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8. 고천리(古川里)
1) 마을의 자연환경
고천리의 동쪽과 남쪽으로는 고경면과 경계를 이루고, 서쪽으로는 양항동과 접하고 있으며, 북쪽에는 운주산(雲柱山) 골짜기의 맑은 물이 흐른다.
2) 마을의 역사
고천리는 지금부터 약620여 년 전 고려 말에 형성되었다고 한다.
▶ 고내ㆍ고냇골ㆍ고천(古川) 마을 앞으로 운주산(雲柱山) 골짜기의 맑은 물이 흘러 경치가 아름답다. 고천리의 동쪽 약 2km 지점에 있으며 고천에서 가장 안 골짜기에 있다.
▶ 부래산(浮來山) 부래산(浮來山) 동쪽에 있는 마을로 전설에 의하면 어느 해 7월 붕어같이 생긴 작은 산이 운주산 기슭에 자리 잡고 있다가 별안간 천지가 진동하는 번개가 치고, 소나기가 내려 이 산이 홍수에 떠 내려와서 현재의 위치에 자리 잡았다고 한다. 연맥(連脈)이 없이 이 산만이 외로이 우뚝 서 있으므로 이 같은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정포은(鄭圃隱) 선생의 서원이 있었으나 임란 때 소실되어 양항리(良巷里)로 이건되었다.
▶ 장개리ㆍ장리ㆍ장재(長才) 고현리 남서쪽 고냇골 입구에 있으며 골이 길다. 동래정씨가 많이 살고 있다.
3) 마을의 특징
- 동제(洞祭) : 본래 1년에 한 번씩 지내다가 요즈음에는 3년마다 제사를 지내는데 날짜는 정해진 것이 아니고 길일을 택하여 지낸다. 제주(祭主)를 선정할 때에는 동네 회의에서 결정하며, 부정한 일이 없고 성실한 사람을 뽑는다.
제주는 제사를 지내기 3일 전부터 매일 아침 목욕재계하여 몸을 정갈하게 했으며, 제주의 대문에 대나무 농기(農旗)를 세워두고 문 앞에 깨끗한 황토를 깔아두어 부정한 사람의 출입을 금한다. 제수를 장만하는 우물과 수령이 오래된 당나무 주위에도 왼쪽으로 비벼 올린 새끼줄을 달아 놓고 역시 부정한 사람의 출입을 금한다. 제수를 장만하러 장에 갈 때에는 일체 남과 대화를 하지 않으며 물건 값을 깎지 않고 달라는 대로 지불한다. 제사에 한번 사용했던 제기는 다시 사용하지 않고 동제를 지낼 때마다 새로 준비한다고 한다. 제사 시간은 보통 축시(丑時, 새벽 1~3시)에 지내는데 헌작과 축관의 독축순서로 거행되며, 제사가 끝난 뒤에 동네 각 세대주의 이름이 적힌 소지(燒紙)를 올리며 기원한다. 동제 다음날 동네 사람들이 함께 모여 음복을 한다.
- 고천서원(古川書院, 향토문화재 9-15-1) :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영천성의 적을 격퇴하여 다시 찾고, 경주로 진격하여 서천(西川) 전투에서 전사한 김대해(金大海), 김인(金演), 최인제(崔仁齊), 정석남(鄭碩男), 이영근(李榮根), 이지암(李之馣), 이일장(李日將), 이득룡(李得龍), 이득린(李得麟), 손응현(孫應晛) 선생 등 10현을 배향한 서원으로서 1705년 조선 숙종 때 건립했다. 그 후 고종 때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 의하여 폐철하고 1908년에 향내 유림들이 복원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경내에는 강당 4칸을 비롯하여 묘당(廟堂), 신문(神門), 삼문(三門) 등 4동의 건물이 있고 10의사기적비(十義士紀蹟碑)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