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 오계리(五溪里)
1) 마을의 자연환경
동쪽에 큰 못이 있으며 사방이 구릉야산으로서 마을을 감싸고 있다. 북쪽은 구릉지를 넘어 금호강이 흐르고 있고 동쪽은 채약산이 저 멀리 보인다. 남은 금박산을 중심으로 한 대소 연봉들이 눈에 들어오며 작은 개울은 동쪽에 있는 못에서 발하여 서쪽으로 흐른다. 서쪽은 금호평야를 지나 팔공산의 연봉들을 볼 수 있다.
2) 마을의 역사
오종리(五宗里)와 단계(丹溪)로 되었다. 단계 또는 사교(沙橋), 사근다리라고 한다. 가장 큰 마을이며 곽(郭)ㆍ조(曺)ㆍ최(崔)씨가 주로 살고 있다.
조선 정조 때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를 지낸 조학신(曺學臣) 선생이 입향한 곳이며 마을 서쪽 언덕을 울창한 송림(松林)으로 감싸고 있다. 줄잡아도 한 아름되는 소나무가 250본(本)은 되어 보이며 조학신 선생이 직접 심은 것이다.
채약산 기슭에서 시작하여 5개의 민둥산이 서북쪽으로 연이어져 있으며 그 마지막 다섯째의 민둥산을 끼고 아래에 마을이 생겼으니 오종리(五宗里)라 한다. 오계리는 일제 때 행정구역 개편 때 오종동의 ‘오(五)’자와 단계의 ‘계(溪)’자를 따서 오계리라 한데서 연유되었다.
▶ 사근달ㆍ단계(丹溪)ㆍ사교(沙橋) 오계리에서 가장 큰 마을이며 을사사화 때 경재 곽순 선생이 옥사할 때 마을 안 개울이 붉게 흘렀다 하여 단계(丹溪)라고 한다. 단계로 부르기 전에는 시장이 있었다.
▶ 종동ㆍ오종리(五宗里) 새터 북쪽에 있는 마을로 영천은 예로부터 남조북정(南曺北鄭)이라 하여 조씨가 남쪽에선 으뜸가는 가문이다. 그래서 조씨마을을 종동(宗洞)이라 한다고 하며 지금은 오종(五宗)과 단계(丹溪)를 합하여 오계리라고 불린다.
을사사화(乙巳士禍) 때 경재(警齋) 곽순(郭洵, 1502~1545) 선생이 옥사할 때 마을 안개울이 붉게 흘렀다 하여 단계(丹溪)라고 했다 한다. 새터 북쪽에 있는 오종리는 종리(宗里)라고도 한다.
3) 마을의 특징
- 경재사당(警齋祠堂) : 조선 중종 때 사간원(司諫院)의 사간(司諫)을 맡은 학자로 을사사화 때 부당한 정사를 충간하다가 반대파의 무고로 작살당한 곽순(郭珣) 선생을 추모하여 지은 사당
- 사효재(思孝齋) : 고려 우왕 때 문과에 급제하여 희천군사(熙川郡事)로 봉직하였고 이어서 조선조에 내려와 강계도 병마절도사(江界道 兵馬節度使)에 임명되었으나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는 절의로 영천으로 은둔한 조신충 선생의 묘소를 수호하기 위하여 건립한 재사이다.
- 만취당(晩翠堂) : 조선 선조 때 성리학자인 지산(芝山) 조호익(曺好益) 선생의 7세손이며 정조 때 전라병마절도사(全羅兵馬節度使)를 역임한 조학신(曺學臣) 선생의 고택으로 만취당은 사랑채의 당호(堂號)이다. 이 집은 조선시대 사대부 저택의 면모를 갖추고 있어 1984년 중요민속자료 제175호로 지정되었다. 보본재(報本齋)는 이 집의 부속건물로 체천위를 봉사하기 위해 세운 재사이다.
- 함양재(涵養齋) : 조선조 말엽 창녕조씨 가문에서 후손들의 학업을 위한 강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