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천 문화유산 자료/영천문화유산 답사기

37. 청백리 조치후 나라에서 옥비 하사 - 대창 대재

이원석(문엄) 2011. 11. 13. 08:22

 

‘관서부자’ 칭송 지산 조호익 종택 지산고택 신광리에 남아

 

사람의 도리를 다하려면 마음을 가라 앉혀 책을 잘 읽어 그 뜻을 이해해야 하고 문학은 반드시 오래오래 공부한 뒤에야 통한다. 시경을 말하는 선비에게 부탁하노니 의당 남보다 백배의 공을 더할 것이니라.

 

조선 성종 때 문신이며 학자로 청백리에 녹선된 조치우(1459~1529)가 공부하는 후세사람들에게 남긴 시이다.

 

채약산에서 서쪽으로 뻗은 일지맥이 연이어져 마을 동편으로 병풍처럼 가리고 있고 북쪽은 구릉야산이 전개되어 금호강의 강변까지 봉우리가 우뚝 솟아 있어 넓은 들과 편리한 교통을 자랑하는 대창면 대재리. 대창면사무소를 지나 북안 쪽으로 가다가 조곡교를 건너 좌회전하여 약남리로 가는 도로를 따라 조금만 더 가면 대재리가 나온다.

 

마을 반대편 길로 들어서 대재못을 조금 지나면 문화재자료 제101호로 지정된 유후재(遺厚齋)와 옥비(玉碑)가 나온다. 복숭아가 주 소득원으로 밴마아 또는 배마실로도 불리는 대재리에는 63세대 163명(남 76, 여 87)의 주민들이 한 가족처럼 오순도순 살아가는데 김해 허씨와 밀양 박씨가 주성이다.

 

이 지역은 창녕 조씨 청백리공파 문중소유 임야로서 문중결의에 의하여 금장구역으로 되어 있으니 하인을 막론하고 묘소를 내어 드릴 수 없음을 알려드립니다. 만약 투장이 발견되면 의법 철거 합니다” - 송청서당 당장

 

후손들에 의해 유후재와 옥비, 그리고 이 일대 송청산(松淸山)이 성역화로 보호되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조치우의 재사인 유후재는 좌측에 두 칸, 우측에 한 칸의 방과 사이에 두 칸의 대청을 두고 앞쪽으로 쪽마루를 둔 팔작지붕 건물이며 지난 1993년 목재의 부식이 심하고 곳곳에 물이 새 보수공사를 했다.

 

대구부사 재직 때 선정으로 하사받은 옥비는 원래 두 좌였는데 이곳 옥비각에 한 좌가, 또 한 좌는 부인 창원박씨의 묘소가 있는 경남 창원의 청룡산(靑龍山) 아래 모원재(慕遠齋) 내의 옥비각에 보관되어 있다.

 

옥비각은 정ㆍ측면 모두 1칸의 맞배지붕인 익공계 건물로 내사옥비각이란 현판이 걸려있으며 옥비의 귀부는 77(길이) 64(너비) 32(높이)㎝, 이수는 51(너비) 46(높이)㎝, 비신은 94(높이) 34(너비) 15(두께)㎝이다.

 

자가 순경(舜卿), 본관이 창녕인 조치우는 고려말엽 좌정승 하성부원군 조익청의 후손으로 고조는 조신충(강계도 좌익병마사), 증조는 조상명(덕원부사), 조부는 조경무(사직), 아버지는 조말손(영암군수)이다.

 

조치후는 1459년(세조 5) 영천에서 태어나 어릴 적부터 학문을 좋아하고 자라남에 따라 효행이 지극하여 향내에 소문나더니 1494년(성종 25) 사마시와 별시문과에 합격, 예문관 한림으로 벼슬길에 올랐다. 1498년(연산군 4)에는 정언, 그 다음해에는 성균관 전적이 되었다. 그러나 연산군의 학정으로 나라가 어지러워지자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1506년 중종반정으로 나라의 질서가 바로잡히자 사헌부 장령, 내섬시정, 예천군수 등을 거쳤다. 대구부사로 있을 때 청백리로 뽑혔고 뒤에 주민들이 송덕비를 세웠다.

 

또 효행이 지극하다는 소문을 들은 임금이 옥비 두 좌와 소학(小學)을 하사했다. 그 후 사옹원정이란 벼슬을 지냈으나 55세 때인 1513년(중종 8) 늙으신 어머니를 봉향하기 위해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다시 돌아와 극진히 어머니를 섬겼으나 1529년 세상을 뜨고 다음해 자신 또한 71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

 

조치우의 피를 이어받은 증손 5형제가 이름을 떨쳤는데 조광익은 효자로 정려가 세워졌고 조희익은 임란 때 의병을 일으켜 영천복성전투에서 맹활약했으며 조호익은 도덕과 문장이 훌륭하여 관서부자로 칭송을 받았다.

 

북안 쪽으로 가다가 영지사 방면으로 조금 들어가면 신광리가 나오는데 이 마을에는 선조 때 문신인 지산 조호익(1545~1609)의 종택인 지산고택(문화재자료 제99호)이 자리 잡고 있다.

 

대문간채와 중간채, 행랑채 등은 도괴되었고 지금은 사랑채와 안채 그리고 사당만 남아있다. 그나마 비닐하우스와 농기계가 마당에 덩그러니 자리 잡고 있는 등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아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조호익은 퇴계 이황의 문인으로 성리학을 연구, 문과에  급제했고 무고로 귀향 간 강동에서 후진을 잘 양성하여 관서부자라는 칭호가 특사되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유배지에서 풀려나 소모관(召募官)이 되어 군민을 규합하여 중화ㆍ상원 등지에서 전공을 세워 녹비를 하사받았다. 그 후 성주, 성천, 정주 등의 목사를 역임했으며 1597년 정유재란 때 다시 강동에서 의병을 일으켜 활약했고 뒤에 선산부사에 임명되었으나 병으로 사퇴했다.

 

사후에 이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저서로 지산집, 가례고증, 주역석해 등이 있다. 용호리에 그의 신도비와 하마비가 있으며 새로 복원된 도잠서원에 배향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