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원석(문엄) 2011. 11. 14. 08:47

1) 마을의 자연환경

화산산맥의 일지맥이 동남으로 뻗어 앞뒤 산을 이루었으며, 마을의 중심을 흐르는 계곡은 ‘귀일안못’에서 발하여 농업용수로 이용되고, 멀리 북쪽에는 각 산정이 뾰족뾰족하여 이 지형의 특성을 이루며, 이 뾰족한 산정기를 받아 예부터 위인들이 많이 배출된 곳이다.

2) 마을의 역사

▶ 귀일(龜日)ㆍ구일(龜逸)ㆍ귀계(龜溪) 귀호리의 중심마을로 마을입구에 구암(龜岩)이 있고 그 아래 오천천(五泉川)이란 내가 흐르고 있다. 원래 단양우씨(丹陽禹氏)가 살았으나 해가 빛을 내지 않아 떠나갔으며 창녕조씨가 거주하게 되자 해가 떠올라 귀일(龜日)이라 했다는 전설이 있다.

▶ 우목골<牛牧谷>ㆍ우무골<우묵곡(禹墨谷)> 마을 뒷산의 모습이 소가 풀을 뜯고 있는 형국이라 하여 우목곡이라 불렀다 한다. 귀애(龜厓) 조극승(曺克承) 선생이 지은 귀애정(龜厓亭)이 있다.

▶ 새못터ㆍ새못팅이ㆍ동재못터 이조참판을 지낸 창녕조씨 임계(林溪) 조경온(曺景溫) 선생을 모신 회계서원(晦溪書院) 동서재 부근에 새로 생긴 마을이라 해서 새모터 혹은 동재못터라고 부르고 있다.

▶ 평지마ㆍ평지(平地) 귀일 북쪽에 있으며 마을의 지형이 평지라서 평지마라 한다.

▶ 안귀일<內龜日>ㆍ내귀(內龜) 귀일에서 북쪽으로 약 1㎞ 지점에 자리 잡아 귀일 안쪽에 있으므로 안귀일이라 불리어졌다 한다. 임진왜란 전에 추계추씨(秋溪秋氏)가 개척하였다.

다라골<多羅谷> 약 520년 전 청주양씨(淸州楊氏)가 들어와서 다래나무를 베어내고 샘을 파고 살았다 한다. 청주양씨의 동족집단부락이다.

▶ 고부터<古阜基ㆍ高敷地>ㆍ고부<古阜ㆍ高敷> 평지에 있는 마을인데 마을언덕에 제주고씨(濟州高氏)가 처음 집을 지었다 해서 고부터라 불렀다고 한다.

▶ 새마ㆍ새마실ㆍ새마을 조선조 말엽에 생긴 마을로 청주양씨가 주로 살고 있다.

조선 철종 때 조극승(曺克承)ㆍ규승(逵承) 두 형제가 나란히 문과에 급제하여 형은 공조참의(工曹參議), 아우는 찰방(察訪)벼슬을 역임했다. 형제의 우애는 근세에 보기 드문 일이며 형의 정자는 귀애정(龜厓亭), 동생의 재사(齋舍)는 성재(省齋)이다.

6ㆍ25사변 때는 화남면민들은 물론 멀리는 강원도민들까지 3,000여 세대의 난민들이피난을 왔다고 전한다.

3) 마을의 특징

- 귀애정(龜厓亭) : 조극승의 중시조인 조경온(曺景溫)의 강학지소인 회계서원(晦溪書院)이 있었으나 1990년에 삼창 현고(三昌 賢皐) 뒤로 이건했으며 조극승의 정자인 귀애정은 일제의 탄압, 6ㆍ25사변 때 많은 고초를 겪었으나 그대로 잘 보존되어 있다. 귀애정에는 급제한 홍패(紅牌)와 구슬 갓끈 기타 서찰 등의 유물이 보존되어 있다.

- 영모재(永慕齋) : 조희장(曺希章)ㆍ임계(林溪) 조경온(曺景溫) 선생의 재사

- 회계서원(晦溪書院) : 임진왜란 때 효성이 극진했던 조경온 선생이 왜적의 위협에도 굴하지 않고 항전했다. 후일 효자와 절개자로 발탁되어 가선대부 이조참판으로 증직되어 향사를 드리던 곳이다.

- 조진수씨 가거(曺晉洙氏 家居) : 조극승 선생의 생가로 9대째 이어오는 집이며, 대지안에 귀애정ㆍ사당 등이 있으며, 공조참의로 재직할 때의 홍패(紅牌)와 문서ㆍ고서ㆍ구슬갓끈 및 기타 유물이 간직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