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원석(문엄) 2011. 11. 13. 09:39

1) 마을의 자연환경

북쪽에 있는 화산(華山, 828m)이 급히 낮아지고 동쪽은 노고산(老姑山, 557n), 서쪽은 혈암산(穴岩山)이 서로 연봉을 이루면서 가소곡지(佳少谷池)를 중심으로 작은 분지를 형성하였으며 이곳에서 발한 계천 거의 마을 중앙을 흐르며 계곡 좌우에는 구릉야산과 아름다운 경관이 전개되어 있다. 더욱 가소마을에서 남으로 내다보면 넓은 평야가 펼쳐져 저 멀리 소재지의 일부가 눈에 띈다.

 

2) 마을의 역사

1914년 이근복(李根福)이라는 선비가 가사골의 ‘가(佳)’자와 명천의 ‘천(泉)자를 따서 이 마을 이름을 가천이라 개칭하였다고 한다.

 

▶ 가산골ㆍ가사골<佳沙谷>ㆍ가사리(佳沙里) 가천리의 중심이 되는 마을로서 230여 년 전에 도구동(都九東)이라는 선비가 마을을 개척했으며, 당시 모래가 많았고, 마을 뒤 야산이 아름다운 풍경을 이루었다 하여 가사(佳沙)라 칭하였다는 설과, 마을의 산 모양이 마치 중이 가사를 등에 걸고 있는 형상이라서 가사골이라 불리어졌다는 두 가지 설이 있다.

 

▶ 새터ㆍ새태ㆍ신기(新基)ㆍ명천(鳴泉) 가사골 북동쪽에 있는 마을로 이원홍(李元紅)이란 선비가 마을을 이룰 당시 새로운 마을이라고 하여 새터라 하다가, 마을 뒷산에 범굴이 있어 밤마다 호랑이가 울어 굴 앞에 축을 쌓았는데, 굴 문을 닫으면 이 마을 사람들이 벙어리가 되고, 문을 적당히 열어 놓으면 혀 짧은 소리를 내었다고 한다. 또, 북쪽 가마골에는 가물이 들지 않는 맑은 물이 흐르므로, 호랑이 울음과 맑은 물을 연유해서 명천(鳴泉)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 작은가사골 가사골에서 북서쪽으로 약 400m 떨어진 곳에 등을 넘어 위치한 작은 마을로서 220여 년 전에 김주원(金周元)이라는 선비가 마을을 세웠다 하며, 앞마을인 가사골의 이름을 따서 작은 가사골이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 가마골 옛날 고려장 시대에 도자기 굽는 가마가 있었다고 하여 가마골이라 칭하여 왔다고 한다.

 

▶ 점등 산등입구에 도자기를 구워 집결하여 판매하였기에 점등이라 칭하여왔다.

 

▶ 옹기등대 산등 중턱에 도자기 굽는 흙을 이곳에서 채취해 사용하였다 하여 옹기등대라 명하여 왔다.

 

▶ 절터골 신라시대 사찰이 있었기에 절터라 칭하였. 지금도 법당 요사체 기초형태가 남아 있다.

 

▶ 우주지산 옛날 한발이 극심하여 신녕주민 대표들이 산 최고봉에 올라가서 우제를 지낸 산이라 하여 우주산이라 칭한다. 지금도 부락민이 한발이 극심하면 이산에 올라가서 우제를 올리고 있다.

 

3) 마을의 특징

6ㆍ25동란 때에는 1950년 8월 30일부터 9월 15일까지 무려 17일간의 격전이 치러졌던 곳이다. 그 중에서도 가장 격전을 한 날은 9월 6일부터 14일까지의 9일간이었다. 국군6사단은 김종오 대령이 이끄는 2연대, 7연대, 19연대와 인민군 8사단 오백룡 소장이 이끄는 81연대(연대장 이영래 총좌), 82연대(연대장 사세 총좌), 83연대(연대장 오윤섭 중좌), 포병연대(연대장 김명향) 등과는 전력에 있어 상대가 되지 않을 정도로 국군이 약세였다. 그러나 천우신조로 이곳을 기점으로 인민군을 반격하여 아슬아슬하게 낙동강 교두보를 잘 지켰다. 화성리에 1958년 10월 25일 육군 제1205건설공병단이 세운 신녕지구전승비(新寧地區戰勝碑)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