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원석(문엄) 2011. 11. 13. 09:28

1) 마을의 자연환경

팔공산에서 동으로 뻗은 일지맥이 태실봉(胎室峰)을 이루고 다시 동으로 두 갈래로 갈라져서 앞뒤 산맥을 이루다가 갑자기 낮아져 구릉야산을 형성하였다. 두 산맥 사이에서 발한 시내가 마을 중앙을 이루고 있으며 마을 아래 동쪽은 약간의 넓은 들과 와곡(瓦谷), 척일(尺日)의 두 못이 구축되어 있어서 농산물이 비교적 잘 되는 곳이다.

2) 마을의 역사

삼괴(三槐), 죽계(竹溪), 봉계(鳳溪)로 된 마을이 1914년 합병되었다.

▶ 봉계리(鳳溪里) 최제학(崔濟學)이라는 선비가 320여 년 전에 이 마을을 개척하였으며 애련리 최북단에 위치하고 있다. 이곳에서 북서 약1㎞ 지점에 봉루암(鳳樓庵)이라는 사찰이 있다고 하여 봉계리라고 한다.

▶ 천곡(泉谷) 마을 약550m 지점에 샘이 하나 있었는데 이 샘은 7년이나 가물어도 마르지 않고 샘을 중심으로 무지개가 섰으며 맑은 물이 변함없이 넘쳐흐른다고 하여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 죽곡(竹谷)ㆍ죽계(竹溪) 이 마을을 개척할 당시에 계곡에 사시사철 수많은 대나무 숲이 우거져 있었다고 하여 마을이름이 생겼으며 그 당시 이 마을에 길조가 전해졌는데 특히 남아를 낳으면 그 아이는 자라서 대나무처럼 절개가 곧은 애국자가 된다는 소문이 나돌아 마을이 번성하였다고 한다.

▶ 삼괴(三槐) 커다란 괴목(槐木) 3그루가 있었다고 하여 이 마을이름을 삼괴라 불렀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은 한그루만 남아있다.

▶ 율정(栗亭) 이 마을에는 밤이 많이 나온다고 하여 이렇게 불렀으며 밤알도 다른 곳의 밤보다 훨씬 크고 맛이 좋아서 크게 인기가 좋았다고 한다. 이러한 밤나무를 보다 가까운 곳에서 관리하게 하기 위해 한 집 두 집이 들어와서 오늘날의 마을을 이루게 되었다고 한다.

▶ 재애등ㆍ와곡(瓦谷) 이 골짜기 북쪽 산비탈에 단양전씨(丹陽田氏)가 많이 살았고 기와굴도 있었다고 하는데 이렇게 해서 붙여진 이름이 재애등이다.

3) 마을의 특징

- 송곡서원(松谷書院) : 태재(泰齋) 류방선(柳方善, 1387-1443) 선생을 제향한 서원이다. 자가 자계(子繼), 호가 태재인 선생은 고려말엽에 태어났으며 본관이 문화(文化)였으나 중세(中世)에 서령군(瑞寧君) 성간(成澗)의 사본(賜本)을 받아 서산(瑞山)으로 했다.

송도(松都) 방제에서 서령부원군 기(沂)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태종 9년(1409) 문자(文字)의 관계로 죄목이 되어 청주로 유배갔다가 다음해에 영천 팔공산 밑의 송곡(松谷 : 지금의 원촌리)으로 이배(移配)되었다. 집을 짓고 현판을 태재(泰齋)라 써서 달았다.

세종 6년(1424)에 죄를 면하고 주부(主簿)벼슬을 내렸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세종대왕이 공경하고 중히 여겨서 집현전학사로 임명하여 스승의 예로 대우하니 선비의 명예스러운 일이었다. 문하의 선비로 대전(大田) 이보흠(李甫欽, 1397-1457)과 사가(四佳) 서거정(徐居正, 1420-1488) 등이 있다.

후학들이 1702년에 위패를 봉안하고 제행을 올리다가 대원군 때 훼철되고 1961년 이곳 애련리로 이건하고 제향을 올리면서 선생을 추모하고 있다.

- 북산서당(北山書堂) : 낭산(朗山) 이후(李厚)와 그의 아들 중재(中齋) 이호대(李好大) 부자의 서당이다. 낭산의 교육정신을 아들인 중재가 계승하여 지방교육에 힘썼다.

- 봉루암(鳳樓庵) : 연대미상의 암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