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원석(문엄) 2011. 11. 14. 15:43

1) 마을의 자연환경

우항리의 동쪽과 남쪽으로는 고경면과 경계를 이루며, 북쪽으로는 고천리와 접하고, 서쪽에는 자호천과 운주산 골짜기의 냇물이 합쳐지는 곳이며, 울목이라는 지명도 두 내가 합쳐지는 곳에서 소리가 난다고 하여 생긴 이름이라고 한다. 울목은 제학곡(啼鶴谷)으로 넘어가는 기슭에 위치하고 있다.

2) 마을의 역사

청풍당 박영손 선생의 자손들이 세거해온 마을로 선생의 고아(高雅)하고 매사에 정결하며 백성들을 애무(愛撫)하던 정신이 그대로 이어져 지금今도 대인관계에서 화기를 띤 패담(悖談)과 사교적인 기질 등이 이어져 오고 있는 좋은 마을이다. 독주성(獨走性)이 없으며 협력하고 진취적이며 탐구적인 사람들이 많다. 그리고 종손들이 지은 청풍당(淸風堂)이 있다.

▶ 굽들<곡평(曲坪)> 옛날 이 마을에는 아전들이 많이 살았다고 하며 우항(愚巷)으로 가는 도중 지형이 굽은 활처럼 생겼다 하여 부른 이름이다. 평산신씨(平山申氏)가 주성이다.

▶ 연하(連河) 이칭으로 연화(蓮花)라고도 부르는데 동리 앞 못에 연꽃이 많이 피었다 하여 연하(連河)이기도 하며 우항박씨(愚巷朴氏)들이 주성을 이루고 있다고 한다. 이 마을은 조선조 전기에 황해도 풍원군수를 역임한 박영손(朴英孫, 1442~1486)의 자손들이 세거해온 마을이다.

청풍당(淸風堂) 박영손(朴英孫, 1442~1486)________________

선생의 자는 찬경(贊敬), 호는 청풍당(淸風堂), 본관은 밀양(密陽)이다. 연이현감 순조(順祖)의 아들로 태어났다. 세조 6년(1460) 19세의 약관으로 별시문과(別試文科)에 급제하여 성균관 전적, 예조좌랑(禮曹佐郞), 사헌부 지평(司憲府 持平), 사간원 헌납(司諫院 獻納)을 역임하였다. 황해도에 있을 때 백성들 보살피기를 정성을 다하여 다스렸으며 향교와 서당을 잘 다스리니 백성들은 태평을 누렸다. 암행어사가 내려와 풍원군수의 정사를 보고 말하기를 “청렴하고 깨끗하며 맑아서 흠 없는 옥과 같고 티 없는 얼음 같다”고 하니 임금님께서 청풍당(淸風堂)이라는 호를 내렸다. 65세를 일기로 세상을 뜨니 도승지(都承旨)에 증직되었다. 무오사화(戊午士禍)때 김종직(金宗直, 1431~1492) 사적(史蹟)이 불태워짐에 선생의 문적(文蹟)도 불타고 협부사(狹賦辭) 두 편만이 세상에 남아 있다.

▶ 울목<명항(鳴項)> 이 마을은 제학곡(啼鶴谷)으로 넘어 가는 기슭에 위치하며 두 내<川>가 합쳐지는 곳에서 소리가 난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밀양박씨 등이 살고 있다.

▶ 효자리(孝子里) 포은 선생 유허 터에 있는 마을로 선생이 효자로서 정려(旌閭) 받은 곳이기도 하다. 고려 공양왕 원년 군수 정유립이 유허비를 세우고 마을 이름을 효자리(孝子里)라 하였다 한다.

3) 마을의 특징

- 효자리비(孝子里碑) : 조선 중기 1600년대 세운 것으로 짐작되며 높이 1.17m, 폭 63㎝, 두께 21㎝이다. 포은 정몽주 선생이 출생한 곳으로 일설에 의하면, 조선 시대에 손순효(孫舜孝)가 경상도관찰사로 부임하여 이 동네에서 하룻밤을 지나게 되었는데, 꿈에 포은 선생이 나타나시어 현몽하시기를 “이 마을 밭에 나의 비가 묻혀 있으니 촌늙은이에게 찾아가서 확실하게 물어보라!”고 했다. 꿈이 너무나 생생하여 다음날 마을의 촌로(村老)에게 물어보았더니 꿈이 사실과 같은지라 그 자리에다 비를 세웠다.

그런데 비석의 내용을 살펴보면 <홍무기사삼월중석영수정유립비(洪武己巳三月中碩永守鄭有立碑)>라고 쓰여 있는데 홍무 원년이면 1389년 공양왕 원년에 해당되며, 당시 포은 선생이 명나라에 사신으로 파견되어 대명관계를 개선하고 돌아와 문하시중(門下侍中)으로 있을 때이다. 이 비석의 내용으로 보면 손순효가 효자리비를 처음 세운 것이 아니라 땅속에 묻혀있던 것을 발굴했다는 결과가 되는 셈이다. 비각에는 ‘포은정선생지각(圃隱鄭先生之閣)’이라는 것이 새겨져 있고, 비석의 오른쪽 면에는 ‘공신찬성사대제학정몽주(功臣贊成事大提學鄭夢周)’라고 음각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