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천 문화유산 자료/영천문화유산 답사기

32. 시냇물 졸졸졸… 선경 같은 환벽정 '우뚝'

이원석(문엄) 2011. 11. 13. 08:19

 

인근에 신녕향교, 성환산공원, 신녕현감 선정비군 남아

 

신녕면 화성리는 본래 신녕현의 소재지였고 지금도 신녕면의 소재지이다. 예전에는 관아를 비롯한 많은 건물들이 있었으나 대부분 헐려 흔적조차 찾아보기 힘들지만 환벽정과 향교, 선정비군 등을 통해 찬란했던 당시의 규모와 문화를 어렴풋하게나마 짐작케 하고 있다.

 

“벼슬아치여! 끝내 탐욕을 내지 못할지니 절개 굳은 대나무가 그대 집에 족하네. 줄기마다 곱게 서서 다투지 않고 죽순 또한 탁룡이라, 하늘에 오를 듯 여원 돌, 찬 냇물은 푸른 빛 에워싸고, 성근 기둥 빈 난간은 청풍이 씻어주네. 어여쁘다 인(人)과 경(境)이 다 새로운 곳, 옛 사람 이어받아 지은 글귀 서툴기도 하네.”

 

금계 황준량이 황폐된 비벽정(斐碧亭)을 헐고 그 자리에 죽각(竹閣)을 세운 후 퇴계 이황이 사랑하는 제자에게 직접 찾아와 황준량으로 하여금 부정에 대한 경계를 하며 지어준 시이다. 갑자기 추워지면서 제법 차가운 바람이 부는 날 찾은 성환산 밑 신녕초등학교 뒤쪽 운동장 옆에 자리 잡은 6각의 정자 환벽정은 앞으로 가천천 맑은 물이 흐르는 겹처마 익공집 육모지붕이다.

 

1516년(중종 11) 현감 이고가 북악 죽전 아래에 비벽정을 지어 자기 호로 삼았고 그의 아들 이세남은 회재 이언적과 이 정자에서 노닐면서 시를 주고 받았다고 한다. 환벽정은 임진왜란으로 비벽정이 소실되자 1611년(광해군 3) 현감 송이창이 그 자리에 정자를 중건한 것이다.

 

송이창의 아들 동춘 송준길이 기문에 말하기를 “만력 신해(1611)에 아버님께서 화산현(지금의 신녕) 현감이 되셨는데, 내 나이 겨우 6, 7세로 따라왔던 것이다. 그 때 내가 사리에 밝지 못할 때지만 지금도 객관 서쪽 조그만 정자가 생각난다.

 

대나무 숲을 헤치고 바위 곁에 집을 세워 시냇물이 졸졸 뜰을 따라 흐르니 그윽하고 한적한데다가 깨끗하여 마치 인간세계가 아닌 것 같았다. 이것이 이른바 환벽정인 것이다”하고 당시의 정자경치를 소개하고 있다.

 

비벽정 때는 회재 이언적이, 죽각 때는 퇴계 이황이, 환벽정 때는 동춘 송준길이 각각 시를 읊으며 경치를 감상한 소중한 이 정자는 1890년(고종 27) 민영후 현감과 1980년 오헌덕 군수가 중건해 지금까지 보존되어 오고 있으나 또다시 긴급보수를 해야 될 정도로 보존상태가 좋지 못한 실정이다.

 

정자 뒤편의 성환산은 둥근 고리모양을 한 성터로서 외침 시 고을을 사수한 전적지이다. 신녕지구 전승비는 한국전쟁 때 국군 제2군단과 인민군 제2군단의 피아간 병력 2만5천여 명이 벌인 치열한 전투에서 제6사단을 주축으로 한 아군의 용전혈투 끝에 인민군을 북으로 퇴각시켜 총반격의 계기를 만든 최대격전지 중의 하나였던 이곳 신녕 전투에서 불멸의 전공을 세우고 장렬히 전사한 영령들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해 1958년 10월 30일 육군 제1205공병단에 의해 높이 7m, 폭과 두께 62㎝ 크기로 세워진 비이다. 한 인근 주민은 전승비 꼭대기의 독수리는 밤 12시가 되면 먹이를 찾아 날아가서 요기를 한 후 다시 자리에 앉는다며 볼 때마다 옆으로 조금씩 움직이고 있다고 전해진다고 말했다.

 

성환산은 경북고시 제94호(75. 5. 17)에 의거, 도시계획시설(공원)로 결정 고시되었고 1986년에는 성환산 내에 마을 숲을 가꾸어 녹지공간으로 조성하였으며 1998년에는 주민들의 체력증진을 위해 14종의 체육시설을 설치했고 1999년에는 건강한 고장 만들기 사업의 일환으로 사업비 2억 원을 들여 새로이 단장하여 공원으로서의 면모를 갖추었다.

 

이곳에는 권규섭, 김수곡, 김준운, 한상택, 권태용 애국지사 추모비가 건립되어 공원을 찾는 이들에게 호국애를 심어주고 있다.전승비에서 내려다보이는 신녕향교에는 관리사 공사가 한창 진행 중이다. 신녕향교의 초창연대는 알 수 없으나 1551년(명종 6) 황준량 현감이 재임 시 중수했다고 하며 화산 밑 명천(鳴泉)위에 있었다고 한다.

 

그 후 임진왜란 때 소실되어 1615년(광해군 7) 현 향교 뒤편에 중건했다가 1686년(숙종 12) 현재위치로 이건했다고 전한다. 대성전(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102호)은 정면 3칸, 측면 3칸 겹처마 팔작지붕 기와집으로 동서무가 없으며 동방명현 27위를 배향하고 있고 강학공간인 명륜당(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68호)은 비교적 규모가 크고 견실하며 지붕의 형태는 이 지방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팔작지붕으로 되어 있다.

 

신녕향교에는 영천향교와 달리 동서무가 없어 우리나라의 18위 유현들도 모두 대성전에 모셨고 동종향(東從享)에 주돈이 정이양 선생과 서종향(西從享)에 정호 주희양 선생을 모셨으며 사마소가 없다.

 

신녕면사무소 입구 양쪽에는 신녕현에 부임하여 선정을 베푼 역대 현감과 관찰들의 선정비 32기가 가지런히 세워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