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 계지리(桂芝里)
1) 마을의 자연환경
팔공산에서 동으로 뻗은 일지맥이 다시 동남쪽으로 향하여 작은 연봉을 이루어 구릉야산을 형성하고 안신원리(新源里) 산골에서 발한 시내는 이 마을 서쪽 산기슭으로 흐르고 있어 계곡 동서는 기암(寄岩)과 구야(丘野)를 이루고 있어 특산물이 많으며 교통이 편리하고 고인(古人)들의 유적이 많다.
2) 마을의 역사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상계(上桂), 지리(芝里), 계곡(溪谷), 성리(城里)가 합한 것이다.
▶ 망지(望芝)ㆍ지리(芝里) 이현중(李玄重)이라는 선비가 약 570년 전 이 마을을 개척할 때 지초(芝草)가 많다고 하여 지리(芝里)라 하였다고 한다. 그 후 이현필(李玄弼)이라는 선비가 앞산 봉화산(峰火山)을 바라보고 있다고 하여 다시 망지리라 고쳐 불렀다고 한다.
▶ 무연골ㆍ무연곡(舞燕谷)ㆍ계림(桂林) 양무생(楊武生)이라는 선비가 320여 년 전에 이 마을을 개척하였다고 한다. 개척할 당시 연못에 연꽃이 피어 바람에 흔들리며 춤을 추었다고 하여 마을 이름을 무연(舞燕)이라고 하였다 한다.
▶ 넓은 문ㆍ광문(廣門)ㆍ판문(板門) 120여 년 전까지만 해도 신녕(新寧)에서 마을로 돌아오는 동구에 암석(岩石)으로 된 넓은 문이 있어 일명 판문(板門)이라 불렀으며 현재는 말만 전하지 그 흔적은 찾아볼 수가 없다.
▶ 강변(江邊) 마을 한가운데로 청통천(淸通川)이라는 내가 흐르고 있는데 이 내는 날이 아무리 가물어도 물이 마른 적이 없다고 한다. 가뭄이 유독 심한 어느 해에 물을 찾아 몇 집들이 이곳 강변 쪽으로 옮겨와서 살게 되었는데 그때부터 강변마을로 통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 마을에 봉화대(烽火臺)가 있었다, 조야산정(助也山頂)이며 둘레 72m, 높이 1.8m로서 조선시대부터 있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석축을 쌓아 설치한 것으로 남쪽으로는 청통면 신덕리 봉수대(烽燧臺)와 응하고 북으로는 신녕면 부산리(富山里)의 봉수대와 연결된다.
▶ 뒷골ㆍ잘미ㆍ후곡(後谷)ㆍ성동(城洞) 망지리 뒤편에 토질이 좋은 땅이 있었다고 한다. 이 땅에 과일나무를 심으면 과일이 잘 되었으나 추수기에 도둑을 잘 맞아서 손해를 본 사람들은 이곳으로 이사를 와서 살게 되었고 망지리 뒤쪽에 있다고 해서 마을이름을 후곡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