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천 문화유산 자료/영천문화유산 답사기

41. 보성리 암각화 선사시대 문화규명에 중요한 역할 - 청통 보성ㆍ신덕

이원석(문엄) 2011. 11. 13. 08:25

성황당-구도현 연결 성산봉수대 비교적 원형 잘 보존

 

남쪽으로는 쌍계동 성황당봉수대, 북쪽으로는 청통면 계지리 구도현(仇道峴)봉수대와 연결되는 청통면 신덕리의 성산(城山)봉수대. 둘레 30m, 높이 3m인 이 봉수대는 토성을 쌓아 봉수대를 만들었으며 그 중심에 봉화단이 있다.

 

보성리 암각화 주변에 자동차를 세워두고 도로를 건너 비교적 잘 정비된 길을 따라 30여분 정도 걸어 봉화산 정상으로 올라가면 성산봉수대가 나오는데 영천에 남아있는 6기의 봉수대중 원형이 가장 잘 보존된 곳이다.

 

집터와 기와조각들이 군데군데 흩어져 있는 이곳에는 지난 1994년 11월 27일 영천향토사연구회와 보이ㆍ걸스카우트 영천지구 1270 BBS 골벌지역대에서 세운 표석비가 우두커니 서있다.

 

신덕리는 본래 영천군 산저면 지역이었으나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덕리(德里)와 성리(城里)를 병합하여 신덕이라 해서 청통면에 편입되었다. 올라갈 때와 달리 10여년 전 표석비를 운반하던 완만한 길을 따라 보성리로 되돌아 나왔다.

 

보목은 그곳에 거주하던 사람들이 뒷산의 봉수에 쓰일 나무를 가져다주면서 봉화지기들을 크게 도와주어서 생긴 이름이고 목성은 각종 수목이 울창하고 주위의 산들이 성처럼 쌓여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1914년 보목(甫木)의 보자와 목성(木城)의 목자를 따서 보성리(甫城里)라 했다.

 

유형문화재 제286호(1994. 4. 16)로 지정된 보성리 암각화(岩刻畵)는 지난 1993년 6월경 영천향토사연구회원들이 청통지역을 답사하던 중 보성리 마을 어귀에서 거북모양의 바위에 새겨진 이상한 형태의 문양을 발견, 자체 자료를 수집하여, 경주박물관 학예연구실에 통보함으로써 학계에 알려지게 되었다.

 

영천전자고 조인호 교장이 골벌 9집에 발표한 ‘영천 보성리 암각화의 성격’ 논문중 일부를 요약해 보았다.

 

화강암으로 된 거북바위에 여러 문양이 새겨져 있는 보성리 암각화는 윗면 중앙을 따라 하나의 능선으로 이어져 있고 중앙을 중심으로 양쪽 면으로 비스듬한 경사면을 이루고 있다.

 

길이 최장 335㎝(직선 324㎝), 폭 154㎝(앞면 99㎝, 뒷면 55㎝, 직선 144㎝), 높이 30㎝ 크기로 양면에 방형기하문 암각화 16개와 여러 개의 바위구멍이 새겨져 있다.

 

보성리 암각화 역시 금호강 상류의 본류와는 멀리 떨어진 골짜기이기는 하지만 거적지(巨積池)에서 발한 작은 시내가 흐르고 있어 물과는 무관하지 않으며 화강암으로 된 거북바위에 여러 문양이 새겨져 있는 방형기하문 암각화 형태로 인식되는 문양 16개와 여러 개의 바위구멍이 새겨져 있다.

 

방형기하문 암각화는 마제석검의 검파식에서 파생된 것으로 보여진다. 또한 문양의 상징성에 있어서도 마제석검의 검파식에서 파생된 검파형을 모방 묘사한 기하학적 여성상과 여성의 생식기를 상징주의적으로 묘사한 것으로, 풍요와 다산의 여신상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보여진다.

 

보성리 암각화의 양면 중 폭이 넓고 문양이 많이 나타나는 면을 앞면, 다른 면을 뒷면으로 구분할 때 앞면에 11개, 뒷면에 5개의 방형기하문 암각문양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마멸상태가 심하여 구별하기는 힘들지만 앞, 뒷면에 여러 개의 그림이 새겨진 흔적이 있는 것으로 보아 더 많은 암각화가 새겨진 것으로 판단된다.

 

또한 앞면보다 뒷면의 마멸상태가 훨씬 심해 판독은 불가능하나 실제로는 뒷면에도 앞면과 비슷한 수의 그림이 새겨졌을 것으로 추측된다.  

 

보성리 암각화에 나타나는 문양은 비교적 단순하며, 암각의 크기도 다른 지역의 암각화에 비해 작은 편이다. 측정 가능한 문양의 크기는 대체로 윗변 길이 20㎝~13㎝, 아랫변 16㎝~11㎝, 상하 길이 25㎝~16㎝ 정도이다.

 

영천지역의 지리적인 위치와 보성리 암각화에 나타나는 문양의 특징으로 볼 때 영천 보성리 암각화는 방형기하문 암각화 계통으로 인식되는 인근지역 암각화와의 성격규명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띠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포항 인비리와 칠포리 등 영일만 일대의 해안에서 제작되기 시작한 방형기하문 암각문화가 경주 석장리와 상신리를 거쳐 고령 양전동과 안화리, 그리고 영주 가흥동으로 전파되는 과정에서 중간 고리의 역할을 담당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방형기하문 암각화는 청동기시대 고인돌 문화와 밀접한 관계를 갖고 형성된 것으로 보여지는데 여러 가지 문헌과 고고학적 자료의 검토를 통해 볼 때 영천지역에서는 골벌국 형성 이전에 이미 화산ㆍ신녕을 중심으로 정치집단이 성립되어 북천일대를 장악하면서 성장되어 있었으며, 그 시기는 늦어도 기원전 3~2세기경으로 추정된다.

 

또한 이보다 늦은 시기인 기원전 1세기경에는 완산동을 중심으로 금호읍 어은리와 고경면 용전리 일대에서 또 다른 정치집단이 등장하여 남천 일대를 장악한 것으로 보여진다. 그리하여 영천지역은 이들 정치세력간의 경쟁과 복속을 통해 하나의 소국으로 통합되어 강력한 정치집단으로 성장했으며 후일 사로국에 버금가는 정치세력으로 성장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보성리 암각화는 영천의 문화를 사랑하는 젊은이들에 의해 발견되어 우리나라 선사시대의 문화를 규명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으며 조인호씨의 논문으로 실체에 한층 더 접근할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되었다.

 

만물이 약동하는 새봄이 오면 우리 지역의 문화와 예술을 찾는 발걸음들이 많이 이어졌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