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원석(문엄) 2011. 11. 13. 09:43

1) 마을의 자연환경

마을 뒤 노고산(老姑山)으로부터 뻗은 연봉이 남으로 달려오고 ‘섭재골’에서 발한 시냇물이 마을 앞을 흘러 넓은 들 끝에 있는 덕산(德山)의 앞뒤 산들이 넓은 들을 가로막아 마치 하나의 작은 분지처럼 형성되어 있다.

 

2) 마을의 역사

▶ 갱마아<강변리(江邊里)> 강변에 있는 마을로 효자문에서 남쪽으로 900m 정도 떨어져 있으며, 나주정씨 후손들이 살고 있다.

 

▶ 괴정리(槐亭里) 지금으로부터 520여 년 전 조선 세종 때, 삼도관찰사를 지낸 나주인(羅州人) 정몽길(丁夢吉)이 입향하여 마을을 세웠는데, 그 때부터 마을 주위에 괴목이 많아 정자를 이루었다 하여 괴정리란 이름이 붙게 되었다 한다. 지금도 나주정씨가 집단적으로 살고 있으며, 정자와 서당, 유허비, 활천정(活川亭), 괴목림(槐木林) 등이 옛 모습을 지니고 있다.

 

▶ 샘골 마을 뒤쪽에 노고산(老姑山)이 있는데 이 산이 천지개벽 때 그 꼭대기가 소머리 모양으로 물에 잠겼다고 해서 샘골이라 불렀다고 한다. 노고산 아래는 장군수란 약수탕이 있다.

 

▶ 곽산(郭山) 옛날에는 인가가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없어지고 재실만이 남아 있다. 또 곽산이란 산이 있어 봄에는 이 산의 진달래가 아름다워 화전놀이터로 유명하다고 한다.

 

▶ 서당골<書堂谷> 옛날 서당에서 지방 양반자제를 교육시킨 곳이다. 그래서 서당골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 효자문 520여 년 전 세종 때 병조참판을 지낸 나주인 정몽상(丁夢祥)이 입향하여 세운 마을인데, 임진왜란 때 정응거(丁應居) 장군의 형이 부모를 위해 단신으로 왜적과 싸워 죽었으며, 그의 처 오천정씨는 왜병에게 붙잡혀 가다가 말 위에서 자결하니, 이들 부부의 효(孝)와 열(烈)을 기리어 마을 앞에 효열정문(孝烈旌門)이 세워졌다. 이로 인하여 동명을 효자문이라 부르게 되었다.

 

3) 마을의 특징

- 서당(書堂) : 나주정씨(羅州丁氏) 문중에서 후학들을 양성하기 위해 고종시대에 건립

- 사화정 : 임란공신인 정응거(丁應居) 선생과 형인 응기(應璣), 종형인 응호(應湖), 응방(應芳) 선생들의 우애를 기려 후손들이 지은 정자. 정응거 선생은 원종공신(原從功臣) 2등훈(二等勳)

 

사화정은 충훈과 효열의 상징인 곳이다. 선조 25년 임란 시 정응거 선생은 박연전(朴淵戰), 영천복성에 큰 공을 세워 원종이등훈에 기록되고 벼슬은 금부도사(禁府都事)에 이르렀다.

형인 정응기 선생은 부인 오천정씨와 함께 고향에서 늙으신 양친을 모시고 있었다. 그러던 중 왜적이 마을에 침입하여 왔다. 몽둥이와 돌 그리고 농기구로 대항했으나 얼마 안가서 민병(民兵)들은 몰살당하고 말았다. 왜병은 먼저 선생의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정씨부인의 시어머니)마저 죽이려고 하는 찰나 정씨부인이 앞을 가로 막으며 “너희들이 이 노인을 해치면 나도 이 자리에서 죽겠다. 그러나 이 노인을 살려 주면 나는 너희들을 따라가겠다.”고 하였다.

왜병은 정씨부인의 청을 들어주고 부인을 말에 태워 후퇴했다. 그런데 10리쯤 가서 부인은 은장도로 가슴을 찔러 말에서 떨어지니 무도한 왜병들도 ‘출천지 효열(出天之 孝烈)’에 경탄하고 “다시는 이 마을을 침노하지 않겠다.”고 하며 사라졌다. 이 사실을 선조임금이 듣고 1606년에 정려각을 세워 그 정신을 귀감으로 삼게 하였다.

- 활천정(活川亭)과 활천정주민가(活川亭住民家) : 철종 때 학자로 업적이 많은 정갑조(丁甲租) 선생의 정자와 주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