 속화공유주흘관

빽빽이 늘어진 주문의 객사에 와서

취했다 깨었다하니 도리어 한 누각을 빌린 듯 한가롭네

강물은 큰 들을 침범하여 유유히 들어오고

산은 먼 하늘 끌어당겨 줄지어 돌아오네

갈매기와 백로는 청초 밖에서 어울리고

봉과 황은 백운 사이에서 서로 기다리네

바야흐로 경치 좋은 고을의 풍류의 흔적을 알겠구나

속된 그림이 공연히 주흘관을 넘었네

朝陽閣詩文集․93

李希英 이희영(?~?)

一坪看漠漠 일평간막막

臨水更高樓 림수갱고루

獨月登疎岸 독월등소안

羣煙合遠洲 군연합원주

夜深緗箔面 야심상박면

人影畵欄頭 인영화란두

他日溪山約 타일계산약

此樓更勝遊 차루갱승유

한 들 막막함을 보고

물가에 다다르니 또 높은 누각일세

외로운 달은 거친 언덕에 떠오르고

온갖 연기는 먼 물가에 자욱하네

밤은 담황색 주렴의 표면에 깊어가고

사람의 그림자는 헌함 머리에 그려지네

다른 날 계산에서 약속한 것은

이 누에서 다시 즐겁게 놀자고 했네

94․詩 篇

黃䆃 황도(?~?)

州因臺觀勝 주인대관승

得以數名區 득이수명구

野濶靑峰遠 야활청봉원

川平白鳥浮 천평백조부

槐陰堂戶靜 괴음당호정

霞氣入簷幽 하기입첨유

鳴鳳何時返 명봉하시반

朝陽但有樓 조양단유루

고을은 대각의 좋은 경치로 인해

이름난 곳으로 꼽히게 되었네

들판이 넓으니 푸른 산은 멀리 뵈고

냇물은 잔잔하여 백조가 떠있네

회화나무 그늘에 집들은 고요하고

노을 기운이 처마에 들어와 그윽하네

우는 봉은 어느 때나 돌아오려나

조양엔 다만 누각만 남아있네

朝陽閣詩文集․95

朴友采 박우채(?~?)

三山二水共縈回 삼산이수공영회

拓得渾雄畵閣開 척득혼웅화각개

撲地民居烟火匝 박지민거연화잡

依欄秋色野雲來 의란추색야운래

百年客到仍忘殼 백년객도잉망각

五夜燈深更把杯 오야등심갱파배

從古周南仁化在 종고주남인화재

焉聞謠俗起徘徊 언문요속기배회

삼산과 이수가 함께 얽혀 도는데

크고 웅장하게 개척하여 그림 같은 집을 지었네

땅에 가득한 민가에는 연기가 둘렸고

난간에 의지한 가을빛에 들 구름이 다가오네

나이 많은 노인네가 당도하니 딱딱함은 잊어버리고

깊은 밤에 등불이 밝으니 다시 술잔 잡노라

옛부터 주남에는 어진 교화 있었는데

민요를 들으면서 일어나 배회하네

96․詩 篇

朴友采 박우채(?~?)

玆樓自古擅南方 자루자고천남방

逈出人間壓四望 형출인간압사망

大野平臨連廣漠 대야평림연광막

遙岑相對入蒼茫 요잠상대입창망

半簾嵐氣春容重 반염람기춘용중

一枕波聲客夢凉 일침파성객몽량

孰把明時需世志 숙파명시수세지

爲看飛鳳上朝陽 위간비봉상조양

이 누각 예부터 남방에 으뜸이라

인간세상 뛰어넘어 사방을 위압하네

큰 들은 평평하여 광막(한없이 넓음)하게 이어지고

먼 산은 서로 마주보며 창망(멀어서 아득함)하게 들어오네

반쯤 걷힌 주렴 아지랑이 기운에 봄 모양이 짙어지고

한 베개에 물결소리는 손의 꿈자리를 서늘케 하네

누가 태평성대의 세상에 수용할 뜻을 가려서

나는 봉새에 조양각에 오르는 것을 보게 할 것인가

70․詩 篇

李獻慶 이헌경(1719~1791) 조선 후기 문신․학자. 자는 몽서(夢瑞), 호는 간옹(艮翁), 본관은 전주(全州)이다. 1743년 진사로 정시문과에 급제, 1751년 정언을 지냈고 사간원사간․사헌부집의 등을 거쳐 홍문관수찬이 되었다. 그 뒤 참찬관(參贊官) 등을 거쳐 대사간이 되었으며, 1790년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이 되어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벼슬보다 문학에 힘을 기울여 많은 글을 남겼다. 주요 저서로는 『간옹집(艮翁集)』 24권 등이 있다.

征南冠盖永州回 정남관개영주회

病眼憑高颯颯開 병안빙고삽삽개

滄海日華含雨濕 창해일화함우습

大荒風色逆沙來 대황풍색역사래

山河曾屬何王國 산하증속하왕국

樓閣今逢太守盃 누각금봉태수배

鐃曲三聲客未發 뇨곡삼성객미발

望宸之處獨徘徊 망신지처독배회

남으로 가는 높은 벼슬아치 영천으로 돌아와서

병든 눈으로 높은 누각에 기대니 바람소리 시원하구나

창해의 해빛은 비를 머금어 젖었고

대황(大荒:하늘)에서 불어오는 바람 모래를 거슬러오게 하네

산하는 일찍 어느 왕국에 속했던고

누각은 이제 태수를 만나 술잔을 드네

징 소리 세 번 울려도 손님은 출발하지 못하고

대궐을 바라보는 곳에서 홀로 서성거리네

朝陽閣詩文集․105

李鶴儀 이학의(1809~1874) 자는 구일(九一), 호는 운관(雲觀), 본관은 전주(全州)이다. 저서로 『운관시집(雲觀詩集)』이 있다.

蒼崖陡斷碧江回 창애두단벽강회

望極東南野復開 망극동남야복개

此地高樓依昔在 차지고루의석재

古人明月幾時來 고인명월기시래

有花盡發春如海 유화진발춘여해

與子同臨酒滿盃 여자동림주만배

正憶夜深吹玉笛 정억야심취옥적

白雲黃鶴暫徘徊 백운황학잠배회

푸른 언덕 우뚝한데 푸른 강물 돌렸구나

동남쪽을 끝까지 바라보니 들이 다시 열렸네

이 땅에 높은 누각 옛 대로 있는데

고인이 즐기던 명월 몇 번이나 왔던고

꽃이 있어 만발하니 봄은 바다와 같고

그대를 더불어 함께 오니 술은 잔에 가득하네

밤이 깊어 옥피리 불던 것을 생각하니

흰 구름과 누런 학이 잠시 머뭇거리네

112․詩 篇

張錫龍 장석룡(1823~1907) 조선 말기 문신. 자는 진백(震伯), 호는 유헌(遊軒)․운전(雲田), 시호는 문헌(文憲), 본관은 인동(仁同)이다. 1846년 정시문과에 급제하여 성균관전적․사헌부감찰․사헌부지평․사간원정언 등을 거쳐 1848년 증광문과회시(增廣文科會試) 시관(試官)․춘추관기사관을 지냈으며, 대사간․예조참의․공조참의․경주부윤을 지낸 뒤 낙향하였다가 1892년 궁내부특진관이 되었다. 저서로 『유헌집』 11권이 전해진다.

江南遊客永陽回 강남유객영양회

天畔高樓壓水開 천반고루압수개

落木西風鴻雁去 락목서풍홍안거

碧梧何日鳳凰來 벽오하일봉황래

廢興有數還千古 폐흥유수환천고

逢別無端且一盃 봉별무단차일배

玉笛聲殘人不見 옥적성잔인불견

空留明月獨徘徊 공류명월독배회

강남에 놀던 손님 영양으로 돌아오니

하늘가 높은 누각이 물을 누르고 세워졌네

나뭇잎 서풍에 떨어지는데 기러기는 날아가고

벽오동 어느 날에 봉황이 찾아 올고

흥하고 폐함은 수가 있으니 오랜 세월 지나 돌아오고

만나고 이별함은 끝이 없으니 또 술 한잔이로다

옥적 소리 쇠잔한 데 사람은 보이지 아니하고

공연히 밝은 달 붙잡아 홀로 서성거리네

朝陽閣詩文集․141

李鍾洙 이종수(?~?) 1929년부터 1930년까지 영천군수를 역임하였다.

穎陽南畔水東回 영양남반수동회

野曠山低眼豁開 야광산저안활개

桑海金烏誰可挽 산해금오수가만

桐江丹鳳不重來 동강단봉부중래

先生往蹟風千古 선생왕적풍천고

舊國餘情酒一盃 구국여정주일배

遙望瓊樓何處是 요망경루하처시

夜深明月獨徘徊 야심명월독배회

영양 남쪽 가에 물은 동으로부터 돌아오고

들은 넓고 산은 낮으니 눈이 활짝 트이네

상전이 벽해가 되는데 가는 해를 누가 잡아당기겠는가

동강에 붉은 봉은 다시 오지 아니하네

선생의 지나간 자취는 천고에 풍화가 되고

옛 나라에 남은 정은 술이 한잔이네

멀리 경루(달에 있다는 궁궐)를 바라보니 어느 곳이냐?

밤이 깊어 밝은 달이 홀로 배회하네

朝陽閣詩文集․33

曺偉 조위(1454~1503) 조선 초기 문신. 자는 태허(太虛), 호는 매계(梅溪), 시호는 문장(文莊), 본관은 창녕(昌寧)이다. 1474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 승문원정자를 지내고 어머니 봉양을 위하여 외직을 청해 함양군수(咸陽郡守)가 되었다. 1498년 명(明)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오던 중 무오사화(戊午士禍)가 일어나 의주(義州)로 유배되었다. 순천으로 이배(移配)된 뒤 그곳에서 죽었다. 초기 사림파의 대표인물의 하나이다. 저서에 『매계집(梅溪集)』이 있다.

新構華堂壓水湄 신구화당압수미

我來登眺立多時 아래등조입다시

薰風芳草晴天遠 훈풍방초청천원

落日孤雲獨鳥遲 락일고운독조지

嵐氣空濛檻外滴 람기공몽함외적

楊花撩亂帽邊吹 양화요란모변취

夜深月上欄干曲 야심원상란간곡

一味淸凉獨自知 일미청량독자지

새로 지은 화려한 집 물가에 우뚝한데

내가 올라 바라보며 자주 섯노라

바람은 훈훈하고 풀은 꽃다운데 게인 하늘 먼데 뻗치고

해는 떨어지고 구름은 외로운데 새는 홀로 늦게 돌아오네

아지랑이 자욱하니 헌함 밖에 물방울 떨어지고

버들가지는 요란하게 모자머리에 날리네

밤이 깊어 달빛이 굽은 난간에 올라오니

기분이 아주 좋아 상량함을 홀로 알겠네

朝陽閣詩文集․35

李賢輔 이현보(1467~1555) 조선 중기 문신․시조작가. 자는 비중, 호는 농암(聾巖)․설빈옹. 시호는 효절(孝節), 본관은 영천(永川)이다. 1498년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호조참판, 1546년 자헌대부, 1554년 지중추부사가 되었다. 자연을 노래한 대표적인 문인으로, 자연을 읊은 많은 시조를 남겼으며, 장가 12장, 단가 10장으로 전하던 「어부가(漁夫歌)」를 장가 9장, 단가 5장으로 고쳐지어 국문학사상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저서로 『농암집』이 있다.

斷岸橫岡類削氷 단안횡강류삭빙

堂新喜與客同登 당신희여객동등

風生庭樹含秋氣 풍생정수함추기

水落南州露石稜 수락남주로석릉

十里煙雲輸勝槩 십리연운수승개

一盃談笑集親朋 일배담소집친붕

相逢但得今宵醉 상봉단득금소취

肯要名聲去後稱 긍요명성거후칭

가파른 언덕 비탈진 산은 얼음을 깎은 듯 한데

집을 새로 지어 기쁘게 손님과 함께 오르네

정원수에 바람이 이니 가을기운을 머금었고

남쪽고을에 물이 줄어드니 돌 모서리가 드러나네

십리에 뻗친 연기와 구름은 좋은 경치를 실어다 주고

한잔의 술로 정담과 웃음에 친한 벗이 모이네

서로 만나 다만 오늘밤에 취함을 얻는다면

어찌 명성을 떠난 뒤에 말하기를 요구하겠나

36․詩 篇

李賢輔 이현보(1467~1555) 조선 중기 문신․시조작가. 자는 비중, 호는 농암(聾巖)․설빈옹. 시호는 효절(孝節), 본관은 영천(永川)이다. 1498년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호조참판, 1546년 자헌대부, 1554년 지중추부사가 되었다. 자연을 노래한 대표적인 문인으로, 자연을 읊은 많은 시조를 남겼으며, 장가 12장, 단가 10장으로 전하던 「어부가(漁夫歌)」를 장가 9장, 단가 5장으로 고쳐지어 국문학사상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저서로 『농암집』이 있다.

雙溪波漲沒涯湄 쌍계파창몰애미

客到黃梅雨歇時 객도황매우헐시

北海樽前連日飮 북해준전연일음

南柯夢記十年遲 남가몽기십년지

華堂古額何時換 화당고액하시환

當檻淸風依舊吹 당함청풍의구취

江畔柳林曾手植 강반유림증수식

看他民吏半新知 간타민리반신지

두 시내 물결 넘쳐 물가를 매웠는데

손님은 매실이 익는 계절 비 개일 때 당도했다

북해 같은 술 두루미 앞에 날마다 술 마시고

남가의 꿈같은 세월 십 년이 지냈구나

집을 빛낸 현판은 어느 때 바꾸겠나

헌함에 당한 맑은 바람 예와 같이 불어오네

강가에 버들 숲은 일찍 손수 심었는데

그 민과 관이 보았을 때 반쯤은 새것인줄 알겠네

朝陽閣詩文集․37

成世昌 성세창(1481~1548) 조선 중기 문신. 자는 번중(蕃仲), 호는 돈재(遯齋), 시호는 문장(文莊), 본관은 창녕(昌寧)이다. 1507년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홍문관정자, 저작(著作)․박사(博士)․사간원정언을 지내고 1545년(인종 1) 우의정으로서 사은사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오던 중 좌의정으로 임명되었으나 그 해에 을사사화가 일어나 황해도 장연(長淵)으로 귀양가 죽었으며, 선조 때에 복작되었다. 저서에 『돈재집(遯齋集)』 『식료찬요(食療纂要)』가 있다.

樹陰濃綠隱溪湄 수음동록은계미

爽氣凉如落木時 상기량여락목시

團扇驚秋藏篋早 단선경추장협조

朱簾邀月下鉤遲 주렴요월하구지

書空怪事憑詩遣 서공괴사빙시견

入戶淸風任髮吹 입호청풍임발취

灘響忽高何處雨 탄향홀고하처우

夜窓孤客夢先知 야창고객몽선지

나무 그늘 짙은 푸르름이 시냇가를 덮었는데

서늘한 기운 서느러움이 나뭇잎이 떨어지는 때와 같구나

둥근 부채 가을에 놀라 상자 속에 갈무리하기 바쁘고

붉은 주렴 달을 맞이하니 하순 달이 더디구나

허공에 괴이한 일 글씨 쓰며 시를 빙자해 날을 보내고

문창에 맑은 바람 들어오니 마음대로 머리카락 날리네

여울 소리 갑자기 높으니 어느 곳에 비가 왔던고

밤 창에 외로운 손님 꿈인 줄 알았네

32․詩 篇

許琛 허침(1444~1505) 조선 전기 문신. 자는 헌지(獻之), 호는 이헌, 시호는 문정(文貞), 본관은 양천(陽川)이다. 1475년 알성문과에 급제하여 감찰․부교리․지평(持平) 등을 지냈다. 1494년 천추사(千秋使)로 명나라에 다녀온 뒤 1502년(연산군 8) 이조판서가 되고, 1504년 우의정, 이어 좌의정에 올랐다. 성종 때 윤비(尹妃) 폐위에 반대하여 갑자사화(甲子士禍)를 면하였고, 연산군의 폭정에서 조신들을 많이 구명하였다. 성종조 청백리(淸白吏)에 녹선(錄選)되었다.

霧閣雲窓敞水湄 무각운창창수미

登臨况復屬淸時 등림황부속청시

翠屛眼逈嵐光重 취병안형람광중

素練川明日影遲 소련천명일영지

瓊液已從花下飮 경액이종화하음

玉簫宜向月中吹 옥소의향월중취

蓬山本自無多路 봉산봉자무다로

最喜眞源獨自知 최희진원독자지

안개 속 누각 구름 덮인 창이 물가에 탁 트이는데

하물며 등림한 날이 태평시대 아니던가

푸른 병풍처럼 눈에 우뚝하니 남광이 자욱하고

흰 비단 같이 냇물이 깨끗한데 해 그림자 더디 가네

옥같은 진액은 이미 꽃 아래에서 마시고

옥퉁소는 달을 향하여 불어옴이 마땅하되

봉래산은 본시 여러 갈래 길이 없으니

진실한 근원은 홀로 깨닫는 것이 가장 기쁜 일이네

30․詩 篇

楊熙止 양희지(1430~1504) 자는 가행(可行), 호는 대봉(大峯), 본관은 중화(中和)이다. 1474년(성종 5)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軒窓開向澗之湄 헌창개향간지미

野逕牛羊落日時 야경우양락일시

石灘雨過水聲急 석탄우과수성급

藥砌春寒花較遲 약체춘한화교지

三疊離歌柳色動 삼첩리가유색동

一聲羌笛梅花吹 일성강적매화취

月明風細天如水 월명풍세천여수

爲報世人知不知 위보세인지부지

헌함의 창은 간수 가를 향하여 열렸는데

들길에는 소와 양이 돌아가는 해질 무렵이네

돌 여울에 비가 지나가니 물소리 요란하고

약초 뜨락에 봄 날씨 차가우니 꽃은 조금 더디 피네

세 번이나 거듭하는 이별노래에 버들 빛은 한들거리고

한 곡조 날라리 소리에 매화꽃에 바람이 이네

달은 밝고 바람은 잔잔하여 하늘빛은 물과 같은데

세상에 알리고자 하나 사람들은 아는지 모르는지

朝陽閣詩文集․39

李仲樑 이중량(1504~1582) 자는 공간(公幹), 호는 하연(賀淵), 본관은 영천(永川)이며 농암 이현보(李賢輔)의 아들이다. 1534년 문과에 급제하여 1544년부터 1549년까지 영천군수를 역임하였다.

堂含霽月若壺氷 당함제월약호빙

四十年來更此登 사십년래갱차등

當日經營開勝絶 당일경영개승절

如今丹雘照觚稜 여금단확조고릉

江山自是傳家物 단산자시전가물

鷗鷺還爲繼世朋 구로환위계세붕

輸得眼中渾不得 수득안중혼부득

自慚治效異前稱 자참치효이전칭

집은 게인 달을 머금었으니 깨끗한 항아리 같은데

사십 년 이래도 다시 여기 올랐네

지난날에 경영하여 명승지를 열었는데

지금에 선명하게 붉은 색채가 술잔에 비치네

강산은 이로부터 가문에 전하는 물건이오

구로는 도리어 대대로 이어갈 벗이 되리

눈 가운데 모두 얻지 못할 것을 실어다 얻어서

스스로 다스리는 공효가 전년과 다름을 부끄러워하네

朝陽閣詩文集․133

姜永瑞 강영서(?~?) 1899년부터 1900년까지 영천군수를 역임하였다.

朝陽鳴鳳幾時回 조양명봉기시회

獨有樓臺瑞色開 독유루대서색개

野勢遙連山勢盡 야세요련산세진

灘聲半雜市聲來 탄성반잡시성래

兩行紅粉堪留客 양행홍분감류객

十月黃花且擧杯 시월황화차거배

得此優遊皆聖賜 득차우유개성사

依瞻北斗更徘徊 의첨북두갱배회

아침볕에 울던 봉새 몇 번이나 돌아왔던고

누대만 홀로 남아 상서로운 빛 열었구나

들 형세는 멀리 산 형세에 이어지고

여울소리는 반쯤 저자소리에 섞여 들려오네

두 줄의 흥분 단장도 손님을 머물게 할만한데

시월의 국화꽃은 또 술잔을 들게 하네

이 한가롭게 놀 수 있는 것은 다 임금이 주신 은덕이라

북두칠성 바라보며 다시 배회하네

朝陽閣詩文集․115

姜駿秀 강준수(?~?) 1873년부터 1874년까지 적라태수(赤羅太守 : 현 군위현감)을 지내고 거창으로 옮겼으며, 선정비가 남아있다.

遊鳳山光入望晴 유봉산광입망청

朱欄十二拂簾旌 주란십이불염정

黃雲平野齊民力 황운평야제민력

落日長洲散市聲 락일장주산시성

從古登臨詩一疊 종고등림시일첩

祗今現在月三更 지금현재월삼경

朝陽閣裏重陽節 조양각리중양절

仙吏風流摠管情 선리풍류총관정

유봉산 빛이 시야에 들어와 깨끗한데

붉은 난간 열두 구비에 주렴과 깃발이 떨치네

누른 구름(벼가 익음) 평평한 들은 백성이 힘을 같이 했 고

떨어지는 해 긴 물가에 재자 소리가 흩어지네

예부터 등림하여 시 한 첩을 남겼는데

다만 지금 현재엔 달이 밝아 삼경이네

조양각에서 중양절을 맞이하니

신선 같은 아전의 풍류 다 인정을 포용하네

130․詩 篇

權載紀 권재기(?~?) 1894년부터 1895년까지 신녕현감을 역임하였다.

三十年前度此州 삼십년전도차주

雪驢巧撥不遑休 설려교발불황휴

抵今偲泛蘇公영 저금시범소공영

求古旋登仲淹樓 구고선등중엄루

大野山迴祥鳳羽 대야산회산봉우

空汀石縮老龜頭 공정석축로귀두

朝陽閣外梧桐月 조양각외오동월

霽後淸光幾夜秋 제후청광기야추

삼십 년 전에 이 고을을 지나는데

눈 속에 당나귀를 교묘하게 다스리려니 쉴 겨를이 없네

지금에 이르러 소공영의 물놀이를 권장하고

옛날을 탐구하여 중엄루에 올랐네

큰 들이 산에 둘렸으니 상서로운 봉의 날개 같고

빈 물가에 돌이 오그라들어 늙은 거북머리 같네

조양각 밖에 오동나무에 걸린 달은

게인 후 맑은 빛이 몇 밤이나 가을을 맞이했나

朝陽閣詩文集․131

權重海 권중해(?~?) 성균관장(成均館長)을 역임하였다.

海天長夜幾輪回 해천장야기륜회

紅旭初昇路線開 홍욱초승로선개

古閣千秋能再建 고각천추능재건

先民一去不重來 선민일거부중래

待他棲息裁梧日 재타서식재오일

愛此幽香把菊盃 애차유향파국배

靈鳥應知治世運 영조응지치세윤

昂頭刷羽舞徘徊 앙두쇄우무배회

바다 위의 하늘에 긴 밤이 몇 번이나 돌아왔노

붉은 아침해가 처음 떠오르니 길이 환히 트이네

옛 누각은 천년이 지나도 능히 다시 지을 수 있지마는

옛사람은 한번가면 거듭 오지 아니하네

다른 날 봉이 깃들기를 기다려 오동을 심는 날이오

이 그윽한 향기를 사랑하여 국화주 잔을 잡네

신령한 새는 아마 치세의 운을 알 것이다

머리를 들어 깃을 새롭게 하여 춤추며 배회하리라

106․詩 篇

金東獻 김동헌(?~?) 1840년 1월부터 12월까지 영천군수를 역임하였다.

平沙如練水縈回 평사여련수영회

畵閣登臨晩眺開 화각등림만조개

野色自隨山共逈 야색자수산공형

天光欲與樹俱來 천광욕여수구래

籠紗滿壁生文藻 롱사만벽생문조

粉黛留人洗酒盃 분대류인세주배

試向西風明玉笛 시향서풍명옥적

輓踵雲際鳳徘徊 만종운제봉배회

평평한 모래밭은 비단 같은 데 물은 굽이굽이 둘러싸고

그림 같은 누각에 올라 석양의 경치를 바라보네

들빛은 산을 따라 함께 뛰어나고

하늘빛은 나무를 더불어 함께 오고자 하네

비단으로 싼 등이 벽에 가득하니 문채가 나고

화장한 미인 사람을 머물게 하니 술잔을 씻어가며 마시네

시험삼아 서풍을 향하니 옥피리 소리 명랑한데

구름 가의 봉이 노니는 곳에 뒤따라 가고싶네

132․詩 篇

金命求 김명구(?~?) 연양수(延陽守)이다.

閣何稱此號 각하칭차호

先得朝陽回 선득조양회

佳氣城頭滿 가기성두만

淸風水面來 청풍수면래

丹楓羣木立 단풍군목립

白雪萬花開 백설만화개

四序登臨客 사서등림객

一唫又一盃 일음우일배

누각은 어찌하여 이 이름 붙였던고

아침해 돌아옴을 먼저 얻기 때문인가

아름다운 기운은 성 머리에 가득하고

맑은 바람은 수면으로 불어오네

단풍이 들 때는 뭇 나무만 섰더니

백설이 내리니 만 송이 꽃이 피네

사계절에 여기 오르는 손님은

시 한 수 읊고 또 술 한 잔 마시네

朝陽閣詩文集․129

南廷獻 남정헌(?~?) 1894년부터 1895년까지 영천군수를 역임하였다.

孫拜祖書甲午秋 손배조서갑오추

天恩誇到朝陽樓 천은과도조양루

雲來遊鳳今何處 운래유봉금하처

回首三山二水洲 회수삼산이수주

손자가 조부의 글을 뵙는 갑오년 가을에

임금의 은혜 자랑스럽게 조양각에 이르렀네

구름같이 와서 놀던 봉은 지금 어디에 있나

삼산과 이수의 물가에 머리를 돌려 살펴보네

 

朝陽閣詩文集․143

盧根容 노근용(1884~1965) 자는 회부(晦夫), 호는 성암(誠庵)이며 본관은 광주(光州)이다. 이만구(李晩求)와 소눌(小訥) 노상직(盧相稷)에게 사사하였으며, 문학이 출중하여 세상에 이름이 높았다.

斯樓水抱又山回 사루수포우산회

平豁無涯地勢開 평활무야지세개

白日靑天人己去 백일청천인기거

丹楓黃菊客初來 단풍황국객초래

達官名士多題詠 달관명사다제영

明月淸風合擧盃 명월청풍합거배

安得鳳凰千仞氣 안득봉황천인기

朝陽昇處一徘徊 조양승처일배회

이 누각 물을 안고 또 산이 돌렸고

평활하여 가이 없는데 지세는 열렸구나

해는 밝고 하늘은 푸른데 사람은 이미 가버리고

단풍 붉고 국화 누른데 손님이 처음 왔네

달관 명사는 많은 시를 써서 읊었는데

밝은 달 맑은 바람이 술잔 들기 좋구나

어찌하여 봉황새 높이 나는 기원을 얻어서

아침해 돋는 곳에 한번 거닐어 보겠나

144詩 篇

朴敬遠 박경원(?~?) 1961년부터 1963년까지 경상북도지사를 역임하였다.

玉欄畵壁宿嵐煙 옥란화벽숙람연

世換時移度幾年 세환시기도기년

風物繁華云勝地 풍물번화운승지

江山鍾氣誕諸賢 강산종기탄제현

文忠高節增追慕 문충고절증추모

南子戰功奏凱旋 남자전공주개선

幸添知府表旌美 행첨지부표정미

可識奇緣非偶然 가식기연비우연

옥난간 그림 벽에 아지랑이 자욱한데

세상 바뀌고 때 옮김이 몇 해를 지났는고

풍물이 변화하니 좋은 땅이라 일렀는데

강산이 기운을 모았기에 제현이 탄생했네

포은의 높은 절개 추모함을 더하는데

남자의 전공은 개선가를 아뢰도다

다행히 감사의 책무로서 미덕을 정표하니

좋은 인연 우연이 아님을 가히 알겠노라

朝陽閣詩文集․103

鄭㝡朝 정취조(1800~1859) 자는 구지(久之), 본관은 동래(東萊)이다. 1834년 식년시 을과로 등과하여, 통정대부로 1840년부터 1841년까지 경주부윤을 역임하고, 대사헌과 판서를 역임하였다.

彩檻臨流屬晩晴 채함림류속만청

雞林歸路駐行旌 계림귀로주행정

村容蕭洒依山影 촌용소세의산영

客意蒼茫立水聲 객의창망립수성

滕閣高秋天一色 등각고추천일색

庾樓明月夜三更 유루명월야삼경

空岑鳳去朝陽在 공잠봉거조양재

悄倚棠陰愴古情 초의당음창고정

채색 헌함 물에 다달아 늦게야 개었는데

계림으로 가던 길에 깃발을 멈추었다

마을 모습 깨끗한데 산 그림자 의지했고

손의 뜻은 서늘하여 물소리를 듣고 섰네

등왕각 높은 가을 하늘은 한 빛인데

유공루 밝은 달에 밤은 삼경이로다

빈 산에 봉은 가고 조양각만 남았으니

아가위 그늘에 초연히 기대어 옛정을 슬퍼하네

朝陽閣詩文集․135

李啓夏 이계하(1841~1908) 자는 치현(穉賢), 호는 호관(濠觀), 본관은 전주(全州)이며 음직으로 부사와 비서승을 역임하였다.

羣山簇簇向樓迴 군산족족향루회

中有平川眼界開 중유평천안계개

瑞日高岡鳴鳳下 서일고강명봉하

夕陽芳草白鷗來 석양방초백구래

古人吟咏名題額 고인음영명제액

遠客登臨興引盃 원객등림흥인배

縹緲天涯依斗望 표묘천애의두망

霜前雁影獨徘徊 상전안영독배회

산들은 무리 지어 조양각을 향하여 도는데

가운데는 강이 흘러 눈앞이 트이도다

좋은 날 높은 뫼에서 봉이 울며 내려오고

해 지는 풀밭에는 흰 갈매기 날아든다

고인들이 읊어 놓은 이름난 현판 앞에

먼데서 온 손님 올라서니 흥겨워 술잔을 끄으네

아득한 하늘가에 북두칠성 바라보니

서리 내리는 앞에 기러기 그림자만 홀로 서성거리네

朝陽閣詩文集․113

李建栻 이건식(?~?) 1870년부터 1872년까지 영천군수를 역임하였다.

淸川一曲紫陽回 청천일곡자양회

蒼壁高臨畵閣開 창벽고림화각개

遠近山容林外控 원근산용임외공

平鋪野色眼前來 평포차색안전래

鳳鳴何去餘梧月 봉명하거여오월

客到無時擅酒盃 객도무시천주배

板上古賢詩獨在 판상고현시독재

永州太守悵徘徊 영주태수창배회

맑은 내 한 구비가 자양을 감도는데

푸른 벼랑 높이 솟아 화각이 열렸네

원근의 산 모습이 수풀 밖에 솟아 있고

평평하고 풍요한 들빛이 눈앞에 다가오네

봉황은 울다 어디로 가고 오동에 달만 남았으니

나그네 여기 와서 자꾸만 술잔만 기울이네

판상에는 고현들의 시만 홀로 남아 있으니

영주 태수는 슬퍼서 서성거리네

114詩 篇

黃河一 황하일(?~?) 회천삼감(懷川三鑑)이다.

嶺天萬里洛雲回 령천만리락운회

南國名樓此地開 남국명루차지개

千古朝陽丹鳳去 천고조양단봉거

四時明月白鷗來 사시명월백구래

江山留待文章筆 강산유대문장필

歌笛頻登太守盃 가적빈등태수배

一幅東城冠海左 일폭동성관해좌

蓬萊歸客自徘徊 봉래귀객자배회

영남의 하늘 만 리에 구름이 이어 둘렀는데

남국의 이름난 누각이 이 땅에 열렸네

천고의 조양에 단봉은 가고

사시로 밝은 달밤에 백구만 오는구나

강산은 머물러 문장의 붓을 기다리고

노래와 피리는 자주 태수의 술잔에 오르네

한 폭의 그림같은 동성은 해좌(영남)에 으뜸가서

봉래산에서 돌아온 나그네가 스스로 배회하네

128詩 篇

李道宰 이도재(1848~1909) 조선 말기 문신 자는 성일(聖一), 호는 심재(心齋)․운정 시호는 문정(文貞), 본관은 연안(延安)이다. 1882년 정시문과에 급제하여 홍문관부수찬․참의군국사무․좌부승지․성균관대사성 등을 지냈다. 1898년 다시 학부대신이 되어 지석영(池錫永)의 건의를 들어 한국 최초의 서양의학교육기관인 한성의학교(漢城醫學校) 설치를 인가했다. 그 뒤 내부대신․시종원경 등을 지냈다.

鳳去江南閱幾秋 봉거강남열기추

夕陽人在朝陽樓 석양인재조양루

覊愁不逐春風盡 기수불축춘풍진

芳草煙籠十里洲 방추연롱십리주

봉황이 가고 난 강남땅 세월은 몇 해나 흘렀던고

때는 석양인데 사람은 조양루에 머물러 있도다

나그네 수심은 봄바람이 다 지나가도 좇아버리지 못하는데

방초에는 연기가 자욱하여 십리 물가에 뻗혀 있네

116詩 篇

李敦相 이돈상(?~?) 가선대부로 1875년 경주부윤으로 부임하여 1876년 떠났다.

太守登斯日幾迴 태수등사일기회

臨流面面畵簾開 림류면면화렴개

一欄山色天邊逈 일란산색천변형

十里江聲野裡來 십리강성야리래

夜月宜聽佳妓曲 야월의청가기곡

斜陽堪把故人盃 사양감파고인배

丹禽不至黃侯去 단금불지황후거

誰是而今治郡才 수시이금치군재

태수는 하루에 몇 번이나 올랐던고

물가에 다달아 여러 가지로 그림 발을 쳤구나

한 헌함에 비친 산 빛은 하늘가에 닿았고

십 리 길 냇물 소리는 들 사이로 들려 오누나

달밤이면 아름다운 기생 소리를 듣고

해 지면 옛 사람의 술잔 잡을만하네

붉은 새는 오지 않고 황후는 가버렸으니

지금에 뉘가 있어 고을 다스리는 재주를 가졌겠나

62詩 篇

李萬稙 이만직(?~?) 1707년부터 1709년까지 영천군수를 역임하였다.

官堤楊柳抱樓回 관재양류포루회

江北江南一路開 강북강남일로개

大野浮光天際合 대야부광천제합

羣山積氣水中來 군산적기수중래

行人三到今停策 행인삼도금정책

太守重建且擧盃 태수중건차거배

宇宙獨留洪武字 우주독류홍무자

畵樑斜日悵遲徊 화량사일창지회

관제의 양류는 누각을 안고 두르고

강의 남북으로 한 길이 열리었네

큰 들에 뜬 빛은 하늘가에 닿았고

뭇 뫼에 쌓인 기운은 수중에 비쳐오네

나그네 세 번 와서 채찍을 멈추는데

태수가 중건하고 또한 술을 마시네

우주 가운데 홀로 홍무 때의 글을 남겼으니

단청된 들보에 해가 기우니 슬퍼 느릿느릿 배회하네

朝陽閣詩文集․145

李祥璿 이상선(?~?) 1961년부터 1962년까지 영천군수를 역임하였다.

我自知州一坡回 아자지주일파회

名樓慣眼鏡中開 명루안안권중개

麥岐誰頌張湛到 맥기수송장담도

續火還慚廉范來 속화환참렴범내

下物邑蘺難奏曲 하물읍리난주곡

高人風致幾?杯 고인풍치기어배

先生脚板今如古 선생각판금여고

不覺令渠悵望徊 불각영거창망회

내가 군수가 되어 한 언덕을 돌아보니

이름난 누각이 눈에 익어 거울 가운데 열렸네

보리 고개에 누가 장담이 도임한 것을 칭송할고

길삼하는 불에 도리어 염범이 온 것을 부끄러워하네

천한 사람이 울타리에 곡조하기 어렵고

높은 사람은 좋은 경치에 몇 잔이나 술잔 머금었던고

선생의 각판이 지금도 옛과 같으니

저로 하여금 창연히 바라보며 배회하게 함을 깨닫지 못하네

朝陽閣詩文集․111

李寅卨 이인설(1813~1882) 자는 은철(殷哲), 본관은 전주(全州)이며, 1860년 울산부사를 역임하였으며, 울산도호부 경내에 비가 남아있고, 1866년 정시문과에 급제하여 우참찬을 역임하였다.

百尺樓明鏡裏顔 백척루명경리안

鶴南飛舃坐來閒 학남비석좌래한

雙川遠地孤城出 쌍성원지고성출

疊嶂連天大野還 섭장연천대야환

日暖沙鷗眠雨後 일난사구면우후

時凊岡鳳降雲間 시청강봉강운간

筆酣墨醉初開眼 필감묵취초개안

驛樹斜陽度遠關 역수사양도원관

백 척 높은 누각 거울 속에 밝은데

학이 남쪽으로 날아와 한가롭게 앉았네

이수는 먼 땅 외로운 성에서 출원(出源) 했고

첩첩 봉우리는 하늘에 닿아 큰 들을 감돌았네

날이 따뜻하니 모래밭 갈매기는 비 갠 뒤에 졸고

때가 맑으니 언덕의 봉황은 구름 사이로 내려오네

필묵에 취해 처음으로 눈을 뜨니

역 나무에 비낀 볕이 먼 관문을 지나네

101詩 篇

李寅元 이인원(1782~1849) 자는 대재(大哉), 본관은 전주(全州)이며, 1837년부터 1839년까지 영천군수를 지내고 부사를 역임하였다.

丹霞淡淡白雲回 단아담담백운회

上有名樓好面開 상유명루호면개

水抱萬羣鷗鷺立 수포만군구로립

山停千仞鳳凰來 산정천인봉황래

有時爲報風中笛 유시위보풍중적

每夜宜傾月下盃 매야의경월하배

感慨先賢詩獨在 감개선현시독재

畵欄東角一徘徊 화란동각일배회

저녁노을 담담한데 흰 구름은 돌아오고

위에는 명루가 있어 멋진 모습으로 펼쳐있네

강물은 일만 무리의 갈매기와 백로가 서있는 것을 끌어안고

산은 천 길 높은데서 봉황이 와서 머물게 하네

때로는 바람결에 피리소리 보답하고

밤마다 달 아래서 술잔 기울이기에 마땅하도다

선현의 시가 홀로 남아있음에 감개하여

그림 같은 난간 동쪽 모퉁이에서 한번 배회하노라

朝陽閣詩文集․100

李寅元 이인원(1782~1849) 자는 대재(大哉), 본관은 전주(全州)이며, 1837년부터 1839년까지 영천군수를 지내고 부사를 역임하였다.

碧梧翠竹幾千秋 벽오취죽기천추

寂寂空留百尺樓 적적공류백척루

忽見東天紅日出 홀견동천홍일출

一雙靈鳥下長洲 일쌍영주하장주

푸른 오동과 푸른 대는 몇 천 년이나 흘렀던고

적적하게 공연히 백 척 누각에 머물렀네

갑자기 동쪽 하늘에 붉은 해가 돋는 것을 보고

한 쌍의 신령스러운 새 긴 물가에 내려오네

138詩 篇

李章鎔 이장용(?~?) 1901년부터 1902년까지 영천군수를 역임하였다.

遊鳳山前月正秋 유봉산전월정추

一聲長笛上南樓 일성장적상남루

州人尙說吾夫子 주인상설오부자

思入蒼葭白露洲 사입창가백로주

유봉산 앞에 달은 정히 가을인데

한 가닥 피리 소리는 남쪽 누각에 올라오네

고을 사람은 아직까지 우리 부자(夫子)를 말하는데

생각은 푸른 갈대 흰 이슬이 있는 물가로 들어가네

朝陽閣詩文集․139

李章鎔 이장용(?~?) 1901년부터 1902년까지 영천군수를 역임하였다.

北磵南谿永字迴 북간남계영자회

四山叢列畵綃開 사산총렬화초개

黃鶴隨僊雲外去 황학수선운외거

鳳凰鳴世月中來 봉황명세월중래

荐歉戈憂還愧祿 천겸과우환괴록

遠遊鄕思强耽杯 원유향사강탐배

再莅再看春色至 재리재간춘색지

昇平願祝暫徘徊 승평원축잠배회

뒷골 물 앞 시내 길 영자로 돌아 흐르는데

네 산이 열을 지어 그림 같이 열렸네

황학은 신선을 따라 구름 밖으로 가고

봉황은 세상을 울리며 달 가운데로 오네

흉년이 거듭되고 전쟁을 근심하니 녹 먹기 부끄럽고

멀리 와서 고향을 생각하여 억지로 술을 탐하네

다시 와서 다시 보니 봄빛은 한창인데

태평을 축원하며 잠시나마 서성이네

136詩 篇

李鍾瀅 이종형(1859~?) 본관은 경주이며, 1893년 알성시 병과에 급제하였다.

明沙翠壁抱城回 명사취벽포성회

盡日憑欄眼豁開 진일빙란안활개

畵閣纖歌雲外遏 화각섬가운외알

淸江暮笛雨中來 청강모적우중래

百年景仰先師韻 백년경앙선사운

千里登臨太守盃 천리등림태수배

怊悵難尋凰鳳跡 초창난심황봉적

等閒鷗鷺任徘徊 등한구로임배회

깨끗한 모래 푸른 벼랑은 성을 안고 도는데

해가 지도록 난간에 기대었으니 눈이 활짝 열리네

그림 누각의 간드러진 노래 소리 구름밖에 머물고

맑은 가람 석양의 피리소리 빗속에서 들려오네

백년토록 선사의 시를 우러르고

천 리 누각에 올라 태수의 술잔을 마시네

슬프다 봉황의 자취는 찾기도 어려운데

무심한 갈매기만 멋대로 떠도는구나

朝陽閣詩文集․117

李鶴來 이학래(?~?) 자는 운고(雲皐), 호는 청전(靑田), 본관은 전주(全州)이다. 1876년부터 1880년까지 영천군수를 역임하였다.

二水三山繞郡迴 이수삼산요군회

朱樓逈入碧雲開 주루형입벽운개

澄江不雨龍何出 징강불우용하출

瑞日于岡鳳自來 서일우강봉자래

登臨海內多岐路 등림해내다기로

離別人間有酒盃 이별인간유주배

圃老千年心不滅 포노천년심불멸

空懸明月獨徘徊 공현명월독배회

이수 삼산이 고을을 안고 도는데

붉은 누각 높이 솟아 구름 사이에 열렸도다

맑은 강에 비가 오지 않는데 용은 어디서 나며

상서로운 날 언덕 위에 봉황이 절로 오네

강산에 오르고 다달으니 갈림길 많은데

헤어질 사람에겐 술잔이 있구나

포은 선생 천 년에 마음은 없어지지 아니한데

하늘에 뜬 밝은 달이 홀로 배회하네

朝陽閣詩文集․137

李權祚 이권조(?~?) 호는 동암(東菴)이다.

小少離鄕旅幾秋 소소리향여기추

今來白首登斯樓 금래백수등사루

風煙如舊人何處 풍연여구인하처

只有沙鷗十里洲 지유사구십리주

어릴 적 고향 떠나 몇 해나 보냈던고

이제 백발을 이끌고 이 누각에 올라오니

자연은 옛 그대론 데 사람은 어디 갔느냐

다만 모래밭 갈매기 있어 십 리 물가에 뻗었구나

朝陽閣詩文集․119

林時益 임시익(?~?) 1886년부터 1890년까지 영천군수를 역임하였다.

駕舟携鶴永州回 가주휴학영주회

一上高樓眼忽開 일상고루안홀개

芳草烟籠連野合 방초연롱련야합

夕陽山翠渡江來 석양산취도강래

今人行樂前人跡 금인행락전인적

此日佳期後日盃 차일가기후일배

枕簟淸凉無俗慮 침점청량무속려

玉簫吹月月徘徊 옥소취월월배회

배를 타고 학을 이끌어 영주에 돌아들어

한 번 높은 누각에 오르니 눈 앞이 활짝 트이도다

방초는 연기에 잠겨 들에 이어 합해졌고

석양의 산 푸름은 강을 건너오네

지금 사람들의 행락은 옛 사람들의 발자취요

오늘의 아름다운 기약은 뒷날 술잔이 되리라

베개와 댓자리가 서늘하여 속된 생각 없어지고

달을 보고 옥피리 부니 달도 또한 배회하네

120詩 篇

林時益 임시익(?~?) 1886년부터 1890년까지 영천군수를 역임하였다.

白雲黃鶴幾經秋 백운황학기경추

從古名區有此樓 종고명구유차루

吟罷閒隨鷗鷺伴 음파한수구로반

扁舟載月下汀洲 편주재월하정주

백운과 황학이 몇 번이나 가을을 지냈던고

예부터 이름난 지구에 이 누각이 있었네

시를 읊고야 한가로이 구로와 짝하여 따르니

조각배는 달을 실어 물가로 내려가네

朝陽閣詩文集․121

沈定澤 심정택(?~?) 본관은 청송(靑松)이며, 1889년부터 1890년까지 하양현감을 역임하였다.

鶴影迢迢去不迴 학영초초거불회

舊樓猶向半天開 구루유향반천개

夜虛二水空明滴 야허이수공명적

雨歇三山積翠來 우헐삼산적취래

孤月幾留征客夢 고월기류정객몽

淸簫更勸故人盃 청소갱권고인배

謫仙遊跡今安在 적선유적금안재

芳草晴川且佇徊 방초청천차저회

학의 그림자는 아득히 가고 돌아오지 아니하고

옛 누각은 오히려 하늘 가운데 열려있네

밤이 고요한 이수에는 밝은 달 그림자 비춰 아름답고

비 갠 삼산에는 푸르름이 더해오네

외로운 달 몇 번이나 나그네의 꿈을 머물게 하였던고

맑은 피리소리는 다시 고인의 술잔을 권케 하네

이태백 놀다간 자취는 지금은 어디 있나

꽃다운 풀과 맑은 내가 또 머물러 배회하네

122詩 篇

沈定澤 심정택(?~?) 본관은 청송(靑松)이며, 1889년부터 1890년까지 하양현감을 역임하였다.

茫茫野色麥新秋 망망야색맥신추

柳下長江江上樓 류하장강강상루

沙鳥飛迴靑嶂遠 사조비회청장원

夕陽回首白雲洲 석양회수백운주

망망한 들 빛은 보리가 새 가을인데

버들 아래는 긴 강이오 강 위에는 누각이라

모래 벌엔 새가 날아 돌고 푸른 산은 아득한데

석양에 머리를 돌리니 흰 구름 머문 물가이네

朝陽閣詩文集․123

沈定澤 심정택(?~?) 본관은 청송(靑松)이며, 1889년부터 1890년까지 하양현감을 역임하였다.

五月江深冷似秋 오월강심랭사추

雨聲初夜上高樓 우성초야상고루

垂楊籬落孤燈逈 수양리락고등형

漠漠烟籠十里洲 막막연롱십리주

오월의 강물이 깊어 가을같이 차가운데

비 소리나는 초저녁에 높은 누각에 올랐어라

수양버들 울타리에 외로운 등불 비치고

끝없는 안개는 십리나 되는 물가에 자욱하네

124詩 篇

鄭煥圭 정환규(?~?) 호는 강오(岡梧)이며 본관은 영일(迎日)이다.

朝陽高閣水縈回 조양고각수영회

萬壑千岩次第開 만학천암차제개

古鄗參差官吏去 고호참치관리거

平沙近遠市人來 평사근원시인래

晴看新月那聞笛 청간신월나문적

遙憶前塵强把盃 요억전진강파배

司馬此行多曠感 사마차행다광감

山空抱落獨徘徊 산공포락독배회

우뚝 솟은 조양각은 물길이 감도는데

일만 구릉 일천 바위가 차례로 열렸구나

옛 고을이 가지런하지 아니함에 관리는 가고

평사 길 멀고 가까이 저자 사람이 오고 있네

개인 날 새 달을 보는데 어디서 피리소리 들려오고

멀리 옛 풍진을 생각하며 억지로 술잔을 잡았네

진사 이 번 걸음에 감개함이 많으니

산은 텅 비고 회포에 빠져들어 홀로 서성이네

朝陽閣詩文集․89

鄭基重 정기중(1783~1857) 자는 경후(景厚), 본관은 동래(東萊)이다. 1835년부터 1837년까지 영천군수를 지내고 부사에 이르렀다.

年光三百屬秋晴 년광삼백속추청

尙愛棠陰憩畵旌 상애당음게화정

飛閣逈臨雙鳳舞 비각형림쌍봉무

平郊橫割一江聲 평교횡할일강성

地同桑梓多傷感 지동상재다상감

治在蒲蘆誡變更 치재포로계변경

壁上佳篇看次第 벽상가편간차제

孰非餘蔭繼承情 숙비여음계승정

삼백 년 세월이 흘러 맑은 가을에 이르렀는데

아직도 옛 치적 사랑하여 행차를 멈추었네

날아갈 듯한 누각은 멀리 쌍봉이 춤을 추는데 다달으니

평평한 들은 한 강의 소리에 가로 갈라져 있네

이 땅이 뽕나무와 재나무 있는 고향 같아 감상이 많고

정치는 부들과 갈대처럼 자라기 쉬우니 변경함을 경계하네

벽 위에 아름다운 시편을 차례로 보니

뉘가 남은 음덕을 잇는 정이 없겠는가?

102詩 篇

鄭基轍 정기철(1795~?) 자는 사행(士行), 본관은 동래(東萊)이다. 1843년부터 1845년까지 영천군수를 역임하였다.

遊鳳山光笏外晴 유봉산관홀외청

高樓百尺捲簾旌 고루백척권렴정

早衙吏退稀公牒 조아리퇴희공첩

暮渡人歸散市聲 모도인귀산시성

爽若御風憑太素 상약어풍빙태소

靜宜邀月到深更 정의요월도심경

欣瞻遺墨摩挲久 흔첨유묵마사구

不負如今遠宦情 불부여금원환정

유봉산 밝은 빛이 홀 밖에 개어 있어

백척 높은 누각에 주렴 깃발 걷었네

이른 관아에 관리가 물러나니 공문서가 한가롭고

저문 나루터에 사람들이 돌아가니 저자도 조용하네

서늘하기는 바람을 탄 것 같으니 태고 때를 기대었고

고요하기는 달을 맞이하기에 적당하니 밤은 깊었네

기쁘게 남긴 글을 바라보며 만지기를 오래하니

지금에 먼 옛날 벼슬하던 정을 등지지 아니하네

朝陽閣詩文集․91

鄭世昌 정세창(1793~?) 자는 수이(壽而), 본관은 동래(東萊)이다. 영해부사를 역임하였다.

登臨此日趂春晴 등림차일진춘청

樓外羣峰似列旌 루외군봉사렬정

十里平沙多月色 십리평사다월색

四時急雨送灘聲 사시급우송탄성

舊題明遠今猶道 구제명원금유도

勝地繁華問幾更 승지번화문기경

蔭路孱孫來晩暮 음로잔손래만모

手攀遺墨不禁情 수반유묵불금정

등림하는 이 날은 봄 날씨 개임과 때를 맞추었으니

누각 밖의 뭇 봉우리는 열 지어 있는 깃발 같구나

십리 평평한 모래밭에는 달빛 가득하고

사시로 소낙비 내리니 여울 소리 들려오네

옛 현판 명원루는 지금까지 말이 전하고

경치 좋은 땅 번영을 묻노니 몇 밤이나 지났던고

음덕으로 벼슬길에 오른 잔미한 자손 늦게야 찾아와서

손으로 유묵을 어루만지니 감정을 금할 길 없네

104詩 篇

鄭基洛 정기락(1804~1878) 자는 이중(耳中), 본관은 동래(東萊)이다. 울산부사를 역임하였다.

南州行客伴秋晴 남주행객반추청

勝地登臨暫住旌 승지등림잠주정

楣上題詩前後蹟 미상제시전후적

灘頭流水古今聲 탄두류수고금성

棠陰已邈春猶在 당음이막춘유재

樓閣留傳歲幾更 누각유전세기경

二百餘年如昨日 이백여년여작일

諸孫次第感先情 제손차제감선정

남쪽 고을 가는 길손 맑은 가을 벗삼아

좋은 땅 다달아 가는 깃발 잠시 멈추네

처마 위에 쓴 시는 앞뒤의 발자취요

여울 가에 흐르는 물은 고금에 같은 소리네

당나무 그늘이 이미 오래나 봄은 그대로 오는데

누각은 전해옴이 몇 해나 되었던고

이백 년 긴 세월 어제 같은데

모든 자손 차례로 와 선조의 정을 느꼈네

126詩 篇

鄭善朝 정선조(1839~1898) 자는 치선(穉善), 본관은 동래(東萊)이다. 울산부사 기락(基洛)의 아들이며 아버지를 따라 조양각을 오른 15세 때 지은 시이다.

朝陽閣外暮烟晴 조양각외모연청

玉節何時住旆旌 옥절하시주패정

二百年前留手澤 이백년전류수택

十餘代後纘家聲 십여대후찬가성

悠懷古壑雲千里 유회고학운천리

往蹟高樓月五更 왕적고루월오경

曁我成童隨遠駕 기아선동수원가

且拚遺墨感先情 차변유묵감선정

조양각 바깥에 저문 연기 개었는데

사또 행차 어느 때 가는 길 멈췄던고

이백 년 전의 수택(선인의 필적)이 남았는데

십 여 대 후손이 가성을 이었구나

먼 회포 옛 구렁 구름은 천 리나 뻗치고

지난 자취 높은 누각 달은 오경이네

내 성동(15세)이 되어 멀리오는 수레를 따라와

유묵을 보고 기뻐 손뼉 치며 선조의 정을 느꼈네

朝陽閣詩文集․107

鄭寅國 정인국(1809~?) 자는 여정(汝定), 본관은 동래(東萊)이며, 1900년부터 1901년까지 영천군수를 역임하였다.

遊鳳山光入閣晴 유봉산광입각청

何年此地住巡旌 하년차지주순정

屛題板記餘遺蹟 병제판기여유적

野語城謠誦古聲 야어성요송고성

拈筆際逢秋七月 염필제봉추칠월

慕先依坐夜三更 모선의좌야삼경

南州千里登臨日 남주천리등림일

太守兒孫不勝情 태수아손불승정

유봉산 빛이 조양각에 들어 개었는데

어느 해 이 땅에 순행의 깃발이 머물렀던고

병풍 글씨와 현판의 기문은 자취가 남아 있고

야인의 말과 성중의 노래는 옛 소리를 외우네

붓을 잡으니 때마침 추칠월을 만나서

선조를 추모하여 깊은 밤에 의지해 앉아있네

남쪽 고을 천 리 길 등림한 이 날

고을을 맡은 아손이 정을 이길 수 없네

140詩 篇

曺兢燮 조긍섭(1873~1933) 조선 말기 성리학자 자는 중근(仲謹), 호는 심재(深齋), 본관은 창녕(昌寧)이다. 17세 때 곽종석(郭鍾錫)을 찾아가 태극(太極)․성리(性理) 등에 관하여 질문하고 토론을 벌였다. 당시의 개화론이나 서양의 근대 질서에 대해서 해박하면서도 전통적 도학(道學)의 입장에서 비판적인 태도를 취하였다. 저서로 『암서집(巖西集)』 『심재집』 『조명록(措明錄)』 등이 있다.

西遊閱月復東回 서유열월부동회

湖上名樓入眼開 호상명루입안개

天勢遙從山勢盡 천세요종산세진

江聲忽送雨聲來 강성홀성우성래

十年身世雙垂淚 십년신세쌍수루

千古風烟一擧杯 천고풍연일거배

鳴鳳朝陽今不見 명봉조양금불견

九霄深處空徘徊 구소심처공배회

서쪽에서 한 달을 지내고 동쪽으로 돌아오니

호수 위에 유명한 누각이 눈에 비쳐 열렸네

하늘의 기세는 멀리 산세를 따라 다하고

강 소리 홀연히 빗소리를 보내오네

십 년 신세(身世)를 생각하니 두 눈에 눈물이 흐르고

오랜 세월 아름다운 풍경은 한번 술잔을 들게 하네

울던 봉도 떠나버려 조양각엔 보이지 않으니

높은 하늘 깊은 곳을 바라보며 쓸쓸하게 거닐어 보노라

142詩 篇

崔恒黙 최항묵(?~?) 1934년 영천군수를 역임하였다.

大江東折又西回 대강동절우서회

列峀平郊一望開 렬수평교일망개

竹院僧鍾雲外落 죽원승종운외락

柳橋漁篴月中來 류교어적월중래

三千里內有名閣 삼천리내유명각

五百年間無數杯 오백년간무수배

樓與先生詩共在 루여성세시공재

至今人士誦徘徊 지금인사송배회

큰 강물이 동으로 꺾고 또 서로 돌았는데

벌린 묏부리와 평평한 들판 한 눈에 뵈는구나

죽림사 중의 종소리는 구름 밖으로 사라지고

유정교 어부의 피리소리 달빛 속으로 오누나

삼천리 안에 있는 유명한 누각이오

오백 년 동안에 수 없는 술잔이라

누각이 선생의 시편과 함께 있으니

지금도 사람들이 외우며 배회 하도다

98詩 篇

咸英錫 함영석(?~?) 자는 운경(雲卿), 본관은 강릉이며, 1834년부터 1836년까지 기장현감, 1840년에 흥해군수를 역임하였다. 연일현감 함정희의 아들이다.

江山依舊自縈回 강산의구자영회

畵閣巋然向日開 화각규연향일개

四百年前先祖去 사백년전선조거

一千里外後孫來 일천리외후손래

雙楣續唱仍留壁 쌍미속창잉류벽

三世淸遊繼把盃 삼세청유계파배

却憶童時陪過處 각억동시배과처

不勝餘感故徘徊 불승여감고배회

강산은 예와 같이 굽이굽이 둘러 쌓였는데

그림 같은 누각은 우뚝하게 해를 향해 솟았네

사백 년 전 선조께서 지나갔는데

일천 리 밖에서 후손이 찾아왔네

구 현판에 이어서 읊은 시는 벽에 걸렸고

삼 세의 청아했던 놀이에 연거푸 술잔을 잡네

문득 어린 시절에 배종해 지나갔던 곳을 생각하니

남은 감회를 이기지 못하여 일부러 돌아다니네

朝陽閣詩文集․99

咸英錫 함영석(?~?) 자는 운경(雲卿), 본관은 강릉이며, 1834년부터 1836년까지 기장현감, 1840년에 흥해군수를 역임하였다. 연일현감 함정희의 아들이다.

迢迢嶺路客重回 초초영로객중회

畵閣朝陽水面開 화각조양수면개

叨佩郡符千里遠 도패군부천리원

泣擎先墨百年來 읍경선묵백년래

南州物色徵詩草 남주물색징시초

北海風流接酒盃 북해풍류접주배

感古懷今追詠夕 감고회금추영석

滿樓明月照徘徊 만루명월조배회

멀고 먼 영남 길에 객이 다시 돌아오니

그림 같은 조양각이 물 위에 열렸네

과분하게 군수 인장을 차니 천 리 길은 멀었는데

울면서 선조의 글을 보니 백 년이 흘러왔네

남쪽 고을 물색은 시초(詩草)가 증빙하고

북해의 풍류는 술잔을 잡았네

옛을 느끼고 지금을 생각하며 추모하여 읊은 밤에

누각에 가득한 밝은 달빛이 배회함을 비춰주네

朝陽閣詩文集․127

許혁 허혁(1847~1905) 자는 사현(士賢), 호는 해촌(海村), 본관은 김해(金海)이다.

危樓勢若鳳騫回 위루세약봉건회

眺望無涯瑞色開 조망무애서색개

玉笛聲中明月冷 옥적성중명월래

靑山影裏大江來 청산영리대강래

古今不盡登臨地 고금부진등림지

迎送何多淺深盃 영송하다천심배

我欲乘秋鞭短蹇 아욕승추편단건

行尋宿趼更徘徊 행심숙견갱배회

높은 누각 그 형세 봉이 날아오르는 듯한데

바라봄에 상서로운 빛 끝없이 펼쳐졌네

옥피리 소리 가운데 밝은 달은 차가운데

푸른 산 그림자 속에 큰 강이 흘러오네

예나 이제나 등림하는 땅은 다하지 아니하고

맞이하고 보냄에 얕고 깊은 술잔은 얼마나 많았던고

가을을 틈타서 느린 말을 채찍질하여

찾아가는 길에 발병 나서 다시 배회하네

朝陽閣詩文集․125

許烒 허식(1837~1903) 자는 사함(士咸), 호는 강촌(江村), 본관은 김해(金海)이다. 1896년부터 1899년까지 영천군수를 역임하였다.

高樓壓水水縈回 고루압수수영회

太守登臨眼豁開 태수등림안활개

牛跡郊原秋雨歇 우적교원추우헐

魚腥墟市晩風來 어성허시만풍래

炎凉備閱餘雙鬂 염량비열여쌍빈

恩怨都忘把一盃 은원도망파일배

最是長安遙望地 최시장안요망지

不堪怊悵獨徘徊 불감초창독배회

높은 누각 강물 누르고 물은 굽이굽이 도는데

태수가 등림하니 눈이 활짝 열리네

소 발자취 남긴 들판에 가을비는 멎고

고기 비린내나는 저자에는 저녁바람 불어오네

염량세태 다 겪고 나니 두 귀밑 흰머리만 남았는데

은원을 모두 잊고 한잔 술을 잡았네

장안을 요망함에 가장 좋은 곳이라

슬픔을 견디지 못하여 홀로 서성거리네

118詩 篇

金奎升 김규승(?~?) 본관은 청풍(淸風)이며, 1884년부터 1885년까지 영천군수를 역임하였다.

四圍平野碧山回 사위평야벽산회

橫壓長川畵閣開 횡압장천화각개

圃老至今餘韻在 포로지금여운재

栗翁曾此幾時來 율옹증차기시래

敢期名郡携朱紱 감기명불휴주불

擬待康年引綠盃 의대강년인록배

况是我家遺愛地 황시아가유애지

板題一讀一徘徊 판제일독일배회

사방으로 평야가 둘러있고 푸른 산도 둘렀는데

긴 강 옆으로 누르고 그림 같은 누각이 열렸네

포은 선생은 지금까지 남긴 시가 있고

율곡 선생은 일찍이 어느 때에 왔던고

감히 이름난 골에 원님이 되어

풍년 들기를 기다려 녹빛 맛난 술을 들고 싶네

하물며 우리 조상이 어진 사랑 베푼 땅에

현판의 시 한번 읽고 한번 배회하노라

108詩 篇

金箕晳 김기석(?~?) 본관은 광산(光山)이며, 1845년부터 1847년까지 영천군수를 역임하면서 조양각과 청량당, 관청고 및 남문 등을 대대적으로 수리하였다.

南來符紱政高秋 남래부불정고추

遺什恭瞻水上樓 유집공첨수상루

勝地百年如昨日 승지백년여작일

風光依舊映虛洲 풍광의구영허주

벼슬하여 남으로 오니 완연한 가을인데

선조의 남긴 글을 공손히 물 위의 누각에서 쳐다본다

좋은 땅 백년이 어제 같은데

풍광은 예처럼 물가에 비쳤도다

朝陽閣詩文集․109

金箕絢 김기현(?~?) 본관은 광산(光山)이다. 1847년 울산부사를 역임하였으며, 울산도호부 동헌 내에 비석이 있다.

遺篇已過百秊秋 유편이과백년추

逝水悠悠擁一樓 서수유유옹일루

此日憑闌無限感 차일빙란무한감

浪花淘盡白蘋洲 랑화도진백빈주

선조가 남긴 글이 이미 몇 백년이 지났는데

가는 물은 유유히 한 누각을 안고 흐르네

이 날 난간에 기대어 하염없이 생각하니

낭화(물결이 부딪쳐 생기는 물방울)가 흰 부평초 있는 물가에 부딪쳐 흘러가네

146詩 篇

○斗熙 ○두희(~)

九十三年後仲秋 구십삼년후중추

家君作宰侍登樓 가군작재시등루

盥唫感慕當時事 관금감모당시사

那識迷孫到此洲 나식미손도차주

구십 삼 년이 지난 뒤 중추에

아버님이 군수 되어 모시고 누각에 오르네

손을 씻고 감모하여 당시의 일을 읊으니

어찌 못난 손자가 이 곳에 올 줄을 알았으랴

110詩 篇

沈明奎 심명규(?~?) 본관은 청송(靑松)이며, 1850년대 울산부사를 역임하였다.

桐鄕鄰紱此重回 동향린불차중회

俯仰山南一路開 부앙산남일로개

高閣尙留先世迹 고각상류선세적

名區如待後孫來 명구여대후손래

庭涵樹影仍停盖 정함수영잉정개

簷挹湖光復擧盃 첨음허광부거배

是日登臨非賞勝 시일등림비상승

摩挲塵壁暫低徊 마사진벽잠저회

이웃 고을 원님으로 동향(桐鄕)에 다시 올라오니

영남 땅 두루 돌아 한 길이 열렸구나

높은 누각은 아직까지 선세의 자취를 남기었고

이름난 땅은 후손이 오기를 기다리는 것 같네

뜰에 나무 그림자 덮이니 일산(日傘)은 머무르고

처마에 호수 빛이 비치니 다시 술잔을 드네

이 날에 등림함은 좋은 경치 구경하려 함이 아니라

옛 현판 어루만지며 잠시 머리 숙여 서성거리네

朝陽閣詩文集․97

金陽淳 김양순(?~?) 1833년부터 1834년까지 가선대부 경상도관찰사 겸 병마수군절도사 순찰사 대구도호부사를 역임하였다.

山縣平鋪麥隴晴 산현평포맥롱청

覊懷忽忽似縣旌 기회홀홀사현정

方春鶉鵠來村色 방춘순곡래촌색

落日鷄豚散野聲 락일계돈산야성

驛路輕寒猶着水 역로경한유착수

官樓細角已催更 관루세각이최경

新詩縱欲塤篪和 신시종욕훈지화

枕淚餘生可耐情 침루여생가내정

산골은 평평하고 보리밭 두들도 맑은데

나그네 시름 홀홀하여 깃발 달아맨 듯 하고

봄 맞은 메추리 따옥새 마을 경치를 더하는데

해질녁 닭과 돼지 들판에 소리를 퍼뜨리네

역마 길 가벼운 추위는 상기 물 가운데 남았는데

관루의 가는 호각소리 이미 밤을 재촉하네

시를 지어 흙피리와 대피리로 화답코자 하나

베개 위에 흘린 눈물의 정 어이 견디리

134詩 篇

金鎭協 김진협(1863~?) 본관은 청풍(淸風)이며, 1890년 별시 병과로 급제하였다. 영천군수를 역임한 김규승의 아들이다.

淸凉堂畔漫唫回 청량당반만금회

咫尺朝陽曙旭開 지척조양서욱개

川合西南穿野去 천합서남천야거

山從母子抱城來 산종모자포성래

耳醒草笛頻依檻 이성초적빈의함

眼亂籠紗倦擧盃 안란롱사권거배

最是郡齋連步武 최시군재련보무

晨昏隨暇此徘徊 신혼수가차배회

청량당 가에서 부질없이 시를 읊고 돌아오니

지척에 있는 조양각에 먼동이 트는구나

냇물은 서남에서 합하여 들을 뚫고 흘러가고

산은 모자산으로부터 뻗어 성을 안고 다가오네

귀는 풀피리 소리에 깨어 자주 헌함에 의지하고

눈은 사롱(紗籠)에 현란하여 게을리 술잔을 드네

관사가 가까이에 잇닿아 있는 것이 가장 좋으니

아침저녁 여가를 내어 여기에 배회하네

朝陽閣詩文集․147

○熙民 ○희민(~)

綠江一帶抱城回 록강일대포성회

車楚蒼然望眼開 차초창연망안개

樓起紅羅天下耀 루기홍라천하요

鳳遊黃帝閣中來 봉유황제각중래

晨昏勝地家千里 신혼승지가천리

山水宜人酒一杯 산수의인주일배

吾祖吾親詩在此 오조오친시재차

敬踰桑梓久徘徊 경유상재구배회

푸른 강 한 띠가 성을 안고 도는데

차초(車楚)가 창연하여 바라보는 눈이 열리네

누각은 붉은 비단 일으킨 것 같아 하늘 아래 빛나고

봉은 황제와 놀면서 누각 가운데로 오네

아침저녁으로 경치가 좋은 땅은 집에서 천 리 밖이고

산과 물은 사람이 사는데 마땅하니 술이 한 잔이네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시가 여기에 있으니

공경함이 고향보다 더해 오래도록 배회하네

148․四友契題名圖

永川朝陽閣四友契題名圖

영천조양각사우계제명도

天倫有五 朋友居一 천륜유오 붕우거일

無間胡越 情苟相得 무간호월 정구상득

况吾四人 幸生一國 황오사인 행생일국

登名聖朝 出宰南服 등명성조 출재남복

適會永陽 維暮之春 적회영양 유모지춘

芳尊旨酒 美景良辰 방준지주 미경양신

忘形痛飮 露出天眞 망형통음 노출천진

雲翻雨覆 鑑玆世人 운번우복 감자세인

臭蘭斷金 相古先民 취란단금 상고선민

歃血相盟 神會心同 삽혈상맹 신회심동

在家爲孝 許國盡忠 재가위효 허국진충

分災恤患 慶吉弔凶 분재휼환 경길조흉

益勸此心 有始有終 익권차심 유시유종

爰及子孫 永矢無窮 원급자손 영시무궁

或渝斯盟 有如天翁 혹유사맹 유여천옹

朝陽閣詩文集․149

천륜이 다섯이니 벗이 그 하나이며

호와 월이 사이가 없으면 진실로 정이 서로 통하네

하물며 우리 네 사람은 다행히 한 나라에서 났도다

성조에 벼슬하여 남쪽 고을 수령이 되어

마침 영양에 모이니 늦은 봄일세

향기로운 단지 맛있는 술 아름다운 경치 좋은 때다

마음놓고 마시고 나니 천진 마음 드러난다

구름 번득이고 비 쏟아지는 세상인심을 거울삼아

난초 향기 쇠 끊는 의리 옛 사람을 본받자

피 마시고 서로 맹세를 하니 정신이 합하고 마음이 같도다

집에서는 효도하고 나라 위해 충성한다

재난에는 서로 돕고 길흉에는 경조한다

이 마음 서로 권해서 시종이 같으리라

자손에게 미치도록 무궁토록 맹세하리

혹시나 맹세 변할까 하늘이 지켜보네

이 제명도는 성화 9년(1473) 당시 흥해․영천․경주․경산의 네 수령이 조양각에 모여 맺은 결의이다.

흥해 군수 이수붕(李壽朋)은 관향이 흥양이며 통훈대부이다. 아버지는 가선대부 행 전주부윤 휘 언(堰)이며 청백리이다. 외조부는 승훈랑 운봉 감무인 이수지(李粹之)로 관향은 성주이다.

영천 군수 김양완(金良琬)은 관향이 상주이며 통훈대부이다.

150․四友契題名圖

아버지는 증 가선대부 병조판서이며 행 선무랑 문화 현감 휘 효민(孝敏)이다. 외조부는 조산대부 지고성군사 박중유(朴仲游)로 관향은 죽산이다.

경주 판관 김영수(金永銖)는 관향이 안동이며 조산대부이다. 아버지는 조산대부 행 한성판관 휘 계권(係權)이다. 외조부는 숭정대부 예문관 대제학 증 시호 제평(齊平)인 권맹손(權盟孫)으로 관향은 예천이다.

경산 현령 금휘(琴徽)는 관향이 봉화이며 봉직랑이다. 아버지는 승훈랑 행 은진 현감 휘 회(淮)이다. 외조부는 통훈대부 지평주사로 양도(梁導)이며 관향은 남원이다.

 

朝陽閣詩文集153

徐居正 서거정(1420~1488) 조선 초기 문신․학자. 자는 강중(剛中), 초자는 자원(子元), 호는 사가정(四佳亭)․정정정(亭亭亭), 시호는 문충(文忠), 본관은 달성(達城)이며 권근(權近)의 외손이다. 1444년 식년문과에 급제, 사재감직장을 시작으로 여섯 왕을 섬겨 45년간 조정에 봉사하며 달성군(達城君)에 봉하여졌다. 저술로 『역대연표』 『태평한화골계전(太平閑話滑稽傳)』 『필원잡기』 『동인시문(東人詩文)』 등이 있고, 대구의 구암서원(龜巖書院)에 제향되었다.

明遠樓記

명원루기

永慶尙一道之美郡也與吾鄕大邱不遠

영천은 경상 한 도 안에 아름다운 군으로서 우리 고장 대구와 멀지 않다.

歲戊辰居正謁太守孫先生士晟先生曰稱郡曰永取二水之義盖二水發源於母子山分二派折而南流抵郡前合爲一所以揭號也

무진년에 거정이 태수 손 선생 사성을 보고 말하기를 ‘이 군을 영(永)이라 일컫는 것은 이수(二水)를 취한 뜻이니 대개 이수의 근원이 모자산에서 나와 두 갈래로 나뉘어 다시 꺾어져 남쪽으로 흐르다가 이 고을 앞에 이르러 하나로 합했기 때문에 이렇게 이름을 지은 것이다.’ 하였다.

154․記文編

先生拉余登高眺覽余試得山川形勝之大槩至於樓觀不甚華藻

선생이 나를 끌고 높은 곳에 올라 바라보기에 내 시험삼아 산천 좋은 경치를 대략을 써 보았으나 명원루의 경관에 이르러서는 몹시 화려한 글이 되지 못했다.

粤壬午秋居正奉使到永知郡金先生德源邀余登樓觴詠終日

그 뒤 임오년 가을에 거정이 사신이 되어 영천에 이르니 지군 김 선생 덕원이 나를 맞아 함께 누각에 올라 종일토록 술을 마시며 글을 읊었다.

樓觀之制作宏敞曠豁丹碧炫耀異於昔時迺前太守鄭公次恭重新也

누각의 건물이 크고 넓으며 붉고 푸른 빛이 아름다워 옛날과 다르니 이는 이전 태수 정차공 공이 중수하여 새롭게 한 것이다.

於乙未居正奉使重過粤戊戌秋巡察南道歷訪名樓如晋之矗石安之映湖密之嶺南蔚之太和梁之雙碧金之鷰子皆各擅名而斯樓形勝亦可伯仲於其間明遠樓則過之

을미년에 거정이 사신이 되어 다시 이곳에 왔었고 그 뒤 무술년 가을에 남도를 순찰하면서 이름난 누각을 두루 찾았으니 진주의 촉석루, 안동의 영호루, 밀양의 영남루, 울산의 태화루, 양산의 쌍벽루, 김해의 연자루 등은 모두 각각 이름난 곳인데

朝陽閣詩文集155

이 누각의 경치 또한 그 서로가 비슷하였으나 명원루는 이 보다 나을 것이다.

時宰金侯克練有盤錯之才改構東西別室體勢得宜余嘖嘖稱賞

그 때 김극련 군수가 번잡한 일을 잘 처리하는 재능이 있어 동서 별실을 고쳐지었는데 모양새를 알맞게 하였기로 내 몹시 칭찬하였다.

久之壬寅秋申侯允宗出宰下車不數月政通人和不苛而嚴改構東別室翼以小軒名曰淸凉堂又闢西別室增大之翼以小軒名曰雙淸堂皆極精緻

그 뒤 오래되어 임인년 가을에 신윤종 군수가 부임하였는데 부임한 지 몇 달 되지 않아 정치가 잘되고 사람들이 화합하여 까다롭게 하지 않고서도 저절로 엄하게 되었다. 이에 동쪽 별실을 고쳐 짓고 거기에 조그마한 난간을 붙여지어서 이름을 청량당이라 하였다. 또 서쪽 별실을 만들어 더 크게 해서 난간을 붙여 지은 다음 이름을 쌍청당이라 하였는데 모두가 극히 정교하고 세밀했다.

乙巳慨然有重新斯樓之志補殘理缺又施丹堊精彩百倍於前別構庖廚九楹樓之制至此大修

을사년에 개연히 이 누각을 새로이 고칠 생각이 있어 낡은 곳은 보충하고 찌그러진 곳은 고치며 또 단청을 새로하니 정

미롭고 빛나기가 전보다 백배를 더하였다. 따로이 포주 아홉

156․記文編

칸을 만드니 누각의 제도가 이에 이르러 크게 달라졌다.

間因姪子彭召索余記余以爲明遠有樓已久自高麗迄今過是郡英雄豪傑文人才士不知其幾而曾無題記顧余何人强顔爲之以此依違者

그 사이에 조카인 팽소(彭召)를 인하여 나를 찾아 나에게 기문을 요청하였다. 내가 생각하니 명원루가 있은 지 이미 오래되어 고려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이 고을을 지나간 영웅, 호걸, 문인, 재사들의 수효가 얼마나 되는지 알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일찍이 기문이 없었다. 내 자신을 돌아보면 내가 어떤 사람이기에 낯가죽 두껍게 기문을 쓰랴 싶어 이러한 까닭으로 글 쓰기를 미루어 왔다.

有日今復勤請辭不獲己乃言曰

여러 날 뒤에 와서 이제 다시 누차 간곡하게 청하니 사양할 길이 없어 이에 말하기를

余嘗問明遠之義於郡之一二父老有佛宇荒雜之說可付之一笑

내 일찍이 명원의 뜻을 이 고을의 한두 부로들에게 물었더니 불우(佛宇)의 황잡한 말을 하므로 나는 한 번 웃고 그만두었다.

念韓愈詩有遠目增雙明之句明遠之義意或出此

朝陽閣詩文集157

생각하건데 한유(韓愈)의 시에 ‘먼 곳을 보는 눈이 갑절로 밝은 것을 더했다’는 구절이 있는데 명원의 뜻은 혹시 여기에서 나온 것인가.

觀夫畵棟飛甍重簷曲欄八面洞開四望通濶明朗爽塏宏敞曠豁上摩于天明星可摘下臨無地明川可掬

보건데 그림 그린 기둥, 나는 듯한 대마루와 겹으로 된 처마, 구부러진 난간이 팔면으로 활짝 열려 있어 사방으로 바라보아도 모두 통해서 명랑하고 상쾌하며 크고 넓어서 위로 하늘에 닿아 밝은 별을 딸만하고 아래로 땅이 없어 맑은 냇물을 움켜 쥘 만하다.

乾坤淸寧風月光霽四時朝暮光明瑩澈之氣長在簾櫳几席之中脫俗氛絶纖塵無一點瑕纇間於其間此所謂明也

하늘과 땅이 맑고 편안하며 바람과 달이 활짝 개어서 사계절의 아침과 저녁이 광명하고 맑은 기운이 길이 발과 책상 가운데 있고 세속의 티를 벗어나고 세상 티끌을 끊어 한 점 티도 그 사이에 없으니 이야말로 명(明)이라 할 것이오.

望之則羣山繚繞列岳嵯峨攢靑聳碧出沒煙雲杳靄之間渺不知其幾千百里

바라다보면 모든 산이 둘러 쌓이고 여러 뫼뿌리가 높고 높아서 푸르게 튀어나고 푸르게 솟아있는 것이 연기와 구름이 아득한 안개 속에 출몰하여 저 멀리 몇 백리 몇 천리인지 알

158․記文編

수 없다.

長林大野逶迤平楚黃畦綠塍縱橫延袤天長無際鳥飛不盡夐不知崖岸此所胃遠也

긴 숲과 큰 들판은 꾸불꾸불 평탄하며 누런 밭두둑 푸른 들판 가로 세로 뻗쳐있어 하늘이 길어도 끝이 없고 새가 날아도 다하지 못하여 저 멀리 끝간데를 알지 못하겠으니 이른바 원(遠)인 것이다.

登斯樓者非檐帷棨戟之大夫必搢紳簪纓之君子皆有高明遠大之見騁目遐矚於明遠之義必心會而自得者矣

이 누각에 오르는 자는 지방에 행차하는 대부가 아니면 반드시 높은 벼슬을 한 군자들로서 모두 고명하고 원대한 식견이 있는 사람들이라. 눈을 굴려 멀리 명원으로 한 뜻을 보게되면 반드시 마음으로 이해하고 스스로 얻을 것이다.

前後爲守者亦皆有明斷之才宏遠之器雖營締細事亦張皇布置或補或增或修或改其用心不亦勤乎

전후에 원님이 된 자가 또한 모두 밝게(明) 판단하는 재주와 크고 먼(遠) 그릇이 있어서 비록 조그마한 일을 경영하는 데도 역시 여러모로 계획해서 혹은 보충하고 혹은 더하며 혹은 수리하고 혹은 고쳤으니 그 마음 쓰는 것이 역시 부지런하지 않은가.

朝陽閣詩文集159

於乎明遠之義大矣哉夫人視壅則不明不明則不遠君子居高明窮遠眺視遠惟明然後可以理達而事成於樓獨不然乎

아! 명원이란 뜻은 크다고 할 것이다. 대체 사람들이 시계가 막히면 밝지 못하고 밝지 못하면 멀리 보지 못할 것이니 군자가 고명하고 궁원한 데 거하여 먼 데를 보는 것이 오직 밝은 연후에라야 가히 이치가 통달하고 일이 이루어질 것인즉 누각이라고 유독 그렇지 않겠는가.

申侯爲郡六年從事於斯以政最聞褒詔徵還亦將不日聲名之尤益著明傳於悠遠也無疑矣

신 군수가 군을 다스린 지 6년에 여기에 종사하여 정치를 잘한다고 조정에 알려지자 칭찬하고 머지 않아 왕명으로 불러들이게 되었으니 또한 장차 성명이 더욱 밝게 나타나고 유원토록 전해질 것이 의심이 없을 것이다.

居正添長太史不可不大書特書美之姑書爲記

거정이 태사의 장(長)이 되었으니 불가불 크게 쓰고 특별히 써서 아름답게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렇게 써서 기문으로 삼노라.

160․記文編

李建栻 이건식(?~?) 1870년부터 1872년까지 영천군수를 역임하였다.

朝陽閣重修記 ①

조양각중수기 ①

嶠南諸州有高閣名樓者殆十有餘所而永之朝陽亦其一也凡樓閣臺榭之設必擇地形之最勝以備後人之遊觀而已

교남의 여러 고을에 높은 각과 이름난 누이 있는 곳이 열 곳이 넘는데 영천의 조양각이 그 중 하나이다. 무릇 누각과 대사를 건립할 때 반드시 지형이 가장 좋은 곳을 선택하는 까닭은 후인들이 놀고 관람하기 좋도록 할 따름이다.

宜若無補於行政出治之本而其廢興成毁則實有關於邑之氣數也

행정을 다스리는 근본에는 도움이 없는 것 같으나 그 폐하고 흥하고 이루고 허무는 일은 실로 읍의 기수와 관계가 있다.

今是閣也創輯年久黝剝頹傾其將不幾而爲荒塵茂草過者發嘆焉

朝陽閣詩文集161

이제 이 누각이 건립된 해가 오래되어 모양이 변하고 기울어져 장차 얼마동안 지나면 황진무초가 되어 지나가는 사람들이 탄식하리라.

余莅郡之粤三年春邑人咸願重修僅鳩財數千緡易其朽桷改其覆瓦而幷以丹雘施之凡用工六七朔功告訖矣

내가 이 고을에 부임한지 삼 년 되는 봄에 읍인이 다 중수를 원하기에 겨우 모은 돈 수천 냥으로 썩은 재목을 바꾸고 기와를 고치고 아울러 단청을 하여 시작한 지 육칠 개월만에 완공되었다.

登斯望之則四圍峰巒若近若遠有如畵圖之英像而朱南鉅野當楹而呈豁紫梁大川環墻而作滙

이 누각에 올라 바라본 즉 사면으로 봉만이 둘러있는 모양이 가까운 듯 먼 듯하여 화도의 기상이 있는 듯하고 주남 넓은 들이 헌함에 닿아 넓음을 나타내고 자량과 대천이 원장을 둘러 회수를 이루었다.

非獨爲嶠州之勝也雖關西之練光浮碧亦何以愈此乎

한갓 영남에만 좋을 뿐 아니라 비록 관서의 영광정과 부벽루가 또한 어찌 이 누각보다 낫겠는가.

古語云不一勞則不永寧今官與民一時之勞庶足爲後之官民百世之永寧曷不休哉

162․記文編

옛말에 이르기를 한 번 노력하지 않으면 영원히 편안하지 아니하다 하였는데 이제 관민의 일시적인 노고가 후일에 관민백세의 편안함을 위한 것이니 어찌 아름답지 아니할까?

遂摭其實而畧紀之

마침내 그 사실을 간추려 간략하게 기록하노라.

朝陽閣詩文集163

張潤圭 장윤규(?~?) 1920년부터 1923년까지 영천군수를 역임하였다.

朝陽閣重修記 ②

조양각중수기 ②

邑之有樓觀若無與於爲政而至夫鳴琴之淸暇怡神使車之行過憩役則不能無待乎樓觀况承代補弊修飾亭館亦爲政之不可闕者乎

고을에 누각이 있는 것이 정사를 하는 것과 관계가 없는 것 같지만 저 거문고를 타서 청아한 여가에 마음을 평안히 달래는 것과 사신의 행차가 지나면서 휴식을 취한 일들은 누각에 기대하지 않을 수 없다. 하물며 대를 이어 폐단을 바로잡고 누정과 객관을 수리장식하는 것이 또한 위정에 가히 빠질 수 없음에 있어서랴.

嶺之南列郡名勝若永嘉之映湖晋陽之矗石凝川之南樓曁永州之玆樓最其雄者也

영남 여러 고을의 명승 중에 안동의 영호루, 진주의 촉석루, 밀양의 영남루 및 영천의 이 누각이 가장 뛰어난 것들이다.

164․記文編

樓在郡治之南百步許臨于川上山圍周遭長郊曠原二水回焉

누각은 군청의 남쪽 백 보 가량의 강 위에 산이 에워싼 곳에 다달았고 주위로는 길게 뻗은 들과 넓은 언덕과 이수가 둘러쌌다.

軒敞爽塏不可具狀且邑居蕃庶地大物弘實東南之一吳會也

누각이 높고 넓어 시원함은 가히 형용할 수 없으며, 또 읍의 인가가 번성하고 땅이 크며 물자가 많아 실로 동남지방의 큰 도시이다.

在昔洪武己酉太守李容氏創建而扁曰明遠所以寫勝摹景得盡其意

옛날 홍무 기유년(고려 공민왕 18년, 1369)에 태수 이용 씨가 창건하고 명원루라 편액하니 승관과 경치를 모사한 말로서 그 뜻을 남김없이 다 얻은 것이다.

至崇禎年間廢而改作易以朝陽瑞世之號盖以鳴鳥之聞而象之云

숭정 연간에 폐하여 다시 짓고 조양각과 서세루라 이름을 바꾸었으니 다 봉황새의 울음소리가 들릴 것을 상징한 것이라 한다.

庚申春余自榮州來莅于玆周觀廨宇則樓至傾頹不無虛凌興廢

朝陽閣詩文集165

之感

경신년(1920) 봄에 내가 영주로부터 여기로 부임하여 두루 관청의 집들을 살펴본 즉 누각이 기울고 무너질 지경이라 누각의 흥폐에 대한 느낌이 없지 않았다.

越明年歲熟民和政簡而務間謀重葺斯樓而力詘未擧郡人聞之樂爲之捐金以相役可謂家義而戶禮遠近大小官人皆獎而董成郡之兩係主任十四面長尤爲効勞者也

그 이듬해에 풍년이 들어 백성들이 화합하고 정무가 거의 없고 한가함에 이 누각을 중수할 것을 도모하였으나 힘이 부족하여 거행하지 못하였더니 군민들이 듣고는 즐거이 돈을 의연하여 서로 힘쓰니 가위 집집마다 같이 물자를 출연하고 원근 대소 관인들이 다 장려하고 독려하여 이룩하겠다고 하였으니 군의 양 계장과 14개 면장이 더욱 노고를 아끼지 않은 사람들이다.

經始於是歲壯月匠氏殫力鉅斧者瓦者墁者丹雘者執藝偕作才五旬而告功

이 해 8월에 경영하기 시작하니 장인들이 힘을 다하였다. 짜구질 하는 사람, 도끼질 하는 사람, 기와이는 사람, 토역질 하는 사람, 단청하는 사람들이 기술껏 같이 지으니 겨우 50일만에 완공하였다.

於是乎輪奐盡美山川改觀迺以良月之下浣落之適丁一府四郡

166․記文編

之大和會會者以萬計相與飮于樓上亦可謂二難四美之具焉

이에 누각이 장대하고 훌륭하여 아름다움을 다하니 산천의 경관까지 달라졌다. 그리하여 10월 하순에 낙성하니 때마침 1부와 4군의 대화회 때라 모인 사람들이 만여 명이 되어 서로 더불어 누각 위에서 음주함에 또한 가위 이난(二難, 賢主와 嘉容)과 사미(四美, 좋은 때, 아름다운 경치, 감상하는 마음, 즐기는 일)를 갖추었다 하겠다.

夫政以安民爲本而民樂斯樓之成則其關於政也曷可少之哉

무릇 정치란 안민을 근본으로 삼으니 백성들이 이 누각이 이룩된 것을 즐거워하는 것인 즉 그 정치에 관계됨을 어찌 작게 여기리오.

前人詩板存者揭之圃隱原韻四佳舊記旣遺佚故重刻而懸于其上若樓之故事詳在郡誌玆不復贅云

전인들의 시판이 있는 것은 걸고 포은 선생의 원운과 사가 선생의 구 기문은 이미 유실된 까닭에 다시 새겨 그 위에 걸고 누각의 고사 같은 것은 군지에 상세히 있으므로 여기에 다시 췌언을 붙이지 않는다.

朝陽閣詩文集167

鄭島榮 정도영(1901~1979) 자는 화일(華一), 호는 백파(白坡)이며, 본관은 오천(烏川)이다. 제헌국회의원, 헌법기초위원을 역임하였으며, 국민훈장무궁화장을 서훈 받았다.

朝陽閣重修記 ③

조양각중수기 ③

永州之南岸臨江翼然者朝陽閣也卽古之明遠樓也創建不知在何代而自圃隱鄭先生後六百年間大修小修亦不知幾番幾十也

영천의 남쪽 언덕에 강을 임하여 우뚝하게 높은 건물은 조양각이니 바로 옛날의 명원루이다. 창건한 것은 어느 시대인지 알 수 없으나, 포은 선생으로부터 뒤로 육백 년 동안 크게 보수하고 작게 보수한 것이 또한 몇 번인지 몇 십 번인지 알지 못한다.

乙酉因美兵暫駐頹廢莫甚故余與李泰洙倅欲修理鳩材値民擾未果越丁亥太守崔孝卿莅州半年重建郡廳舍驅餘力修鄕校及玆樓少不煩民郡之全貌一新偉哉崔候之功際此混亂不遑於他而能如是者寔出於生長斯樓之鄕愛護斯鄕之誠也

을유년(1945)에 미군이 잠시 주둔함으로 인해 퇴폐가 막심하였으므로 내가 이태수 군수와 함께 수리코자 하여 재료를 모았으나 민요(10․1 폭동)를 만나 성취하지 못하고 해를 넘

168․記文編

겨 정해년(1947)에 태수 최효경이 이 고을에 부임한 지 반년에 군청사를 중건하고 남은 힘을 몰아부쳐 향교 및 이 누각을 보수함에 조금도 백성을 번거롭게 하지 아니하고 군의 전모가 일신되었으니 거룩하도다 최 군수의 공이여! 이 혼란한 때를 즈음하여 다른 일에 겨를이 없었음에도 능히 이 같이 한 것은 이 누각이 있는 고을에 생장하여 이 고을의 정성을 사랑하고 보호하는 데서 나온 것이다.

工訖崔候語余曰斯樓也東國之異觀吾鄕之勝蹟何以則不罹浩劫而長存也余笑曰凡所有相皆是虛妄斯樓之構造雄健太守之治工堅實終不免有相中一物也安得脫天地氣數之盛衰而不朽哉

공사를 마치고 최 군수가 나에게 말하기를, ‘이 누각은 동국의 기이한 경관이오, 우리 고을의 뛰어난 고적인데 어찌해야 급격한 재난에 걸리지 아니하고 길이 보존 할 것인가?’ 라고 하였다. 내가 웃으면서 말하기를, ‘무릇 형상이 있는 것은 다 허무한 것이니 이 누각의 구조가 웅건하고 태수의 공사를 감독함이 견실하지마는 마침내 형상이 있는 것 중의 한 물건임을 면치 못할 것이다. 어찌 천지의 기수(氣數)의 성하고 쇠함을 벗어나서 썩지 않겠는가?

但鄕運綿遠繼述崔太守者間世而出隨缺修補則應與山川風物之壯麗俱存而名賢達士文人韻客之嘯詠不絶矣侯然之而求余記略記其顚末也

朝陽閣詩文集169

다만 고을의 운수가 멀리 이어져서 최 태수를 계술할 사람이 간세(間世 : 세대가 조금 떨어짐)로 나서 이지러지면 따라 보수할 것 같으면 아마 산천의 풍물의 장려함을 더불어 함께 보존하여 명현 달사와 문인 운객(韻客 : 운치있는 손님)의 소영(嘯詠 : 소리를 길게 내어 가사를 읊음)이 끊어지지 않을 것이다.’ 라고 하니 군수가 ‘그렇다’ 하며 나에게 기문을 청구하니 그 일의 전말을 간략하게 기한다.

檀君紀元四千二百八十年腊月望日鄭島榮記

단군기원 4280년(1947) 섣달 보름날 정도영 기하다.

170․記文編

鄭崋植 정화식(1906~1977) 자는 성관(聖觀), 호는 동릉(東陵)이며, 본관은 오천(烏川)이다. 낭산(朗山) 이후(李垕)에게 사사를 받았으며, 18세에 북산서당(北山書堂) 상량문을 지었으며, 문장과 예학으로 당대에 칭송을 받았다.

朝陽閣重修記 ④

조양각중수기 ④

物之廢興關氣數大矣曩者北狄之至雄都名樓擧被燹厄而永之朝陽閣僅得保焉永南徼要衝天下無事則已有事則永必受其鋒猶禹湯之有洛陽也閣正在州之面被全噬而不至墟其非幸歟

만물의 폐하고 흥하는 것은 기수(氣數)에 관계됨이 크다. 옛날 북녘 오랑캐가 이르렀을 때 웅장한 도시와 이름난 누각이 다 병화의 화액을 입었으되 영천의 조양각은 겨우 보존되었다. 영천은 남쪽 변방의 요충지인즉 천하가 무사하면 그만이지마는 유사하면 영천이 반드시 그 칼날을 받게되는 것이 중국의 우(禹)와 탕(湯)에 낙양(洛陽)이 있는 것과 같은 것이다. 조양각은 바로 고을의 전면에 있어서 온전히 삼켰지마는 폐허에 이르지 않았던 것은 그 다행이 아니겠는가?

閣之創在麗季而一經劫亂必隨而嗣葺至于今屹然存矣高候光

朝陽閣詩文集171

燁承酷亂之後自榮州莅玆州凡三載興廢蘇瘵不遺餘力而暇日屨反于是閣隱古蹟之荒圯與州之人士謨所以重新之請資於巡府取材於兵敞不日而輪奐焉

조양각을 창건한 것은 고려 말기였으나 한번씩 심한 난리를 겪고서는 반드시 때를 따라 이어 보수하여 지금에 이르도록 우뚝하게 서있는 것이다. 고 군수 광엽이 혹독한 난리의 뒤를 이어 영주로부터 이 고을에 부임한 지 무릇 3년에 폐한 것은 부흥하고 병든 곳은 소생시키느라 여력이 없었는데도 여가 날에 발걸음을 이 누각으로 돌려서 고적의 황폐하고 무너진 것을 측은하게 생각하여 고을의 인사들과 함께 다시 새롭게 할 것을 의논하여 순부(巡府 : 도청)에 자본을 청구하고 병창(兵敞)에 재목을 구하여 여러 날이 되지 않아 크게 빛나게 공사를 마쳤다.

余適有省親行道閣之下宗人島榮君以高候之意屬余文以記之噫閣古明遠樓也名公巨卿鴻儒碩德詩賦記頌題在上頭而備矣

내가 마침 어버이를 뵙기 위해 가는 길에 누각의 아래에 있는 종인(宗人) 도영 군이 고 군수의 뜻이라 하고 나에게 기문을 써줄 것을 부탁하였다. 아! 조양각은 옛날 명원루이다. 명공(名公) 거경(巨卿)과 홍유(鴻儒) 석덕(碩德)의 시부(詩賦)와 기송(記頌)이 위 처마의 현판에 쓰여져 구비되어 있다.

雖然不變者風煙改觀者人模也試憑檻焉二水中分三山半落而

172․記文編

若夫十里長堤芳草雨歇三道虹橋車輪電掣而學舍夾起琅玕叢集野壘連營豼貅騰揚其登臨之際寓於目而感於心者視古果何如也

비록 그러나 변하지 않는 것은 풍연(風煙 : 산천 경치)이오, 경관을 고치는 것은 사람의 지모이다. 시험삼아 헌함에 기대어 보면 이수(二水)는 중분하고 삼산(三山)은 반락한데 십 리 긴 제방의 방초에 비는 멈추고 삼도(三道)의 무지개다리에 차륜은 번개처럼 빨리 달리고 학사(學舍 : 학교)를 옆에 끼고 옥돌같은 학생들이 떼지어 모여들며, 들에 작은 성은 병영과 연접하여 비휴(豼貅 : 전설상의 사나운 짐승)가 날아오르는 것 같은 것은 등림하는 즈음에 눈에 들어오고 마음에 느끼는 것이 옛날을 돌이켜 보면 과연 어떠하겠는가?

况經過浩劫得賢候而煥新尤有感於氣數也候曾在榮州修南樓今又有是擧亦可謂牛刀恢如也第待夜深月明之時携村酒橫漁笛慰候於閣上尙未晩也姑書顚末以爲朝陽閣重修記

하물며 오랜 세월을 경과하여 어진 원님을 얻어서 빛나게 새롭게 보수하였으니 더욱 기수(氣數)에 관계됨을 느낀다. 원님은 일찍 영주의 군수로 있을 때 남루(南樓)를 중수하였고, 이제 또 이 거사를 하였으니 가히 우도(牛刀 : 군수를 말함)의 도량이 크고 넓다고 말할 것이다. 다만 밤이 깊고 달이 밝을 때를 기다려 마을의 술두루미를 끌고 고기잡이 젓대를 부르면서 누각 위에서 원님을 위로하는 것이 아직 늦지는 않을 것이

朝陽閣詩文集173

다. 잠시 일의 전말을 써서 조양각의 중수기를 삼는다.

歲丙申初夏烏川鄭崋植記

병신년(1956) 초여름에 오천 정화식 기한다.

174․記文編

曺圭喆 조규철(1906~1982) 호는 숙야재(夙夜齋) 또는 우인(于人)이며, 본관은 창녕(昌寧)이다.

朝陽閣重修記 ⑤

조양각중수기 ⑤

吾鄕之朝陽閣在嶠嶺以南頗爲傑構其江山之勝風煙之景與晋陽之矗石凝川之嶺南二樓相爲伯仲騷人墨客冠盖使節之出於東道者必欲一登覽焉觀於歷代題詠可知矣

우리 고을의 조양각이 교령 남쪽에서는 자못 걸작인 건물이니 그 강산의 명승과 풍연 경치는 진주의 촉석루, 밀양의 영남루와 백중을 이루므로 문장 명필과 고관 사신이 동쪽으로 나오는 자는 반드시 한 번 올라보고자 하는 곳이었음은 역대로 읊은 글을 보아서도 능히 알 수 있을 것이다.

余生於是鄕幼而嬉也可日登焉其後則歲不過一二焉自光復以來數十年之間就食四方奔走塵埃今栖遲于漢上一 隅者亦已十稔時一回首鄕山聳桷飛甍宛然屹立于蒼厓千仞之上終不離於心目之間

나도 이 고장에서 태어나 어려서 뛰어 놀 때는 거의 날마다 조양각에 올랐고 그 뒤에도 한 해에 한두 번씩은 오르내렸는데, 광복 후부터 수십 년 동안 사방으로 생활 따라 먼지 속에

朝陽閣詩文集175

분주하다가 이제 한수(서울) 한쪽 구석에 박혀 살게 된 지도 벌써 십 년이 되었지만 때로 한 번씩 고향산천으로 머리를 돌릴 적엔 높이 솟은 추녀와 날아갈 듯한 대마루가 푸른 천 길 벼랑 위에 서있음을 보는 듯 끝내 마음과 눈 속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盧君漢容間嘗訪余而言曰今郡守朴敦陽賢侯也下車之初卽修鄕校以盡尊衛之道今年又與國會議員李元雨謀重修朝陽閣費皆出於官而民力少不用焉丹雘照耀樹木增彩遊觀之樂亦云備矣將以某日飮而落之此不可以無述子幸記之非漢容之私實鄕人之志也

그런데 근간에 노군 한용이 나를 찾아와 말하기를 '지금 군수 박돈양은 어진 분이라 부임 초에 향교를 수리하여 존성위도하는 도리를 다하였는데, 금년에 또 국회의원 이원우와 더불어 조양각 중수를 계획하여 비용은 전부 관에서 내고 백성의 힘은 조금도 쓰지 않기로 하였는데, 단청 빛이 훤히 빛이 나서 수목조차 빛을 더한 듯하여 유관의 즐거움 또한 갖추어졌으므로 장차 어느 날 낙성을 할 것인 즉 이 사실을 서술하지 않을 수 없으니 자네가 행여 이 일을 기록하여 주실 지, 이것은 한용의 사사로운 마음이 아니고 실로 향인 전체의 뜻일세.'라고 하였다.

余當愧謝不敢而因竊惟韓文公作滕王閣重修記以載名二王之後爲榮况如余之名得載于前人崇文巨筆之後則其爲榮尤何如哉

176․記文編

내 이에 마땅히 부끄러워 감히 그럴 수 없다고 사절할 수도 있겠으나 가만히 생각건대 한문공(韓愈를 말함)도 등왕각 중수기를 짓고 두 왕씨의 뒤에 이름을 실음으로써 영광으로 삼었거니와 하물며 나 같은 사람의 이름이 전인의 높은 문장과 큰 붓 밑에 실리게 된다면 그 영광됨이 더욱 어떠할까 싶다.

遂冒濫而書之曰洛陽園亭記有言觀於洛陽天下之盛衰可知觀於園亭洛陽之盛衰可知循是意也觀於朝陽閣吾鄕之盛衰亦可知已

드디어 염치를 무릅쓰고 글을 짓되 낙양원정기에 이르기를 ‘낙양을 보면 천하의 성쇠를 알 수 있고 원정을 보면 낙양의 성쇠를 알 수 있다.’라고 하였은 즉 이 말의 뜻을 따른다면 조양각을 보면 우리 고을의 성쇠를 또한 알 수 있는 일이기도 하다.

直欲策蹇南歸誦圃隱先生高攀明月之句同風流太守邂逅故人觴咏於其間而心切跡拘以竢異日至於閣之創建若屢廢屢興自有前人之述亦不復贅焉

곧 바로 남쪽으로 돌아가 포은 선생의 고반명월 글귀를 외우며 풍류태수가 고인을 만나 조양각에서 잔 들고 읊조린 것과 같이 하고 싶으나 마음은 간절하되 발이 묶여 뒷날을 미루어 기다리기로 한다. 누각의 창건과 여러 번 폐하고 흥한 사실에 대하여는 전인들의 서술이 있기로 이 또한 췌언을 붙이지 않는다.

朝陽閣詩文集177

馬龍洙 마용수(1928~?) 본관은 장흥(長興)이며, 1971년 고령군수를 시작으로 경산군수, 달성군수, 김천시장, 경북 상공국장, 영주시장, 경북 내무국장을 거쳐 1983년 영천시장을 부임하여 1984년 부이사관으로 승진하여 떠났다.

朝陽閣重修記 ⑥

조양각중수기 ⑥

此州之朝陽閣宲嶺下名勝也圃隱鄭先生之詩通國所共誦者而其外騷人韻客之許多題咏盖不可十數數則不必誇張於此矣

이 고을의 조양각은 실로 영남의 명승지이다. 포은 정선생의 시는 전국을 통하여 함께 외우는 바이지마는 그 외 소인(騷人) 운객(韻客)의 허다한 제영(題詠 : 시를 써서 읊음)은 대개 가히 십수(十數)로써 헤아리지 못한다 해도 반드시 여기에 과장한 것은 아닐 것이다.

滄桑百劫興廢無常隨時修補以至于今五六百載瓦腐而飜之垣頹而葺之其他斧斤畚鍤小小之役不能枚擧也

상전벽해가 백 겁(오랜 세월)이나 지나고 흥하고 폐하는 것이 떳떳함이 없었으나 때에 따라 중수하고 보수하여 지금 오륙백 년에 이르렀다. 기와가 부패하면 번와(飜瓦 : 기와를 바꿈)하고 원장이 무너지면 보수하며 그 외 도끼나 삼태기나 삽

178․記文編

으로 조금씩 고치는 역사는 낱낱이 다 열거하지 못한다.

歲久圯毁又不可不補修癸亥春金在浣前市長以國道市費二千萬着工事未半瓜滿而移去余以後任又以二千萬踵之前後補助爲四千萬圓也石築基礎柱梁及欄檻寢房蓋瓦幷皆修理今年七月告訖無增減舊制而跨歲土木爲二百年來未曾有之工事也

해가 오래됨에 무너지고 훼손되어 또 보수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계해년(1983) 봄에 김재완 전 시장이 국비․도비․시비 이천만 원으로써 공사를 착수하였으나 반틈도 이루지 못하고 임기가 차서 옮겨가고 내가 후임으로 들어와서 또 이천만 원으로써 뒤를 이었으니 전후 보조금이 사천만 원이 된다. 석축으로 기초를 하고 기둥과 들보 및 헌함과 침방과 기와를 아울러 다 수리하여 금년 칠월에 준공을 고하니 옛날 제도에 증감이 없었으며 해를 넘겨 토목공사를 한 것이 이백 년 안에 일찍 없었던 공사이다.

丹雘更耀風烟增光鄕中人士咸喜而相賀曰淸溪石壁舊址依樣南畝黃雲西山爽氣宜無古今之異而洋洋者二水加麗峩峩者三山愈明一閣重新而森羅萬狀如畵出眼界是誰之功也

붉은 빛은 선명하게 다시 빛나고 강산의 경치는 빛을

더하니 향중 인사가 다 기뻐하여 서로 축하해 말하기를, ‘청계석벽의 옛 터는 옛 모양 그대로이고, 남묘황운과 서산상기는 의당 고금의 다름이 없겠지만 양양하게 흐르는 물은 아름다움

朝陽閣詩文集179

을 더하고 아아(峩峩)하게 높이 솟은 삼산은 더욱 깨끗함을 더하니 한 누각이 거듭 새로워서 삼라만상이 그림같이 안계에 드러나는 것은 이 누구의 공이냐?’ 고 하였다.

余和之曰無似奉職是鄕爲一年于玆愧無業績可言而惟此一役粗可以爲能事乎有廢斯興有壞必修固後人之責也此吾所以行吾之責人各知其責則是閣之久遠可期矣典校李東琪氏始終關與而落成之日勸余以一言記之因書其顚末如此云

내가 화답하여 말하기를, ‘보잘 것 없는 내가 이 고을의 직을 받든지 이제 일년이 되었으나 업적을 말할 만 한 것이 없음을 부끄럽게 생각했는데, 오직 이 한 역사만은 조박하게나마 능사라 하겠는가? 퇴폐함이 있으면 반드시 보수하는 것은 진실로 후인의 책임이다. 이는 내가 나의 책임을 이행한다면 누각의 오래 보존될 것을 가히 기약할 수 있다.’ 고 하였다. 전교 이동기 씨가 처음부터 끝까지 관여하였더니 낙성하는 날에 나에게 한 말로 기문해 줄 것을 권하므로 그 전말을 이와 같이 쓴다.

光復後初甲子重陽節 市長馬龍洙記

광복 후 첫 갑자년(1984) 중양절에 시장 마용수 기하다.

 

198․附―環碧亭詩文

李世南 이세남(1464~1525) 호는 화수헌(花樹軒)이며 본관은 벽진(碧珍)이며 신녕현감을 지낸 이고(李考)의 아들이다.

先生道義玉山重 선생도의옥산중

良佐洞中願一從 양좌동중원일종

汪汪頃波撓不濁 왕왕경파요불탁

猗猗綠竹彼何穠 의의녹죽피하농

千尋學海難爲楫 천심학해난위즙

數仞宮墻不可墉 수인궁장불가용

於穆淸風長未朽 어목청풍장미후

遙想百世素壃封 요상백세소강봉

선생의 도의는 옥산과 같이 추중되고

양좌동 중에서 모두 한결같이 따르기를 원하네

가득한 물은 물결쳐도 흐려지지 아니하고

아름다운 푸른 나무 어찌 저리 농염한가

천 길이나 되는 배움의 바다 노젓기 어렵고

두어 길 궁장은 담이라 할 수 없네

온화한 맑은 바람 오래도록 쇠퇴하지 않고

아득히 백세를 생각하여도 근본은 강봉이리라

朝陽閣詩文集․199

李彦迪 이언적(1491~1553) 조선 중기 문신․학자 초명은 적(迪), 자는 복고(復古), 호는 회재(晦齋)․자계옹(紫溪翁) 시호는 문원 (文元), 본관은 여주(驪州)이다. 1514년 문과에 급제하여 이조정랑․장령․밀양부사 등을 지냈다. 1531년 사간에 있으면서 김안로(金安老)의 중임을 반대하다 파직되어 경주(慶州) 자옥산에 들어가 성리학연구에 전념했다. 저서에 『중용구경연의(中庸九經衍義)』 『회재집』 등이 있다 문묘와 경주의 옥산서원에 배향되었다.

同門高誼古來重 동문고의고래중

公治南容闕里從 공치남용궐리종

疎遠奚論娣姒比 소원해론제사비

枝根幸托李桃穠 지근행탁이도농

遙想學海降仙句 요상학해강선구

願接芳隣孟氏墉 원접방린맹씨용

携手斐亭遊其下 휴수비정유기하

蒼蒼竹色雪爲封 창창죽색설위봉

동문의 두터운 정의 예부터 중하였고

공의 남쪽 다스리는 모양은 궐리를 따랐네

소원함을 어찌 제사(娣姒:동서)를 비교하며 논하겠는가

가지와 뿌리 다행히 의탁하여 도화꽃 농염하네

아득히 상상하는 배움의 바다 신선의 글귀 내리고

아름다운 이웃 맹씨와 담장이 접하기를 원하네

손잡고 비벽정에 올라 그 아래서 노니니

푸르디 푸른 대나무에 눈이 쌓여 수복하네

200․附―環碧亭詩文

李滉 이황(1501~1570) 조선 중기 문신․학자 자는 경호(景浩), 호는 퇴계(退溪)․퇴도(退陶)․도수, 시호는 문순(文純), 본관은 진보(眞寶)이다. 경상북도 안동(安東) 출생 1534년(중종 29) 문과에 급제, 부정자(副正字) 등을 거쳐 단양군수(丹陽郡守)․풍기군수(豊基郡守)를 지낸 뒤 낙향 강학 장소를 도산서당(陶山書堂)으로 옮긴 뒤 죽을 때까지 후진교육에 힘썼다. 영의정에 추증되고, 문묘 및 선조의 묘정에 배향되고, 도산서원 등 40여 곳의 서원에 주사(主祀)되었다.

肉食終難近臭銅 육식종난근취동

此君惟足友軒中 차군유족우헌중

竿竿玉立非爭列 간간옥립비쟁렬

籜籜龍勝欲上空 탁탁용승욕상공

瘦石寒溪團翠色 수석한계단취석

疎楹虛檻灑淸風 소영허함쇄청풍

可憐人境俱新處 가련인경구신처

續舊題詩愧未工 속구제시괴미공

육식은 그만두기 어려운데 돈 냄새 가까워오고

그대가 오직 집 가운데 벗이 될 만 하네

대나무는 옥이 선 듯 다툼없이 나열하였고

죽순은 용이 오르듯 허공을 오르네

파리한 돌 쌓인 시내에 비취빛이 모여들고

성근 기둥 빈 난간에 맑은 바람 불어오네

가련타 인간 세상 새로운 곳 갖추어

옛날 따라 시 지으니 훌륭하지 못할까 부끄럽네

朝陽閣詩文集․201

黃俊良 황준량(1517~1563) 조선 중기 문신 자는 중거(仲擧), 호는 금계(錦溪) 본관은 평해(平海) 이황(李滉)의 문인이다. 1540년(중종 35) 문과에 급제하여 성균관학유가 되었다. 신녕현감 재직시 민사에 전심하였고 흥학(興學)에도 힘써 문묘(文廟)를 수축하고 백학서원(白鶴書院)을 창설하는 등 많은 치적을 남겼다. 풍기(豊基) 우곡서원(遇谷書院), 신녕 백학서원에 배향되었다 저서로는 《금계집》이 있다.

華構耀金質儗銅 화구요금질의동

斗南高出半天中 두남고출반천중

過如開錦雲仍在 과여개금운잉재

題遍籠紗壁不空 제편롱사벽불공

溪水飛湍喧急瀑 계수비단훤급폭

竹林疎韻臏淸風 죽림소운빈청풍

前遊述作盡陶謝 전유술작진도사

莫謾苦吟摹寫工 막만고음모사공

아름답게 지어 금처럼 빛나니 구리인가 의심스럽고

하늘 아래 높이 솟아 중천에 우뚝하네

지나온 길에 비단을 펼친 듯 후손이 있고

시편은 대그릇에 비단실 담은 듯 벽에는 빈 곳 없네

시내는 떨어지듯 폭포가 되어 시끄럽고

대숲의 성근 울림은 청풍을 위로하네

지난 날 노닐며 지은 시 다 기쁘게 버렸으니

괴로운 읊음 모사한 공을 업신여기지 말라

朝陽閣詩文集․197

徐居正 서거정(1420~1488) 조선 초기 문신․학자 자는 강중(剛中), 초자는 자원(子元), 호는 사가정(四佳亭)․정정정(亭亭亭), 시호는 문충(文忠), 본관은 달성(達城)이며 권근(權近)의 외손이다. 1444년 식년문과에 급제, 사재감직장을 시작으로 여섯 왕을 섬겨 45년간 조정에 봉사하며 달성군(達城君)에 봉하여졌다. 저술로 『역대연표』 『태평한화골계전(太平閑話滑稽傳)』 『필원잡기』 『동인시문(東人詩文)』 등이 있으며, 대구 구암서원(龜巖書院)에 제향되었다.

繞砌灣環小小溪 요체만환소소계

萬竿靑翠竹枝低 만간청취죽지저

一軒情思淸於水 일헌정사청어수

種種幽禽自在啼 종종유금자재제

섬돌을 둘러 굽어 흐르는 조그만 시내

일만 장대 푸르른 대나무 가지는 나직한데

작은 집에서 느끼는 정념 물보다 맑고

여러 가지 산새들이 제멋대로 지저귀네

202․附―環碧亭詩文

金克一 김극일(1522~1585) 조선중기의 문신이며 학자 자는 백순(伯純), 호는 약봉(藥峰), 본관은 의성(義城)이다. 1546년 증광문과 병과로 등과하여 교서관정자를 시작으로 예조정랑을 비롯하여 많은 외직을 거쳤다. 효성이 지극하고, 문장은 고결하고 시에 뛰어났다. 저서로는 『약봉일고(藥峰逸稿)』가 있으며, 안동의 사빈서원(泗濱書院)에 제향되었다.

颯颯寒溪風 삽삽한계풍

蕭蕭枯竹雨 소소고죽우

夢驚掃地聲 몽경소지성

落葉應無數 낙엽응무수

차가운 시내에 살랑살랑 바람이 불어오고

마른 대나무에 소소히 비가 내리네

잠결에 마당 쓰는 소리에 놀라니

낙엽은 응당 헤아릴 수 없으리

朝陽閣詩文集․203

金尙容 김상용(1561~1637) 조선 중기 문신 자는 경택(景擇), 호는 선원(仙源)․풍계(楓溪)․계옹(溪翁), 시호는 문충(文忠), 본관은 안동(安東) 1590년(선조 23)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부정자(承文院副正字)․예문관검열(藝文館檢閱)이 되었다. 성품이 온화하고 청렴하여 군자의 기품이 있었으며 시와 글씨에 뛰어났다. 시조로 《오륜가(五倫歌)》 《훈계자손가(訓戒子孫歌)》 등 9편이 전하고, 저서로 《선원유고(仙源遺稿)》가 있다 강화 충렬사에 제향되었다.

小亭特地逈 소정특지형

危檻若憑虛 위함약빙허

嘉木蘩陰裏 가목번음리

濯枝宿雨初 탁지숙우초

看山宜吏隱 간산의리은

飮水可仙書 음수가선서

且喜淸凉界 차희청량계

吾人共與居 오인공여거

작은 정자 특별한 땅 아득한 곳에

우뚝한 헌함은 허공을 의지한 듯 하네

아름다운 나무는 큰 그늘 드리우고

밤새도록 비에 씻긴 나뭇가지 새롭네

산을 보니 마땅히 은거할 만하고

물 마시며 신선의 책 볼 만하네

이 또한 기쁜 청량의 세계이니

우리 더불어 함께 살만한 곳이라네

204․附―環碧亭詩文

李民宬 이민성(1570~1629) 조선 중기 문신 자는 관보(寬甫), 호는 경정(敬亭) 본관은 영천(永川) 경상북도 의성(義城) 출생d 1597년(선조 30) 정시문과에 급제, 주서․설서․예조좌랑 등을 지내고, 정묘호란 때 경상좌도 의병대장이 되어 전주(全州)까지 진출하여 왕세자를 보호하는 등 활약하였고, 1629년 형조참의에 제수되었으나 병으로 사직, 그 해에 죽었다. 의성(義城)의 장대서원(藏待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 《경정집(13권)》 《조천록(朝天錄)》 등이 있다.

曾屈文翁佩左銅 증굴문옹패좌동

先生寶唾此軒中 선생보타차헌중

德儀猶像淇園綠 덕의유상기원록

山斗憑瞻太華空 산두빙첨태화공

冥會更同親炙日 명회갱동친자일

歸咏還似浴沂風 귀영환사욕기풍

當時溪石經題品 당시계석경제품

休遣詩人別致工 휴견시인별치공

일찍이 물러난 문옹께서 좌동을 차니

선생의 훌륭한 글귀 이 집에 있구나

덕스러움은 닮을만 하고 기원은 푸른데

산두에 의지하고 우러렀으나 태산 화산은 공허하네

그윽한 모임 다시 함께 스승의 가르침 받는 날

읊으며 돌아오니 도리어 기풍에 목욕한 듯하구나

당시의 계석은 품제를 거쳤으니

시인을 보내지 말라 특별히 공교로움을 이루니라

朝陽閣詩文集․205

洪翼漢 홍익한(1586~1637) 조선 중기 문신 자는 백승(伯升) 호는 화포(花浦), 시호는 충정(忠正), 본관은 남양(南陽) 삼학사(三學士)의 한 사람이다. 1615년(광해군 7) 생원이 되고, 1624년(인조 2) 문과에 장원급제한 뒤 사서(司書)․장령을 지냈다. 오달제(吳達濟)․윤집(尹集) 등과 함께 청(淸)나라에 압송된 뒤, 협박과 유혹에 굴복하지 않고 죽음을 당하였으며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대표적인 저서로 《화포집》 《북행록(北行錄)》 《서정록(西征錄)》 등 다수가 있다.

冷冷爽籟滿高軒 냉냉상뢰만고헌

宛似秋陰返毅魂 완사추음반의혼

風月斯亭曾有主 풍월사정증유주

雪霜餘竹幾生孫 설상여죽기생손

斜陽啼鳥遺騷響 사양제조유소향

古壁文虹映墨痕 고벽문홍영묵흔

讀罷公詩增感慨 독파공시증감개

溪流爲咽擊雲根 계류위인격운근

냉랭하고 상쾌한 퉁소소리 높은 집에 가득하고

추음에 완연히 그 의혼이 돌아오는 것 같구나

풍월의 이 정자에 일찍이 주인이 있었던가

상설이 지나가니 남은 대나무에 새싹이 보이네

저물녁의 우짖는 새 시끄러운 소리 남기고

옛 벽의 글 그림자 먹의 흔적 비치네

공의 시 읽기를 마치니 감개함을 더하고

시냇물 목 메이듯 흘러 운근에 부딪치네

206․附―環碧亭詩文

李景奭 이경석(1595~1671) 조선 중기 문신 자는 상보(尙輔), 호는 백헌(白軒), 시호는 문충(文忠), 본관은 전주(全州) 김장생(金長生)의 문인으로서 16l7년(광해군 8) 증광별시에 급제하였으나 이듬해 인목대비(仁穆大妃)의 폐비상소에 참여하지 않아 삭과되었다. 인조반정 이후 알성문과에 급제, 대제학 등을 지냈으며, 영돈녕부사에 오른 후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문장과 글씨에 뛰어났으며, 저서에 《백헌집》 등이 있다 남원의 방산서원(方山書院)에 배향되었다.

簇簇藏靑壁 족족장청벽

亭亭上翠虛 정정상취허

色增停雪夕 색증정설석

陰合過溪初 음합과계초

石瘦灘交韻 석수탄교운

窓空露滴書 창공로적서

官淸元似水 관청원사수

還與此君居 환여차군거

올망졸망한 가파른 절벽에 숨어

정자는 우뚝하게 푸른 허공에 솟았네

물색은 눈 내린 저녁에 더 아름다우니

음침한 날 시내를 지나던 때라

여윈 돌 여울과 서로 노래하고

빈 창에는 이슬방울이 글씨를 쓰네

관청은 원래 물과 같이 맑아야 하는 곳

돌아와서 이 곳에서 그대와 함께 살리라

朝陽閣詩文集․207

李敏求 이민구(1589~1670) 조선 중기 문신 자는 자시(子時), 호는 동주(東洲)․관해(觀海) 본관은 전주(全州) 1609년(광해군 1) 사마시에 합격하였고, 1612년 증광문과에 급제하여 수찬․지평․교리․응교 등을 지냈다. 병자호란 때 강도검찰부사(江都檢察副使)로서 왕을 강화에 모시지 못하여 아산(牙山)에 유배되었다. 1649년 풀려나 부제학․대사성․도승지 등을 지냈다 저서로는 《동주집》 《독사수필(讀史隨筆)》 《간언귀감(諫言龜鑑)》 등이 있다.

篁林貧地近 황림빈지근

澗氣襲嵐虛 간기습람허

曉色經寒後 효색경한후

春心入歲初 춘심입세초

輕雲生壁畵 경운생벽화

空水寫窓書 공수사창서

誰識絃歌宰 수식현가재

沉冥類索居 침명류색거

대나무 숲 우거진 궁벽한 땅 가까이

계곡의 기운 텅 빈 골짝을 엄습하여 오네

새벽 빛 찬기가 지난 후에

춘심은 벽두에 들어오네

엷게 낀 구름 벽화를 만들고

이슬방울은 창에 글씨를 쓰네

누가 현가를 주재하는지 알겠는가

그윽한 곳에서 칩거하는 무리라네

208․附―環碧亭詩文

張應一 장응일(1599~1676) 조선 중기 문신 자는 경숙(經叔), 호는 청천당(聽天堂), 시호는 문목(文穆), 본관은 인동(仁同) 1629년(인조 7) 별시문과에 급제하고, 정언(正言)․지평(持平)․필선(弼善) 등을 지냈다. 1673년(현종 14) 공조참의로 영릉(寧陵)의 변(變)에 관한 진상을 밝히려다 무고를 당하여 황간(黃澗)에 유배되었다가 숙종 즉위로 풀려났다. 우승지․부제학․대사간을 지내고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올랐으며,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閱詩訂往蹟 열시정왕적

拄笏破愁顔 주홀파수안

隆棟斷崖上 융동단애상

彩椽飛鳥間 채연비조간

簿書多暇歇 부서다가헐

水竹剩情閒 수죽잉정한

嘯咏聯牽興 소영연견흥

登臨却忘還 등림각망환

시를 보며 지나간 자취 바로잡고

홀을 잡으니 근심스런 얼굴 물러나네

높은 들보는 벼랑 끝에 솟아올랐고

채색한 서까래는 새 날아 오르는 사이라네

관아의 업무처리 한가한 겨를 많은데

수죽에도 한가한 정 남아 있네

시 읊조리는 소리 흥을 일으키고

누각에 올라보니 문득 돌아감을 잊겠네

朝陽閣詩文集․209

南九萬 남구만(1629~1711) 조선 중기 문신․서예가 자는 운로(雲路), 호는 약천(藥泉)․미재(美齋) 본관은 의령(宜寧) 송준길(宋浚吉)의 문인(門人)으로 1656년(효종 7)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정언(正言)․이조정랑(吏曹正郎)을 지냈으며, 청렴한 신하로서 경사(經史)에 밝았으며 문사(文詞)․서화(書畵)에도 뛰어났다. 저서에 《약천집(藥泉集)》 《주역참동계주(周易參同契註)》가 있고 글씨에는 《찬성장현광비(贊成張顯光碑)》 등이 있다.

坐對軒中竹 좌대헌중죽

塵衿豁若虛 진금활약허

色添流水際 색첨유수제

陰占小階初 음점소계초

帶月親琴酒 대월친금주

迴風避簿書 회풍피부서

誰知言偃室 수지언언실

還有子猷居 환유자유거

집안에서 대나무를 마주하고 앉으니

속세와의 인연이 훤히 뚫린 듯 하네

경치는 흐르는 물에 더욱 선명하고

응달에 자리한 작은 섬돌은 새롭네

달빛은 거문고와 술에 친하고

회오리바람 문서를 피하여 부네

이 곳에 누워 시 짓는 것 누가 알리오

돌아와 그대와 함께 살 마음 있도다

210․附―環碧亭詩文

李龜錫 이구석(?~?) 자는 서여(敍汝), 호는 번와(磻窩), 본관은 진보(眞寶)이다.

隔竹村兒唱白銅 격죽촌아창백동

一亭依舊翠微中 일정의구취미중

檻臨流水因成曲 함림유수인성곡

橋到懸崖忽架空 교도현애홀가공

二老詩篇留點雪 이노시편유점설

孱孫肯構把遺風 잔손긍구파유풍

記年揭額同三乙 기년게액동삼을

寓感何嫌句不工 우감하혐구불공

대나무 속에 숨은 아이 백동을 노래하고

비취빛 흐릿한 가운데 정자는 예와 같도다

헌함은 흐르는 불가에 임하여 곡조를 이루고

벼랑에 매달린 다리 홀연히 교각만 허공에 떠 있네

두 노인의 시편 봄눈처럼 머무르고

잔손들 당을 얽으니 유풍 전하리

기문을 쓴 해에 편액하니 삼을을 함께 하였고

나그네의 느낌에 글귀 공교하지 못함 어찌 싫어하리

朝陽閣詩文集․211

尹鳳五 윤봉오(1688~1769) 자는 계장(季章), 호는 석문(石門), 시호는 숙간(肅簡), 관은 파평(坡平), 전시문과에 급제하여 판돈령부사에 이름, 시호는 숙간(肅簡)이다 글씨가 능하며 세세루와 임고서원 편액을 썼다.

晴虹跨澗飮 청홍과간음

老蜃占崖虛 노신점애허

停盖垂楊下 정개수양하

滴欄過雨初 적란과우초

溪雲生枕席 계운생침석

岩竹淨琴書 암죽정금서

攬筆廬山色 남필여산색

眞成吏隱居 진성리은거

맑은 날 무지개 넘어 산골 물 마시니

늙은 이무기 텅 빈 언덕 지키고 있네

흐드러진 버들가지 지붕 위에 멈추었고

비 지나가니 난간에 물 떨어지네

골짝의 구름은 침석을 만들고

암죽에서 고요히 금서를 즐기네

붓을 잡아 여산의 경치를 쓰니

진실로 벼슬살이 그만두고 살만한 곳이라네

212․附―環碧亭詩文

安處宅 안처택(1705~1775) 자는 인백(仁伯), 호는 동오(桐塢), 본관은 순흥(順興)이다. 저서로는 『동오집(桐塢集)』이 있다.

山繞畵屛水滑銅 산요화병수활동

交簷脩竹最其中 교첨수죽최기중

礎依絶壁餘無地 초의절벽여무지

栱壓浮雲逈出空 공압부운형출공

密葉成陰尙翳日 밀엽성음상예일

疎枝引響自生風 소지인향자생풍

品題已閱先賢手 품제이열선현수

俚句還慚露拙工 이구환참로졸공

산에 두른 그림병풍의 물이 구리판에 구르는 듯

처마에 닿은 수죽은 그 중에 가장 빼어나네

초석은 절벽에 의지하여 남은 틈이 없고

두공은 뜬구름을 누르고 높히 허공에 빼어났네

빽빽한 나뭇잎은 그늘을 만들어 해를 가리고

성근 가지에 절로 바람이 일어 소리를 만드네

시제에 선현의 솜씨를 보았는데

속된 구절은 도리어 졸렬한 솜씨를 드러내 부끄럽네

朝陽閣詩文集․213

金慶基 김경기(1712~1793) 자는 선유(善裕), 호는 부암(傅巖), 본관은 영양(英陽)이다. 저서로는 『부암집(傅巖集)』이 있다.

江山無價不論銅 강산무가불론동

相地何年構此中 상지하년구차중

棟倚層崖高絶世 동의층애고절세

檻臨飛鳥遠浮空 함림비조원부공

分明鏡面溪心月 분명경면계심월

寥亮琴聲竹裏風 요량금성죽리풍

前後騷仙懸玉律 전후소선현옥률

華今玩味覺詩工 화금완미각시공

강산의 무한한 가치 돈으로 논할 수 없고

어느 해 땅을 살펴 이 곳에 집을 지었는가

용마루는 층층절벽에 의지하여 세상에서 빼어났고

헌함은 나는 새와 함께 아득히 허공에 떠 있네

시냇물 속의 달 거울에 비친 듯 분명하고

대숲 속의 바람은 거문고 소리인 듯 명랑하네

옛날과 훗날의 시인들이 옥률에 매달려

화려함을 이제야 완미하며 훌륭함을 알겠네

214․附―環碧亭詩文

權爾範 권이범(?~?) 자는 신경(信卿), 본관은 안동(安東)이다. 봉사(奉事)를 역임하였다.

亭上層巒亭下溪 정상층만정하계

天光雲影共高低 천광운영공고저

華軒客散斜陽晩 화헌객산사양만

叢竹成陰野鳥啼 총죽성음야조제

정자 위는 층층이 뫼요 정자 아래는 시내라오

하늘빛과 구름 그림자는 높낮이를 같이하네

꽃다운 집에 객이 흩어지니 해가 기울고

대숲에 그늘 드리워 지니 들새가 지저귀네

朝陽閣詩文集․215

金麗宅 김려택(1756~1806) 자는 응휘(應輝), 호는 소암(小巖), 본관은 영양(英陽)이다. 저서로는 『소암유고(小巖遺稿)』가 있다.

雲楹遙想露盤銅 운영요상로반동

怊悵仙翁縹緲中 초창선옹표묘중

映水魚腮秋色漾 영수어시추색양

哢林禽語夕陽空 농림금어석양공

有懷看竹忘終日 유회간죽망종일

乘醉哦松立晩風 승취아송입만풍

滿壁瓊琚光熖紫 만벽경거광도자

題詩堪愧獨疎工 제시감괴독소공

구름기둥은 아득히 승로반을 상상케 하고

초창한 선옹은 높고 아득한 곳에 있네

물에 비친 물고기 가을빛에 출렁이고

숲 속에 지저귀는 새 석양에 쓸쓸하네

품은 회포 대나무를 바라보며 종일 잊어버리고

흥에 겨워 취한 듯한 소나무 늦바람 맞으며 섰네

벽에 가득한 훌륭한 글귀 불빛에 빛나고

지은 시 홀로 성근 솜씨라 부끄러움을 어찌 견디랴?

216․附―環碧亭詩文

權致經 권치경(1794~1867) 자는 경석(景錫), 호는 아헌(啞軒), 본관은 안동(安東)이며, 유고가 남아있다.

富媼濃粧鑑以銅 부온농장감이동

靑山如黛倒亭中 청산여대도정중

淸流足我幽情瀉 청류족아유정사

瘐竹令人俗慮空 유죽영인속려공

留韻何年臨碩德 유운하년임석덕

摳衣今日仰遺風 구의금일앙유풍

丹楹碧謝新輪奐 단영벽사신륜환

物色名區著畵工 물색명구저화공

부유한 할미 구리 거울 보며 짙은 단장한 듯

청산의 눈썹 같은 그림자 정자에 드리워지네

청류에 만족하여 그윽한 정 쏟아내고

파리한 대나무는 사람으로 하여금 속세에 근심없게 하네

시를 남긴지 어느 해인가 높은 덕에 임했고

옷을 걷은 오늘 남기신 교화에 우러르네

단청한 기둥 푸른 정자 새로히 크게 빛나고

훌륭한 경치 아름다운 곳 화공의 솜씨 드러나네

朝陽閣詩文集․217

丁甲祖 정갑조(1795~1863) 자는 술지(述之), 호는 농고(聾皐), 본관은 나주(羅州)이다.

煮得薰爐十萬銅 자득훈로십만동

明花脩竹品題中 명화수죽품제중

竿竿削立期千尺 간간삭립기천척

簇簇穉龍向半空 족족치룡향반공

危石臨深環碧色 위석임심환벽색

高軒呑遠把淸風 고헌탄원파청풍

遺芬百世多今日 유분백세다금일

續舊重新任化工 속구중신임화공

향불 사른 지 십만 년이나 되는 구리화로

명화에 수죽은 품제의 가운데라네

장대처럼 우뚝 솟은 대나무는 천 척이나 되고

더부룩한 어린 용처럼 허공으로 향했네

우뚝한 벼랑 물가에 푸른빛이 둘렀고

높은 집 아득한 곳에 맑은 바람 끌어들이네

백세에 끼친 교화 오늘도 남아 있고

옛날 이어 더욱 새로우니 자연스런 묘한 재주라네

218․附―環碧亭詩文

權致穆 권치목(1781~1815) 자는 선노(宣老), 호는 우천(迂川), 본관은 안동(安東)이며, 유고가 남아있다.

花山若出置碁銅 화산약출치기동

亭在岩阿縹緲中 정재암아표묘중

老石如盤仍作礎 노석여반잉작초

危軒臨水怳浮空 위헌임수황부공

苟無脩竹嫌於俗 구무수죽혐어속

更有垂楊濯以風 갱유수양탁이풍

滿壁瓊章摹寫盡 만벽경장모사진

鉛朱何待畵圖工 연주하대화도공

화산에 솟은 듯 바둑돌 세워

정자는 바위 언덕 위에 아득하게 있도다

노석은 소반 같이 초석이 되었고

물가에 우뚝한 집 횡하니 허공에 솟았네

진실로 수죽 없음을 속세에서 싫어하여

다시 버들 드리워 바람에 씻기우네

벽에 가득한 아름다운 글 베끼기를 다하니

연주는 어찌 화공의 그림 솜씨를 기다리는가

朝陽閣詩文集․219

曺克承 조극승(1803~1877) 자는 경휴(景休), 호는 귀애(龜厓), 본관은 창녕(昌寧)이다. 1831년 문과에 급제하여 공조참의에 이르렀다.

霽後公山碧似銅 제후공산벽사동

淡然秋色入軒中 담연추색입헌중

一潭光影看來好 일담광영간래호

滿岸塵埃滌去空 만안진애척거공

浩氣遠含亭外壁 호기원함정외벽

詩情時發竹聞風 시정시발죽문풍

眼前物色都收拾 안전물색도수십

誰識乾坤造化工 수식건곤조화공

비 개인 뒤 팔공산은 푸른 거울과 같고

깨끗한 가을 빛 집 가운데 들어오네

온 연못에 비친 그림자 보기만 하여도 좋으니

언덕 가득한 티끌 허공에 씻어 버리세

호연한 기운 아득히 머금은 정자 밖 절벽

시정이 때때로 일어나고 대숲 바람소리 들리네

눈앞의 좋은 경치 모두 거두어 들였는데

건곤의 조화가 훌륭함을 누가 알겠는가

220․附―環碧亭詩文

權致直 권치직(1784~1877) 자는 덕장(德章), 호는 야헌(野軒), 본관은 안동(安東)이다.

求仙不必露盤銅 구선불필로반동

亭在玲瓏淑氣中 정재영롱숙기중

曲曲溪聲淸送遠 곡곡계성청송원

重重峀色逈凝空 중중수색형응공

恥爲居俗環疎竹 치위거속환소죽

恐梁囂塵裊颯風 공량효진뇨삽풍

幸有吾公賢聖慕 행유오공현성모

黌堂餘力又殫工 횡당여력우탄공

선옹이 승로반을 찾지 않았기에

정자는 영롱하게 맑은 기운 가운데 있네

굽이굽이 흐르는 시냇물 맑은 소리 멀리 보내고

겹겹의 험한 산색 높은 허공으로 향앴네

속세에 사는 것을 부끄러워하여 성근 대숲 둘렀고

시끄러운 세속에 큰 바람이 하늘거리는 것이 두렵네

다행히 오공께서 성현을 사모하여

횡당의 여력에 또 솜씨를 다하였네

朝陽閣詩文集․221

金準聲 김준성(1811~1875) 자는 이옥(而玉), 본관은 영양(英陽)이다. 향중 강학을 위해 강당(講堂)을 세워 후진을 양성하였다.

疊石成山宛出銅 첩석성산완출동

小樓佳景列盆中 소루가경렬분중

公門積翠槐陰靜 공문적취괴음정

客舍紆靑柳色空 객사우청류색공

活水循除先得月 활수순제선득월

疎簧擁檻晩生風 소황옹함만생풍

前賢已去餘模寫 전현이거여모사

爲把瓊篇問畵工 위파경편문화공

돌 쌓여 이루어진 산 구리에서 나온 듯 완연하고

작은 누각 아름다운 경치 동이 가운데 늘어섰네

문 앞의 푸른 산 회화나무 그늘은 고요하고

객사에 휘늘어진 푸른 버들 빛은 공허하네

흐르는 물은 뜰을 돌아 먼저 달을 얻었고

헌함 둘러싼 성근 대숲 저물녁 바람을 일으키네

전현은 이미 갔으나 남기신 법 그릴까 하여

훌륭한 시편을 가지고 화공에게 물어보네

222․附―環碧亭詩文

丁鳳翰 정봉한(1810~?) 자는 재첨(載瞻)이며, 본관은 나주(羅州)이다.

風喧遇竹林 풍훤우죽림

瀑瀉逢時雨 폭사봉시우

山水更呈輝 산수경정휘

丹靑今倍數 단청금배수

바람은 대숲을 만나 시끄럽고

폭포는 때맞은 비 만나 쏟아지네

산수는 다시 빛을 드리우고

단청은 이제 곱절로 아름답네

朝陽閣詩文集․223

曺文敬 조문경(1781~1858) 자는 성희(聖熙), 본관은 창녕(昌寧)이다. 자질이 뛰어나고 문사(文詞)가 훌륭하여 향중의 칭송이 있었다.

亭亭竹裏閣 정정죽리각

冬雪夏宜雨 동설하의우

願挽枝枝葉 원만지지엽

爲君筭曆數 위군산역수

우뚝하게 솟은 대나무 속의 누각

겨울엔 눈 내리고 여름엔 마땅히 비 내리리

원컨대 가지마다 잎을 따서

그대 위해 운수를 점쳐보리

224․附―環碧亭詩文

金命熙 김명희(?~?)

上有竹林下碧溪 상유죽림하벽계

風軒高敞月影低 풍헌고창월영저

賓譁靜處觥籌罷 빈화정처굉주파

一任斜陽倦鳥啼 일임사양권조제

정자 위는 대나무 숲 아래는 푸른 시내

위엄있는 높은 집에 달빛 비치네

조용한 곳에서 손님과 떠들썩하게 굉주를 파하니

기우는 해에 새소리가 한가하네

朝陽閣詩文集․225

金璡聲 김진성(1822~1892) 자는 문옥(文玉), 호는 연호(蓮湖), 본관은 영양(英陽)이다. 저서로는 『연호유고(蓮湖遺稿)』가 있다.

頎然石丈額如銅 기연석장액여동

曾爲虛欄立此中 증위허란입차중

遠市斜陽人影散 원시사양인영산

前川霽月雨聲空 전천제월우성공

岩花灼灼紅垂露 암화작작홍수로

澗竹猗猗翠拂風 간죽의의취불풍

詩畵玲瓏仍滿壁 시화영롱잉만벽

續吟千載却添工 속음천재각첨공

우뚝한 석장의 편액은 구리 같고

일찍이 횡한 난간 이 가운데에 서있네

멀리 시장에 해 기우니 사람 그림자 흩어지고

앞 내에 밝은 달 뜨니 빗소리 공허하네

바위틈에 꽃 찬란하니 붉은 이슬 드리우고

골짜기 대나무 아름다운데 바람은 푸른 빛 털어 버리네

아름다운 시화는 벽에 가득한데

천 년을 이어 읊어도 도리어 공교함을 더하네

226․附―環碧亭詩文

金大玉 김대옥(?~?)

猗猗綠竹繞層軒 의의녹죽요층헌

永日徘徊却爽魂 영일배회각상혼

窈窕岩屛臨地主 요조암병임지주

縱橫雲錦識天孫 종횡운금식천손

風琴簧葉林心響 풍금황엽임심향

月印溪波水面痕 월인계파수면흔

景仰詞華仍感慨 경앙사화잉감개

須將努力以培根 수장노력이배근

아름다운 푸른 대나무 층층히 헌을 둘렀고

긴 해는 배회하여도 오히려 상쾌하네

그윽한 바위 병풍 지주에 임했고

종횡의 비단구름 직녀성은 알리라

바람에 댓잎은 거문고 되어 숲 속에서 울리고

달은 시냇물에 찍혀 수면에 흔적을 남기네

훌륭한 시문의 재주 우러러 이에 감개하고

마땅히 노력하여 근본을 배양할지니

朝陽閣詩文集․227

權宅綸 권택륜(?~?)

畵閣丹靑壓小溪 화각단청압소계

脩簧碧柳自高低 수황벽류자고저

城市中間佳景做 성시중간가경주

幽禽隔樹好音啼 유금격수호음제

누각의 단청은 작은 시내를 압도하고

수죽과 푸른 버들 절로 높고 낮네

성시의 중간에 아름다운 경치 만들고

숲 속에 숨은 새 지저귀는 소리 즐겁네

228․附―環碧亭詩文

韓鎭殷 한진은(?~?)

樓上蒼崖鐵削成 누상창애철삭성

樓前積水鏡空明 누전적수경공명

一軒澹澹醉醒興 일헌담담취성흥

萬室洋洋絃誦聲 만실양양현송성

城市山林知不遠 성시산림지불원

炎天氷雪坐來生 염천빙설좌래생

幽禽解我忘機事 유금해아망기사

啼近茶筵款款情 제근다연관관정

누각 옆의 푸른 절벽은 쇠를 깎은 듯 하고

누각 앞의 푸른 호수는 거울처럼 맑도다

조용한 헌함에 취하고 깨는 흥이 일어나고

모든 집에는 악기 타고 시 읊는 소리 넘쳐흐르네

성시와 산림은 멀지 않음을 알겠고

무더운 여름 빙설 같은 시원함이 자리를 찾아드네

그윽한 새처럼 나를 풀어 속세를 잊고자 하니

다연 가까이서 우는 새 다정한 정이 있네

朝陽閣詩文集․229

安慱鎭 안단진(?~?)

數間棟宇傍淸流 수간동우방청류

冠盖如雲往往留 관개여운왕왕유

卽欲挾仙飛遠去 즉욕협선비원거

故敎山澗滌塵愁 고교산간척진수

두어 칸 정자 옆에 맑은 물이 흐르고

고관이 구름같이 모여 가끔씩 머무네

신선을 부둥켜안고 멀리 날아가고자 하였는데

일부러 산골 물로 하여금 속세 근심 씻게 하네

230․附―環碧亭詩文

曺秉秀 조병수(1832~1903) 자는 치실(穉實), 호는 운파(雲坡), 본관은 창녕(昌寧)이며, 통덕랑이다.

登臨終日聽潺溪 등림종일청잔계

東望羣峯眼下低 동망군봉안하저

靑艸澗邊深樹裡 청초간변심수리

幽禽何事近人啼 유금하사근인제

종일 누각에 올라 졸졸 흐르는 물소리 듣고

동쪽을 바라보니 뭇 봉우리 눈 아래네

푸른 풀 우거진 개울가에 깊은 나무 숲 속에서

산 속의 새가 무슨 일로 사람 가까이서 우는가

朝陽閣詩文集․231

金在坤 김재곤(1838~1888) 자는 기언(箕彦), 호는 오봉(吾峯), 본관은 영양(英陽)이다. 저서로는 『오봉유고(吾峯遺稿)』가 있다.

蒼崖丹閣俯淸溪 창애단각부청계

竹影婆娑入鑑低 죽영파사입감저

仰想當年無限樂 앙상당년무한락

至今惟有躍而啼 지금유유약이제

푸른 벼랑에 단청한 누각은 맑은 시내를 굽어보고

대나무 그림자 하늘하늘 거울 속에 들어오네

당년을 우러러 생각하니 즐거움 한이 없고

오늘에 이르러서는 오직 뛰고 우짖을 뿐이라네

232․附―環碧亭詩文

權相洛 권상락(1853~1885) 자는 성립(聖立), 호는 면와(勉窩), 본관은 안동(安東)이다.

滿樓晴日掛鉦銅 만루청일괘정동

萬景森羅四望中 만경삼라사망중

宿霧遙開靑嶂出 숙무요개청장출

歸雲淡掃碧霄空 귀운담소벽소공

一樽共坐光陰客 일준공좌광음객

百里猶存講誦風 백리유존강송풍

志道肯爲名利役 지도긍위명리역

疎才堪愧未專工 소재감괴미전공

누각 가득 밝은 해가 징처럼 걸려있으니

삼라만상 사방의 가운데라네

자욱한 안개 훤히 걷히니 청산이 빼어났고

푸른 하늘 구름 걷히니 깨끗이 쓸어버린 듯 하네

세월 보내는 나그네와 술잔 들고 함께 앉으니

강송의 유풍이 백 리에 남아 있는 듯하네

뜻한 길은 어찌 명리의 노역이 되겠나?

오로지 하지 못한 성근 재주 견디기 부끄럽네

朝陽閣詩文集․233

權祺鉉 권기현(1853~1931) 자는 공서(公緖), 호는 정수(靜修), 본관은 안동(安東)이며, 유고가 남아있다.

遺愛花城竹一亭 유애화성죽일정

四環嵐氣十分靑 사환람기십분청

此屋不修方且壞 차옥불수방차괴

今人皆醉孰能醒 금인개취숙능성

簷月曾經嘉靖世 첨월증경가정세

欞風不盡錦溪汀 영풍부진금계정

重新棟宇惟餘事 중신동우유여사

吾道旣明異說停 오도기명이설정

선조께서 남기신 화성의 죽각 하나

사방은 푸른 빛 남기고 자욱하네

이 집을 중수하지 않으면 또한 무너질 것이니

금인은 모두 취해 있는데 누가 능히 깨어있는가

처마의 달 일찍이 가정의 시대를 지났고

난간의 바람 금계의 물가에 다하지 못하네

오직 남은 일은 동우를 새롭게 중수하는 것

오도가 이미 밝아져 이설이 그쳤네

234․附―環碧亭記文

宋浚吉 송준길(1606~1672) 조선 후기 문신․학자 자는 명보(明甫), 호는 동춘당(同春堂), 시호는 문정(文正), 본관은 은진(恩津) 어려서 이이(李珥)의 문하에서 공부하고 20세 때 김장생(金長生)의 문하생이 되었다. 1624년(인조 2) 진사가 된 뒤 세마(洗馬)에 임명되었으나 사퇴하고 학업을 닦았다. 그 뒤 여러 번 임관되었으나 계속 사퇴하다가 1659년 병조판서가 되어 송시열(宋時烈)과 함께 국정에 참여하였다. 뒤에 좌참찬․찬선(贊善)에 이르렀다 송시열과 학문적 경향이 같았고 이이의 학설을 지지하였다 문묘(文廟)를 비롯하여 충현서원(忠賢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環碧亭記

환벽정기

萬曆辛亥間先君子出宰花山縣余年方六七歲隨往焉時未省事而尙記其客館之西偏有小亭披簧架巖水㶁㶁循除鳴幽閒瀟灑殆非人境卽所謂環碧亭者也

만력 신해년(1611)에 선친께서 화산 수령으로 왔을 때 내 나이 겨우 6~7세에 따라갔다. 그때의 자세한 일은 알 수 없으나 객관의 서편에 작은 정자가 있었던 것을 아직 기억한다. 대숲을 일구어 바위에 횃대를 걸었고 물이 흘러 소용돌이 쳐 섬돌에 부딪히며 그윽이 한가롭고 깨끗하여 자못 인간의 지경이 아니었으니 이 곳이 바로 환벽정이라는 곳이다.

盖黃錦溪俊良宰是縣始刱斯亭退陶李先生作近體七言一律以

朝陽閣詩文集․235

咏之今載於文集中想黃公得此詩必刊而揭之以爲一時聳觀之地而亭與詩皆無在者

대개 금계 황준량이 현령으로 있을 때 이 정자를 창건하였고 퇴도 이 선생께서 근체시 칠언 한 수를 읊었는데 지금 문집 중에 실려 있다. 생각하건데 황공께서 이 시를 얻고 반드시 현판에 새겨 걸고 한 때 우러러보는 곳으로 삼고자 했을 것인데 정자와 시는 모두 남은 것이 없다.

先君子以爲亭固不可無而先生遺跡尤不可泯滅治事之暇乃就舊基重建其亭益樹以佳花異木出其詩於集中精寫以刻更揭於楣間

선친께서는 지은 정자를 진실로 없앨 수 없고 퇴계 선생의 유적을 더욱 민멸할 수 없다고 하고 일을 보는 겨를에 옛 터에 나아가 정자를 중건하고 아름다운 꽃과 기이한 나무를 더 심었다. 문집 중에서 시를 찾아내어 깨끗하게 베끼고 새겨 다시 문미의 사이에 걸었다.

亭旣成仙源金相公穉川尹相公適奉使以過留連愛賞不忍別去各留五言一律以記之厥後諸名勝遞筒酬唱甚多實一路之勝觀也

정자가 이미 이루어지매 선원 김상공, 치천 윤상공께서 사신으로 갈 때 지나다가 머물며 경치를 감상하고는 차마 떠나

236․附―環碧亭記文

가지 못하고 각각 오언 한 수를 남겨 기록하였다. 그 후 여러 명사들이 번갈아 가며 술잔 들고 찾아와 주고받은 시가 매우 많으니 실로 한 지방의 명승지이다.

歲月旣久寢成蕪廢人不知有斯亭又有年矣崇禎戊申咸平李侯材吉宰其地爲之感慨興懷重加修葺一復舊制間嘗造余以諗之旣令余寫其亭額又使作記以識之

세월이 이미 오래되어 잡초 우거지고 폐하여 사람들이 이 곳에 정자가 있는 지 알지 못함이 또 몇 해가 되었다. 무신년(1668) 함평 이재길이 이 곳의 수령이 되어 감개한 회포를 일으켜 거듭 중수하고 한결같이 옛 모습을 회복하여 짓고 나에게 와서 고하고 나에게 정자의 편액을 쓰게 하고 또 기문을 지어 기록하게 했다.

余文拙不敢當而亦有所不忍終辭者謹肅容再拜作而曰夫邑之有亭館非直爲觀美將以頤其神養其情以淸出治之源以培興化之本盖古人累言之矣

내 글이 서툴러 감당할 수 없었으나 차마 끝내 사양할 수 없어 삼가 용모를 엄숙히 하여 재배하고 일어나 이르기를 무릇 읍에 정자가 있는 것은 다만 아름다움을 보고자 함이 아니고 장차 마음을 가다듬고 고요히 정신을 수양하여 조정에 나아가 근원을 맑게 하고 교화를 일으키는 근본을 배양하는 것이라고 옛 사람들이 거듭 말하였다.

朝陽閣詩文集․237

况我退陶先生誠百世之宗師其片言隻字學者猶且珍愛寶藏之况言之精者出於性情之正者耶

황차 퇴계 선생은 진실로 백세의 종사이니 한 마디 한 글자라도 배우는 자는 오히려 또한 보배처럼 아끼고 간직해야 할 것이다 더구나 말의 정미로운 것은 성정의 바름에서 나온 것이 아닌가.

先君子卽栗谷先生之門人尊慕退陶實有所受其踵錦溪而修其亭揭其詩者誠非遇然而李侯又繼而新之噫斯亭不可廢而斯詩不可泯也

선친께서는 율곡 선생의 문인으로 퇴도 선생을 존모하여 실로 추종을 받은 바 있다 금계 황준량이 정자를 중수하여 그 시를 건 것은 진실로 우연이 아니며 이후(李侯)가 또 계승하여 새롭게 하였으니 아 ! 이 정자는 폐할 수 없고 이 시 또한 없앨 수 없도다.

願後之爲宰更加敬飭續而修之俾無池壞且敲舞邑之學者不徒誦其詩又將讀其書尋其道講習而服之其有補於風化夫豈淺鮮矣乎

원컨대 뒷날의 수령은 다시 공경하게 이어 수리하고 더하여 어그러짐이 없게 하고 고을의 배우는 자를 고무시켜 다만 그 시만 외우게 할 뿐 아니라 또 그 글을 읽고 그 도를 찾아 강

238․附―環碧亭記文

습하고 행할 것이니 풍속의 교화에 어찌 작은 보탬이 있겠는가.

余孤露之餘黙想花山舊遊甲子適一週矣常願一至斯亭周觀童子時所遊玩其花木問其舊老以尋先君子之遺跡一以炯炯而今老且病四方之志已倦屛蟄窮廬此恨徒深旋因李侯之請不覺感慕悽咽聯書此以示異時之來宰者與其邑之士友

내 어릴 때 부모를 여의었지만 화산 땅에서 옛날 노닐던 생각을 하니 지금은 60년이 되었다 한 번 이 정자에 올라 어릴 때 노닐며 구경하던 그 꽃과 나무를 두루 보기를 항상 원하다가 옛 노인에게 물어 선친의 유적을 찾으니 한결같이 빛났으나 지금은 늙고 병들어 사방의 뜻한 것이 이미 지쳐서 궁벽한 초려에 칩거하고 있으니 이를 한탄하다가 돌아왔는데 이후(李侯)의 청으로 감모를 깨닫지 못하고 슬픈 마음으로 글을 써서 이로써 다른 날 수령으로 오는 자와 읍의 사우들에게 보이노라.

先君子諱爾昌字福汝姓宋氏恩津人辛亥宰其縣癸丑罷歸遺愛至今在民云

선친의 휘는 이창(爾昌)이며 자는 복여(福汝), 성은 송씨니 은진인이다. 신해년(1611)에 이 고을 수령으로 왔다가 계축년(1613)에 마치고 돌아가니 유애(遺愛)가 지금도 백성에 있다고 이른다.

 

 

조양각시문집(목차).hwp

 

조양각시문집(1).hwp

 

조양각시문집(2).hwp

 

조양각시문집(3).hwp

 

조양각시문집(기문)[1][1].hwp

 

조양각시문집(환벽정).hwp

 

조양각의내력[1].hwp

 

편집후기.hwp

 

 

조양각시문집(목차).hwp
0.08MB
조양각시문집(1).hwp
0.07MB
조양각시문집(환벽정).hwp
0.07MB
조양각시문집(3).hwp
0.17MB
조양각시문집(목차).hwp
0.08MB
편집후기.hwp
0.02MB
조양각시문집(기문)[1][1].hwp
0.06MB
조양각시문집(2).hwp
0.07MB
조양각의내력[1].hwp
0.04M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