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 신월리(新月里)
1) 마을의 자연환경
유봉산에서 남으로 뻗은 산맥이 낮아져서 구릉지를 형성하고 다시 낮아져서 평야를 이루어 넓은 들을 만들었다. 동으로는 구릉을 넘어 금호강이 흐르고 그 건너편은 서부동이다. 남쪽은 넓은 들이 전개되어 그 끝에 ‘호용소’로 되어있다.
서쪽은 넓은 들이 펼쳐져 저 멀리 아물거리는 금호평야의 시발처이며 습지가 많은 평지가 아니고 구릉을 끼고 있는 마을이기에 예부터 인류가 정착하기에 편리했을 듯하다.
2) 마을의 역사
월하(月下)와 신흥(新興)의 일부가 된 마을이다.
▶ 금꾸디 ‘금구덩이’라는 뜻인 듯하다. 일제 때 금을 캐려고 개발한 곳으로 부근에 금의 산출이 많았다. 일제 때는 잘사는 곳이었으나 해방 후에는 가난한 마을이 되었으므로 다시 좋은 마을을 만들려고 노력하는 중이다.
▶ 붉은디, 붉은디기 붉은 흙이 산출되므로 농기를 구웠다. 옛날에는 동제를 지냈다. 솔밑각단 탑못이 있고 소나무 숲이 있어 정자모양이다.
▶ 월하리(月下里) 으뜸 되는 마을로 뒷산이 반월처럼 생겼다. 새각단은 새로 생긴 마을이고 큰각단은 큰 마을이며 중간각단은 중간에 있다. 마을이 생긴 것은 아주 옛날이다.
▶ 땀고개ㆍ땅고개 월하리 고갯마루에 사당이 있어 당(堂)고개라 하던 것이 어느 때부터 이 고개를 넘어갈 때 땀을 많이 흘리는 고개라 하여 ‘땀고개’ 또는 ‘땅고개’라 했다. 대구-영천 간 도로를 개설할 때 경사가 높은 산지를 깎아 만들었는데 그때 생겼다고 땅꼭이라 칭한 것이 지금은 ‘땅고개’가 되었다고도 한다. 서부동과 금호읍과의 경계에 있는 고개이다.
이 마을을 싸고 있는 숲으로 팔공산 도둑봉에서 보이지 않도록 소나무와 대나무를 심어 숲을 만들었다고 전해지며 현재 대나무는 없어지고 소나무만 남아있다.
신월지 못둑 밑에 탑이 있어 탑못이라 하며 신라대찰이었으나 지금은 못이 되었다. 사찰 뜰에 있었던 탑이 지금도 남아있다.
궁예(弓裔)와 왕건(王建)이 싸우다가 왕건이 패하여 팔공산으로 도망갈 때 사찰을 불태우고 말았다. 불상은 죽림사(竹林寺)에 옮겼으며 탑은 일제 때 넘어진 것을 넘어진지 16년 만에 다시 세우고 1960년대에 절을 새로 세워서 신흥사(新興寺)라 하고 탑이 있는 절이라고 하여 탑절이라고도 한다. 삼층석탑은 신라중기로 추정된다.
보물 제465호로 신흥사(新興寺)내에 있는 신월동삼층석탑(新月洞三層石塔)은 신라중기의 작품으로 추정되며 높이가 4.57m이다. 이중기단으로 되어있으나 한 개의 돌에 2중으로 모각하였고 중석은 각 면에 우주(隅柱)가 되어있으며 상단 중석의 각 면에는 팔부중상이 양각되어 있다. 옥신(屋身)과 옥개석(屋蓋石)은 한 돌로서 역시 우주가 모각되어 있다.
옥개받침은 각층 4단이고 추녀 밑은 수평을 이루었으며 낙수면은 통식(通式)의 경사를 이루고 있다. 상단부(3층 받침 위)는 원래 잃어버리고 없던 것을 후대에 새로 만들어 현재는 4층탑을 이루고 있다.
금호평야는 넓어 일제는 말년에 이를 이용하여 현 개당교에서 읍내로 오는 길에 일본항공기의 활주로를 만들었다. 또 땅고개 산기슭에는 항공기(일본전투기)들의 안전 격납고를 많이 만들었다. 반지하로 위는 콘크리트로 덮고 입구는 산쪽으로 내려오도록 둥글게 만들었다. 그러나 일제는 이를 활용하지 못하고 패망하였다.
3) 유봉산(遊鳳山)=죽방산(竹坊山)
예부터 전해 내려오는 말에 의하면 이 일대에는 대나무와 오동나무가 무성하였을 뿐만 아니라 예천수<醴泉水=감천수(甘泉水)>가 샘솟듯이 나와 태평성대가 되면 3년에 한 번씩 봉황(鳳凰)이 모여들어 대나무 열매를 먹으면서 서식했다고 전해 내려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