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천 문화유산 자료/영천문화유산 답사기

44. 왜군이 ‘아차’하며 돌아갔다는 ‘아차골’

이원석(문엄) 2011. 12. 1. 10:21

연이은 하송, 상송, 청송에 왜장 기겁해 줄행랑

 

산세가 험하고 골이 깊어 매복을 우려한 왜장 가토 기요마사<가등청정(加藤淸正)>가 사로잡아 향도로 쓰던 촌로에게 “이곳이 어디냐?”라고 물었다.

 

촌로가 답하되 “하송입니다.” 드디어 재밑에 당도해 다시 한번 물었다. “ 이곳이 어디냐?” 촌로가 답하기를 “여기는 상송이고 이재를 넘어가면 청송입니다”라고 대답하니 본국에서 떠날 때 삼송을 조심하라는 아내의 말이 떠오른 왜장이 크게 놀라 회군했다.

 

천한 종들(왜군)이 물러간‘성스러운 고개’란 뜻에서 노귀재라 했고 길을 안내한 촌로가 보현보살의 현신이라고 믿어 그 산을 보현보살이 상주하는 곳이라 해 보현산으로 명명했다는 전설이 전해 내려오고 있다.

 

또 ‘아차’하며 왜군이 돌아섰다는 상송의 북쪽 마을을 아차 또는 아칠로 부르게 됐다고 한다.

 

노귀재에 올라서 멀리 보이는 영천과 청송의 지세를 살핀 후 50~60가구가 살다가 지금은 5~6가구 정도 남아있는 아차골로 들어갔다.

 

영천에서 청송방면으로 가다가 굽어지는 곳에 스마일휴게식당과 함께 전통찻집 아차골 다방이 나타난다. 마을 안쪽까지 500여m정도 길이 포장되어 있었다.

 

길 양쪽에는 산딸기가 행인을 유혹했고 과수농사와 함께 소와 개 사육이 이 마을의 주된 수입원임을 짐작하게 했다.

 

방치된 밭과 경운기, 잡초가 무성한 집들이 원주민들의 이주를 아쉬워하게했고 일본제국주의 때 지금의 도로가 개설되기 전 청송으로 넘어가는 길이었다는 조진호(81) 영천문화원 자문위원의 말처럼 마을 뒤로도 산으로 오르는 길이 이어져 있었다.

 

이렇게 깊은 골짜기에서 매복을 만난다면 승패를 가늠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상송, 하송, 청송이 됐건, 이여송, 송도, 송운대사가 됐건 굳이 삼송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더라도 일국의 장수라면 쉽게 넘을 수 없는 고개였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