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원석(문엄) 2011. 11. 14. 17:02

 

1) 마을의 자연환경

금오산에서 정남으로 뻗은 지맥이 갑자기 낮아져서 구릉야산을 이루고 구룡산에서 발한 시내가 마을 중앙을 흐르고 있다. 동남으로 보이는 사룡산은 마을의 정기를 한층 더 북돋워주는 듯, 서기어린 구름과 아름다운 경치는 연중이 마을을 향하여 그 영기(靈氣)를 불어넣어주는 듯 하니 고인(古人)들의 유적 또한 많은 곳이다.

 

2) 마을의 역사

1915년 명주와 용주 두 마을이 합하여져서 되었으며 이 마을은 원곡면 소재지였다.

 

▶ 명주리(明珠里) 본래 영천군 원곡면의 지역에 속하였으며 1914년 행정구역 통합에 의하여 북안면에 편입하게 되었다.

 

▶ 강변(江邊) 명주리의 중심을 흐르는 냇가에 자리 잡은 마을이라 하여 이 고장을 지나가는 다른 지방 사람들이 알기 쉽게 부르기 시작한 것이 강변마을로 호칭하게 되었다고 한다.

 

▶ 들말<야촌(野村)> 이 고장의 중앙에 위치하고 있으며 비교적 넓은 들 가운데 위치하고 있는 마을이라 해서 들마을로 불리어 오다가 차츰 들말로 줄여서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 새터ㆍ새방<신방(新坊)> 넓은 들에 새로이 마을을 세웠다고 하여 인근 마을 주민들이 새방 또는 새터라 부르게 되었으며, 또 마을 서쪽에 좋은 수리보(水利堡)가 있어 농업용수 및 음료수의 공급원이 되고 있다.

 

▶ 용주(龍珠) 광복 직후까지만 해도 청도군ㆍ경주시ㆍ대창면 등지의 상인들이 모여 제법 활기를 띤 장터로서 상인간에 불리어 전해온 명칭이다.

 

▶ 창뜸ㆍ창기(倉基) 명주시장이 성시를 이룰 무렵에는 각처에서 모여드는 상인들의 객고(客苦)를 풀어 주는 사창(私娼)이 있었다 하여 참뜸 또는 창기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창기(倉基)는 옛날 곡물을 저장해둔 창고가 있었다고 하고, 무기창고가 있었다고도 전한다.

 

“파묻고, 깨어서 버리고, 옮기고… 사라진 고인돌”_________________

“파묻기도 하고 깨어서 버리기도 하고, 또 다른 곳으로 옮기기도 했어요. 논 주인이 하나하나 없애다 보니 지금은 이 일대에 남은 게 몇 개 없어요.”

 

북안면 명주리 양성복(66)씨는 “어릴 때 올라타고 놀던 고인돌이 거의 없어졌지만 자신의 밭 아래에 있는 고인돌은 한 풍수가가 돌이 있는 것이 집안에 좋다고 해서 그나마 이 자리에 지금처럼 돌이 남아있게 됐다”고 말했다.

 

지상이나 지하의 무덤방위에 거대한 덮개돌을 덮은 선사시대의 무덤으로 거석문화의 일종인 고인돌. 고인돌은 보통 무덤으로 많이 알려져 있지만 이외에도 묘표석, 제단, 신앙의 대상 등의 기능을 하기도 했다.

 

5기가 남아있다고 전해진 명주리에는 2기가 남아있었고 수십 기가 들에 펼쳐져 있었다는 용계리 범벅이들에서는 자취를 찾을 수가 없었다. 다만 야산 쪽에 깨어서 옮겨 놓은 것으로 보이는 돌들이 제법 보였다.

 

주민 박태춘(76)씨에 따르면 “이 들에 임금님의 자국이라던 돌들이 아주 많았다. 아이들이 올라가서 놀면 위험하다고 내려오라고 했던 기억이 난다”며 “30여 년 전 경지정리를 할 때 모두 없어졌다”고 회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