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천 문화유산 자료/영천문화유산 답사기

39. 포은선생 태생지 충효 깃든 유적 많아 - 임고 우항

이원석(문엄) 2011. 11. 13. 08:24

효자리비, 우고서사, 석연정, 모우정 등 풍수와 조화

 

임고면 우항리는 포은 정몽주 선생의 태생지로 청백리로 이름난 청풍당(淸風堂) 박영손(朴英孫) 선생의 후손들이 세거해온 마을이다. 금호-고경 간 우회도로가 개통되면서 마을위로 지나가는 자동차로 인해 마을이 한층 개방된 느낌이 들었다.

 

우항리는 동쪽과 남쪽으로는 고경면과 경계를 이루고 북쪽으로는 고천리와 접하며 서쪽으로는 자호천과 운주산 골짜기의 냇물이 합쳐지는 곳이다. 울목〔鳴項〕이라는 지명도 두 내〔川〕가 합쳐지는 곳에서 소리가 난다고 하여 생긴 이름이라고 한다.

 

굽들〔曲坪〕은 지형이 굽은 활처럼 생겨서 붙여진 이름인데 옛날에는 아전들이 많이 살았다고 한다. 그리고 연하(蓮河)는 일명 연화(蓮花)라고도 불리는데 동네 앞 못에 연꽃이 많이 피어 생긴 이름이다.

 

이 마을은 조선 세조 때 사간원 헌납 등 내직을 두루 거치고 황해도 풍천군수로 재직시에 지방정사를 살피고 돌아온 암행어사의 보고에 ‘청렴고결하고 빙옥처럼 맑다’고 하여 왕으로부터 청풍당이란 호를 하사받은 박영손(1442~1486)의 자손들이 세거해온 마을이다.

 

마을 입구에 들어서면 왼쪽 편에 우고서사가 나온다. 우고서사는 박영손을 추모하기 위해 향인들이 건립한 사원으로 사호청풍당박선생유허비(賜號淸風堂朴先生遺墟碑)가 우뚝 서있으며 유인문(由仁門)을 지나면 위패를 봉안한 전면 3칸, 측면 2칸의 웅장한 상청사(尙淸祠)가 나온다. 서원 경내 앞쪽 선생을 추모하여 지은 정자인 청풍당이 있다.

 

1422년(세종 4) 연기현감 순조(順祖)의 아들로 태어난 박영손은 39세에 별시문과 을과에 급제했다. 그 다음해 봄에 성균관 전적으로 승진했고 예조좌랑을 거쳐 사헌부 지평과 사간원 헌납을 역임했다. 성종 1년(1470) 4월 삼공육경(三公六卿)들에게 명하여 특별히 시강문학을 할 수 있는 선비들을 선출하라 했는데 10여 명 중에 선출되어 일을 훌륭하게 수행, 홍문관 교리로 옮겨갔다.

 

당시 점필재 김종직과 함께 교대로 왕이 거처하는 곳을 맡아 보았는데 두 사람 모두 뜻이 같고 의리가 서로 통해 왕에게 올리는 글이나 책을 편찬하는 일을 잘 처리했고 음흉한 소인배들의 질투로 결국 외적인 황해도 풍천군수로 내몰리게 되었으나 백성들을 잘 보살펴 태평성대를 누리게 되었다.

 

마침 암행어사가 내려와 풍천군수의 정사를 잘 살펴보고 왕께 보고하기를 “청렴하고 밝고 깨끗하고 맑아서 얼음과 옥에 흠이 없음과 같은 사람입니다.〔廉明淸潔 氷玉無瑕〕”라고 아뢰니 왕이 그것을 아름답게 생각하여 청풍당이란 호를 지어주었다. 이때 성한(成翰)이 시를 지어 축하했다.

 

“달존이 세상에 많다고 하나 헤아려보니 현후(어진 군수)가 홀로 우뚝하구나. 조정에서 군명을 올바르게 기록하니 간사한 무리가 굴복하고 외읍을 다스림에 임금의 근심 나누었네. 훌륭한 정사는 촉나라 문옹을 보는 것 같고 대임을 처리함은 온나라 전설 같아. 청풍이란 아름다운 호를 내리시니 천만년 임금의 은혜임은 그대 같으리.”

 

나아가 많고 쇄병하여 벼슬을 사절하고 우항에 물러나와 수석(水石)이 좋은 곳을 가려서 집을 짓고 책을 보는데 낙을 부쳐서 세월을 보내다가 그가 왕을 생각하고 나라를 근심하는 시종이 한결같아 때때로 벗과 함께 지은 시편에 나타나 있고 정성을 다해 가르치니 고을의 수재들이 글을 배우려고 많이 찾아왔다고 한다. 1486년(성종 17) 봄에 65세로 세상을 떠나니 나라에서 이 소식을 듣고 슬퍼하여 도승지로 증직했다.

 

우고서사 건너편의 석연정(石淵亭)은 숙종 때 성균관 학정에 재직 중 사직하고 고향으로 나려와 자연과 어울려 학문을 연구하고 후학을 양상하며 청아하고 고결한 인품으로 주위의 추앙을 받았던 석연 박성세(朴聖世, 1652~1705)를 추모하기 위해 후손들이 지은 정자로 연못과 잘 어우러져 있다.

 

마을 안쪽 들판에는 포은 정몽주 유허비각(경상북도 유형 문화제 제272호)이 있다. 화강암으로 되어있는 비 중앙에는 효자리(孝子里)라는 세 글자가 새겨져 잇고 우측에는 공신찬성사대제학정몽주익양군경오봉충의군(功臣贊成事大提學鄭夢周益陽君庚午封忠義君)이, 좌측에는 홍무기사삼월영천군수정유입비(洪武己巳三月永川郡守鄭宥立碑)라고 새겨져 있다.

 

홍무 원년이면 1389년 공양왕 원년에 해당되며 당시 포은선생이 명나라에 사신으로 파견되어 대명관계를 개선하고 돌아와 문하시중으로 있을 때로 비를 세운 유래는 포은선생이 19세이던 공민왕 5년(1355) 정원에 부친상을 당하여 여묘살이를 다하니 조정에서 그 뜻을 높이 기리기 위해 당시 군수인 정유로 하여금 선생의 태생지인 우항리에 효자리란 비를 세우게 된 것이다.

 

일설에 의하면 조선 성종 18년(1487) 경상도 관찰사 손순효가 이 동네에서 하룻밤을 지내게 되었는데 꿈에 포은선생이 나타나 현몽하기를 “이 마을 밭에 나의 비가 묻혀있으니 촌 늙은이에게 찾아가서 확실하게 물어보라!”고 해 다음날 마을 촌로에게 물어보니 사실과 같아 그 자리에 비를 세웠다고 전한다.

 

효자리비로 가는 길목에서 본 길 중앙의 소나무를 피해 만든 길이 인상 깊었던 이 마을에는 이외에도 모우정과 가정, 고산재와 고천재 등이 남아 선조들의 충절을 기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