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 고천 10의사 충의 아직도 귓가에 '쟁쟁' - 임고 고천리
“원수 눈앞에 두고 죽더라도 물러설 수 없다”
“충성에 분발하여 적개심을 불태워 생명을 버리고 의로운 길에 나아갔도다. 십현의 사적이 같이 전해옴에 함께 제사지내나니”
대산 이상정이 지은 고천서원 상향축문으로 충성과 의리를 생명보다 더 귀하게 여겨 귀중한 목숨을 초개와 같이 던진 10의사의 장렬한 순국사적과 충렬정신을 추모한 글이다.
임고면소재지에서 수성방면으로 우회전한 후 임고중학교에서 다시 우회전해서 죽 들어가니 지은 지 얼마 되지 않은 고천리 경로당이 나왔다. 10여 년 전에 한번 찾은 적이 있었는데 기억이 가물거려 어르신들께 서원 가는 길과 부래산에 대해서 안내를 받았다.
고천리 경로당에서 바라본 부래산(浮來山)은 이름에서도 느낄 수 있듯이 산이라기보다는 언덕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전설에 의하면 어느 해 7월, 붕어같이 생긴 작은 산이 운주산 기슭에 자리 잡고 있었는데 별안간 천지가 진동하는 번개가 치고 소나기가 내려 이 산이 홍수에 떠내려 왔다고 한다.
지난 7월부터 11월까지 영천시에서 옛 임고면 우항리 부래산에 있는 옛 임고서원 부지에 팔각정과 표지석, 잔디밭, 쉼터 등을 설치할 계획이다.
동쪽 기슭에는 포은 정몽주 선생을 배향한 임고서원 터가 남아 있는데 명종 8년(1533)에 노수, 김응생, 정윤량 등이 합세하여 서원을 짓고 사액을 받았으나 임진왜란 때 소실되어 선조 35년(1602) 양항리로 옮겨지었다. 고천리는 동쪽과 남쪽은 고경면과 경계를 이루고 서쪽으로는 양항동과 접하고 있다.
지금으로부터 약 6백여년 전인 고려 말에 형성되었다고 전하는데 북쪽으로는 운주산 골짜기의 맑은 물이 흘러 고천이라는 지명이 생겼다고 한다. 현재 74세대 180여 주민들이 대부분 농사일을 하며 마을을 지키고 있다.
고천서원(향토문화재 9-15-1)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왜군에 대한 적개심을 참을 수 없어 생사고락을 함께 할 것을 맹세하고 의진에 나아가 경주성 싸움에서 장렬히 생을 마감한 10의사를 배향한 곳으로 소곡 김대해, 노항 김연, 만정 최인제, 충효재 정석남, 쌍계 이영근, 사촌 이지암, 남전 이일장, 추계 이득룡, 대재 이득린, 남계 손응현으로 세칭 고천 10현으로 알려져 있다.
1592년(선조 23) 조선을 침략한 왜군들이 부산을 함락하고 북진하여 나라의 장래가 위급하게 되었을 때 곳곳에서 국가를 수호하기 위한 의사들이 일어나 뭉쳐서 창대 정대임의 진에 나아가니 이때 뜻을 같이한 선비가 60여명이었고 이에 호응하여 모여든 장정이 900여명이었다.
대오를 갖추고 의병의 깃발을 높이 세워 일사보국을 맹세하며 5월초에 대동(大洞)에서 적을 파하고 7월초에 당지산(영천~금호간의 산)에 잠복했다가 신녕, 북습, 와촌으로부터 영천으로 돌아오는 왜병 20명을 사살하고 40명을 참수했다.
또 7월 14일 박연에서 신녕, 의흥 의진과 합세하여 왜적을 대파하고 27일 신녕, 하양, 의흥, 경산, 자인, 경주 의진 및 관군과 합세하여 영천성 중에 둔거한 적 대병을 무찔러 섬멸하니 임진왜란 중 성 수복은 가장 먼저요 육전에서는 가장 큰 승리였다.
적의 세력이 남북으로 분산되어 반격전의 기틀을 닦게 되자 경주성을 회복하기로 의논하고 8월 21일 서문을 돌파하고 시가지까지 진격했으나 서천 숲속에 숨어있던 적군에게 기습을 당해 관군의 대오가 흐트러지면서 전세가 역전되어 전멸을 당할 위기에 몰렸다.
이에 격분한 의사들은 “원수를 눈앞에 두고 싸우다 죽을지언정 물러설 수는 없다”며 휘하의 병사들을 득책하여 일심동체 결사보국을 맹세하고 온종일 치열한 전투를 치르니 피아의 사상자로 서천내를 막았고 피는 바다를 이루었다. 아군의 응원병이 끊기고 고립된 의사진은 적의 집중공격을 끝내 이기지 못하고 중과부적으로 전원이 장렬히 전사했다.
이날의 전사자가 2천명이 넘었다고 전하는데 금산 700의사들의 전투보다도 한결 더 치열한 항전이었다. 이들의 결사항전으로 동북쪽으로 후퇴했던 아군이 군사를 재정돈하여 다음날 경주판관 박의장과 합세, 결국 경주성을 탈환할 수 있게 되었다.
이들의 숭고한 정신과 장렬한 죽음은 왜인들까지도 기리게 되었고 후에 의사들의 충절에 대해 초유사 학봉 김성일과 관찰사 인재 최현의 장계로 증직의 포전과 글을 남겨 후세에 전하고 있다.
1705년(숙종 31) 건립된 고천서원은 대원군의 서원훼철령으로 철폐되었다가 1908년 향내 유림들이 복원했다. 경내에는 강당 4칸을 비롯하여 묘당, 신문, 삼문 등 4동의 건물이 있고 입구에 10의사기적비가 그들을 기리고 있다.
사당인 순국사(殉國祠) 우측에는 대나무 숲이 우거져 고천 10의사들의 대쪽 같은 절개가 느껴지게 했고 관리소홀로 방치된 많은 서원들처럼 이곳에서도 관리사 마당에 덩그러니 버려진 냉장고에 눈살이 찌푸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