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원석(문엄) 2011. 11. 13. 09:36

1) 마을의 자연환경

서로는 신녕천을 넘어 왕산리가 있으며 더 멀리에는 구름이 나부끼는 팔공산의 산꼭대기가 보이고 이곳에서 급히 낮아진 산맥이 골짜기와 서로 엇갈려 깊게 또는 얕게 형성되었으며 남은 완전리를 거쳐 넓은 들이 전개되어 있다. 북은 화산을 경계로 군위군과 접해 있으며 동은 야산이 전개되어 있다.

 

2) 마을의 역사

신녕현의 소재지였다. 관아를 비롯하여 여러 건물이 있었다. 궐패를 모셨던 객사가 관아간의 북쪽에 있었고 동헌으로 현(縣)의 관아사(官衙舍)명은 송계당(松桂堂)이었다. 좌수(座首)가 소거(所居)한 곳을 향사당(鄕射堂)이라 하였으며 향사의 강학(講學) 고예지처(考藝之處)를 육영재(育英齋)라 했다. 향사(鄕士)들의 강학(學藝) 강무지처(講武之處)를 사정(射亭)이라 하여 관아문 남쪽에 있었다.

장관청(將官廳)이라 하여 행수수직처(行首守直處)가 있었고 군관청(軍官聽)이라 하여 군인, 수직처(守直處)는 관아문 외에 있었으며 관노들의 수직처는 노반청(奴房聽)이라 하여 아문뒤에 있었다. 수리(首吏) 수직처는 인이청(人吏聽)이라 하며 관아문 앞에 있었고 호장 수직처는 현사(縣司)라하며 관아문의 동에 있었다.

군기고(軍器庫)는 객사 동쪽에 있었고 대동고(大同庫), 관청고(官廳庫), 장휼고(脹恤庫), 사고(司庫)는 모두 현내(顯內)에 있었고 동창(東倉)은 현 화남면 삼창리에, 가산내창(架山內倉)은 칠곡부지(漆谷府地)에 있었고 빙고(冰庫)는 관아문 남쪽에 있었다 한다.<화산지(花山誌) 참고>

 

▶ 관기(官基)ㆍ관근리(官近里) 1300여 년 전에 경주이씨가 개척했다는 마을로 고을 원이 집무한 관청이 있어 행정의 심장부였다. 관기(官基)라 칭했고 현재 화성3리에 속한다.

 

▶ 조ㆍ교리(校里) 경주최씨가 이룬 마을로 관기의 북쪽에 위치하며 220여 년 전에 마을 뒤에 세워진 향교를 보고 교리(校里)라 이름 지었다 한다. 지금도 향교가 지방문화재로 지정되어 보존되고 있으며 화성1리에 속한다.

 

▶ 본관(本官) 화성리 전체를 일컫는 이름으로 고을원이 본관이라 호칭하고부터 전해지는 이름이며 신녕면 소재지의 중심을 이루고 있다. 서편 강 건너에는 본관과 구별하여 별관(別官)이 위치하고 있다.

 

▶ 성밑ㆍ성저(城底) 마을 뒤 산줄기에 성이 있었고 그 성 아래에 자리 잡은 마을이라 해서 성밑이라 불렸다고 한다. 지금도 마을 뒤 야산에 성터의 흔적을 볼 수 있으며 현재 화성5리에 속한다.

 

▶ 점막(店幕) 현재 화성3ㆍ4리 일부인 시장터 일대를 말하며, 옛날부터 점포가 많이 있었다고 한다.

 

▶ 유정(柳亭) 경주김씨가 터를 잡아 마을을 이루었으며 마을 뒤 사천변(沙川邊)에 150년생 이상 되는 수양버드나무가 많이 있어 유정이라 칭했다고 하며 현재 화성4리에 속한다.

 

* 동헌(東軒) : 지방의 고을 원이나 감사(監司), 병사(兵使), 수사(水使) 그 밖의 수령(守令)들의 공사(公事)를 처리하는 대청이나 집

 

* 객사(客舍) : 궐패(闕牌)를 모셔두고 임금의 명을 받들고 내려오는 벼슬아치를 대접하고 묵게 하던 집으로 고을마다 둠.

 

* 궐패(闕牌) : 궐자(闕字)를 새긴 위패(位牌), 각 고을 관아(官衙)의 객사에 모셔놓고 앞에서 망궐례(望闕禮)를 행함.

 

*망궐례(望闕禮) : 외관(外官)이 명절 때나 왕(王), 왕비(王妃)의 생일 때 절하던 예식.

 

3) 마을의 특징

옛날부터 내려오는 신녕현과 또 현재의 신녕면의 소재지이다. 신녕현 당시의 관아는 모두 헐리고 현대건물이 즐비하다. 그러나 옛 풍습을 그대로 지닌 향교와 환벽정<環碧亭, 비벽정(斐碧亭)이라고도 함>이 창건이후 누차에 걸쳐 이건과 중수를 하면서 존속해 오고 있다.

현 면사무소 입구에 예부터 본 현에 부임하여 선정을 베푼 역대 현감과 관찰(觀察)들의 비가 24기 서있다. 선정한 관헌(官憲)이나 이를 보좌한 아전(衙前), 그리고 혜택을 본 백성들의 인심을 상징하는 듯하다. 그리고 6ㆍ25때 격전지였던 곳에 신녕지구전승비가 우뚝 서 있어서 당시의 전황을 말해주고 있다.

- 신녕향교(新寧鄕校) : 지정이외 문화재 제46호로 목재를 재료로 만들어졌다. 창건 연대는 알 수 없으나 선조 25년(1592)에 실화로 소실되었으며 광해군 7년(1615)에 처음 건립했던 유허지에서 남쪽으로 100m쯤 떨어진 위치에 이건하였다가 다시 1686년에 현재의 자리에 옮겨지었다. 이곳에는 동방명현 27위를 배향하고 있으며 건물은 대성전(大成殿) 3칸, 전사청(典祀廳) 2칸, 명륜당(明倫堂) 5칸, 동재(東齋) 3칸, 서재(西齋) 3칸이다.

- 환벽정(環碧亭) : 향토문화재 9-15-8, 목재를 재료로 사용하였으며 조선 인종(1545) 때에 만들어졌다. 원래는 비벽정이라 하여 정덕(正德), 병자(丙子) 1516년에 현감 이고(李考)가 다시 창건하였으나 실화로 소실되고 1584년에 다시 지었다. 그 후 1611년에 현감 송이창(宋爾昌)이 중수한 후 환벽정이라 개칭하였다. 건물은 육각정으로 겹처마, 익공(翼工) 6모지붕이다.

- 신녕선정비군(新寧善政碑群) : 화성리 면사무소 내에 위치하였으며 크기는 높이 1~1.3m, 두께 13~23cm, 폭 35~40cm이다. 재료는 자연석이 사용되었으며 시대는 조선 중기 이전이다. 숙종 이후 신녕현에 부임한 현감들의 선정을 기념하기 위한 비로서 원래는 여러 곳에 흩어져 있던 것을 현지에 옮겨 세운 것이다. 이응인선정비(李應仁善政碑) 등 24비가 있다.

- 신녕지구전승비(新寧地區戰勝碑) : 6ㆍ25전쟁 때 적 제2군단과 아군 제1군단이 치열한 공방전을 전개하여 대구로 진격하려던 적의 작전을 통쾌하게 분쇄함으로써 숱한 인명의 손실은 가져왔으나 마침내 적을 저지 퇴패시킨 승전의 현장이다. 이 전투에서 승전을 기념하고 아울러 불멸의 전공을 세우고 장렬히 전사한 영령들의 영혼들을 위로하기 위해 1958년 영천지구 위수사령부에서 세운 비다. 높이 7m, 폭과 두께는 62cm로 되어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