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 선천리(仙川里)|
1) 마을의 자연환경
기룡산맥의 일지맥이 서쪽으로 뻗어 서남간으로 내려오는 그 끝이 학지(鶴旨)이고 남쪽으로 언덕을 넘어서는 선관(仙舘)이 있으며 그 아래가 화동(花洞)이다. 건너 언덕 위는 화산산맥이 동쪽으로 뻗은 작은 연봉이 그치는 중턱에 괴들<괴평(槐坪)>이 있다. 선관의 맞은편에는 백학산(白鶴山)이 있으며 그 아래가 탑안이다.
남으로는 평야가 있으며 보현산에서 발한 고현천(古縣川)이 남쪽으로 굽이쳐 흐르다가 학지 앞과 선관, 괴평 앞을 거쳐 탑안 앞으로 흐르고 있으니 넓은 들이 펼쳐져 있고 언덕이 있다. 편리한 교통, 풍부한 농산물과 함께 기암절벽이 곳곳에 전개되어 있어 그 경광이 매우 아름답다.
2) 마을의 역사
▶ 옥골ㆍ객사(客舍)ㆍ대청(大廳)ㆍ신시(新市)ㆍ양강(洋江)ㆍ선관(仙舘) 신라 말엽 화주현(華州縣) 소재지 때는 객사(客舍)가 많이 있었던 관계로 객사라 불렀다. 전설에 따르면 이 마을 앞에 백학산이 있는데 그 산정에 화랑의 연병장이 있었다. 그 연병장의 지휘막사인 징청각(澄淸閣)이라는 정자가 있었는데, 그 각(閣)을 대청(大廳)이라 부르기도 하였다. 또 징청각(澄淸閣) 옆 골짜기에는 화랑들의 잘못이 있을 때 다스리는 옥사(獄舍)가 있었다는 말에서 옥골이라고도 불렀다. 현재의 마을 이름인 선관(仙舘)은 객사의 ‘사’자 뜻과 같은 관(館)자로 바꾸어 선관이라 이름 지었다 한다.
▶ 괴들ㆍ괴평(槐坪)ㆍ유천(柳川) 임진왜란 때 귀산박씨(龜山朴氏)가 자녀와 함께 피란 와서 살게 되었으며, 동네 앞 언덕에 회나무가 많다 하여 괴들ㆍ괴평(槐坪)이라 하다가 마을 앞 하천에 버들이 많았다는 관계로 유천(柳川)이라 부르기도 하였다 한다.
▶ 학지(鶴旨) 약 270년 전 안동권씨가 처음 이 마을에 살았다는 설이 있으나, 확실하지 않다. 마을 앞에 큰 숲이 있는데 학이 많이 날아와 앉았다고 하여 학지라는 이름이 생겼다고 한다. 1592년 임진왜란 때 영천복성에 크게 공을 세운 지산(智山) 권응화(權應鏵, 1547~1610) 선생이 원종공신 2등훈에 등재되고 관직을 떠나면서 개척한 마을이다. 그 후 선생의 후손들이 세거해오고 있다.
▶ 탑안ㆍ탑암(塔岩) 선관 남쪽에 있는 마을로 동네 앞 자연암이 탑 모양으로 생겼다고 하여 탑암이라고도 하며, 마을의 위치가 탑 모양의 산 안에 있다고 하여 탑안<塔內>이라 부른다. 탑안 뒤에서 가래실로 넘어가는 작은 고개에는 지금도 당시 성을 쌓았던 돌이 땅속에 묻혀 있음을 볼 수 있다. 예부터 역사적으로 유서 깊은 곳이기도 하다.
▶ 화동(花洞) 선관 동쪽에 있는 마을로 옛날 화주현 소재지 터라 하여 화동이라 부른다. 한자로 표기하면 華東(화동)이라 해야 하나 언제부터인지 바뀌어 현재는 花洞(화동)이라 쓰고 있다.
3) 마을의 특징
- 백학산 정상의 토성 : 높이 3m 정도, 길이 약 900m 정도의 토성이 절벽의 언덕 위에 구축되어 있으며, 서북쪽 약 500m 지점의 낮은 곳에도 석축(石築)을 쌓은 흔적이 있다. 안에는 넓이 약 800㎡ 정도의 오목한 넓은 곳이 있고 이곳에서 기와조각이 간혹 발견된다.
- 지산정(智山亭) 1592년 임진왜란 때 영천복성에 공이 많은 권응화(1547~1610) 선생의 정자로 처음에는 마을 중간에 있었으나 이건하였다.
- 완호정(浣湖亭) : 권상률(權常律) 선생의 정자로 선생은 조용히 학문연구에 몰두하였다.
- 광풍재(光風齋) : 선관서당(仙舘書堂)을 개축하여 재사로 만들고 후학을 강학하도록 했다. 오래 묵은 은행나무가 있다.
- 토성 속에 있었던 백학서원(白鶴書院) : 현 안천리(安川里)에 있는 백학서원이 이곳에 있었다. 1555년 신녕현감(新寧縣監) 금계(錦溪) 황준량(黃俊良) 선생이 향사(鄕士)들과 더불어 백학산에 서원을 세워 퇴계 선생으로부터 절목(節目)과 품제(品題)를 이어받아 백학서원이라 하고 강학을 하였다. 1592년 임진년에 불타버리고 1612년에 중건하였다. 그러나 지형이 좁고 식수가 멀어서 1658년에 현 위치로 이건하였으나 폐허로 방치되고 있다.
- 단양재(端陽齋) : 성적(成績) 선생의 서당, 선조 때 임란에 참전하여 동을 세운 바가 있어 군자감(軍資監)이라는 관직을 제수 받았다.
- 모와정(慕窩亭) : 성적 선생의 정자
- 화산재(花山齋) : 영조 때의 문인인 성세복(成世復) 선생의 재사
- 전적지 : 6ㆍ25당시 1950년 9월 4일부터 15일까지 12일간 영천사수의 국군과 영천공격의 인민군 최후의 보루였다. 지금도 도처에 당시 팠던 방공호가 산마루마다 남아있다. 이곳을 파보면 탄피, 탄두 등이 나오며, 큰 나무에는 파편ㆍ탄두 등이 깊이 박혀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