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원석(문엄) 2011. 11. 13. 08:45

1) 자연환경

야산을 등지고 형성된 마을이다. 동쪽으로 일명 구룡산(九龍山)이라고 부르는 야산이 버티고 바로 그 아래 기다랗게 펼쳐진 부락이다. 서쪽으로는 고현천(古賢川)이 흘러 강 주변에 비교적 비옥한 평야를 만들고 있다. 그리고 남쪽으로는 신녕천이 흘러 쌍계동과 경계를 이루고 북쪽으로는 녹전동과 접하고 있다.

2) 마을의 역사

대전동은 원래 1ㆍ2구(區)로 되어 있다. 지금도 그렇게 부르지만 원래의 행정명칭은 상대전동과 하대전동이다.

이 마을은 원래 영천이씨가 주류를 이루던 마을로 대부분 이보흠 선생과 연관된 지명을 이루고 있다. 조선 세조 때 순흥부사로 재직하던 이보흠 선생이 금성대군과 함께 단종복위운동을 펴다가 참형되는데 이를 기리기 위해 호인 대전(大田)을 따서 마을의 명칭으로 하였던 것이다. 마을에 수양곡, 서산곡, 순흥연 등의 자연지역 명칭이 남아있는 것으로 보아 그의 충절을 기리는 뜻에서 연유된 것으로 보인다.

서산곡은 중국 주나라의 백이와 숙제가 침략자의 곡식을 먹지 않겠다며 수양산에 은거했다는 충절을 이보흠과 비유해서 생긴 명칭이고, 수양곡은 수양대군을 비유한 것이며 순흥연은 영주군의 순흥을 지칭한 것이다.

근대 조직된 행정으로는 명산면(鳴山面)이었으나 1914년 행정개편으로 상ㆍ하대전동과 오미동 일부를 합하여 화동면(華東面) 대전동(大田洞)이 되었다. 그 후 다시 영천면에 속하게 되었고 1981년 영천읍이 시로 승격되면서 군부의 읍면동에 해당하는 대전동이 되었다가 1998년 서산동에 속하게 되었다.

▶ 한밭ㆍ대전(大田) 본래 영천군 명산면의 지역으로 큰밭으로 되어 있었으므로 한밭 또는 대전(大田))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상대전(上大田), 하대전(下大田), 오미동(五味洞) 일부를 병합하여 대전동(大田洞)이 되어 화동면에 속하다가 1934년 4월 1일 다시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영천읍에 편입되었다.

▶ 아랫마아ㆍ바깥마아ㆍ하대전(下大田) 대전 아래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불려진 이름이며, 조선시대 금성대군(錦城大君)과 함께 단종(端宗) 복위운동에 가담했다가 참형된 이보흠(李甫欽)이 출생한 곳이다.

▶ 웃마아ㆍ윗마을ㆍ상대전(上大田) 호수(湖수) 정세아(鄭世雅)의 종택이 있고, 양계(暘溪) 정호인(鄭好仁)의 태생지이며 대전 위쪽에 있기에 지어진 이름이다.

▶ 어봉골ㆍ어봉곡(魚峰谷)ㆍ중대전(中大田) 오천정씨가 많이 사는 이 마을은 상대전과 하대전 사이에 있으며 어봉(魚峰) 정호문(鄭好問)이 학문을 연수하던 곳이라 하여 어봉동이 되었다.

▶ 갱분마아ㆍ갱빈마아ㆍ포동(浦洞) 이 마을은 고현천(古縣川) 서편에 자리 잡고 있다. 마을 앞을 돌아 흐르는 맑은 냇물은 영천강에 합류한다. 강변에 연해있기에 갱분마아ㆍ갱빈마아ㆍ포동이라 부르고 있다.

3) 마을의 문화유산

(1) 양계정사(陽溪精舍)

민속자료 제88호인 양계정사는 조선조 병자호란 때의 명신인 정호인 선생을 추모하여 세운 정사다. 선생은 대동법이란 조례를 제정하고 해상방위를 위한 합리적 규정을 개정하였으며 진주목사, 남원부사 등을 역임하였다.

(2) 이보흠 유허비(李甫欽 遺墟碑)

문화재자료 제24호인 이보흠 유허비는 대전동 618번지에 소재하고 있으며 인조 7년에 건립한 높이 1.7m, 폭 69cm, 두께 25cm이다. 이보흠 선생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후세사람들이 세운 것이다.

(3) 호수종택

경상북도유형문화재 제90호인 호수종택은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크게 활약한 호수 정세아 장군의 손자인 해남현감 정호례 선생이 건축한 工(공)자 형의 건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