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유래루 올라 선비정신 되새겨 - 교촌동
18성현 신위 모신 향교 유교덕목 보급
충혼탑, 영천지구전적비 나라사랑 호소
초여름인데도 올해는 벌써부터 유난히 무더운 날씨가 이어진다. 향교로 들어가 유래루에 올라서니 영천시내가 내려다 보여 고층건물들이 들어서기 전인 먼 옛날에는 제법 운치가 있었을 성싶다.
마현산 서ㆍ남쪽으로 형성된 교촌동은 마을뒤편에 향교가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남쪽으로는 과전ㆍ성내동, 동쪽은 창구ㆍ문내동, 그리고 서쪽으로는 화룡동과 경계를 이루고 있다.
이 마을에는 여러 가지의 속칭이 있는데 마을에 동제나무가 있어 동네의 안위를 기원하였다 하여 불려진 지당골, 지역의 동구보다 안으로 들어갈수록 넓다고 하여 붙여진 깍골, 영천에서 서쪽으로 만리까지 갈 수 있다 하여 서만리골이 있다. 그 외에도 신사터, 새골, 잿고개 등이 어울려 이룩된 마을이다.
향교는 초등교육기관에 해당하는 서당을 마친 유생들이 중등교육을 수학하는 지방 최고의 국립교육기관이었다. 향교는 ‘일읍일교(一邑一校)’의 원칙대로 고을 수령이 파견된 주읍(主邑)에는 반드시 설치되었다.
국역의 대상이 되는 신분이라도 독서를 원하면 누구나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허락했다. 양반 중심의 사회체제 속에서도 일단 향교의 교생이 되면 사회신분을 문제 삼지 않았다. 향교의 교육과정은 과거제도와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유교교육의 효과를 높이고 학문의 심화를 위해 교육제도와 과거제도를 유기적으로 연계시킴으로써 유능한 관리를 양성코자 했다. 그러나 1894년 갑오개혁 이후 과거제도가 폐지되자, 지방의 교육ㆍ문화를 선도하면서 유교사상의 중심적 역할을 수행해왔던 향교는 차츰 문묘를 향사하는 일에 치중하게 되었다.
오늘날 향교에서는 서울의 성균관과 연계하여 유도회를 조직하고 문묘의 향사와 함께 사회교육 사업을 전개하며 시대의 흐름에 적합한 유교의 덕목을 널리 보급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보물 제616호로 지정된 영천향교 대성전은 유래루, 명륜당을 거쳐 맨 뒤쪽에 자리잡고 있다.
이 건물은 조선 세종 17년(1435)에 창건, 중종 8년(1513)경 군수 김흠조가 중수했으나 임진왜란 때 소실되어 광해군 14년(1622) 황효의 군수가 중건한 영천향교의 묘우이다. 경사지에 위치한 향교의 가장 안쪽에 자리잡은 동남향의 집으로 앞쪽으로 명륜당과 문루인 유래루가 동일축선상에 배치되어 있다.
장대석 기단 위에 원주를 세워 정면 5칸, 측면 3칸을 구성한 단층 맞배집으로 장대석 바른층쌓기의 기단위에 막돌초석을 놓고 두리기둥을 세워 주두(柱頭)와 익공(翼工)을 놓은 물익공식(勿翼工式)의 건축물이다.
사묘 건축은 전퇴 한 칸을 개방하는 것이 일반적이나 여기서는 전퇴를 두지 않고 정면의 평주칸에 바로 문과 창을 내었다. 정면 어칸과 양 협칸에는 쌍여닫이 판문을 달고, 양 측칸에는 중방 위에 광창을 내어 통풍과 채광을 도모했다. 5량가로 외일출목의 초익공집이다. 기둥은 모두 원주인데 높게 구성하여 건물이 훤칠해 보인다.
내부의 가구는 전퇴가 없는 관계로 평주 위에서 시작되었다. 자연스럽게 휘어진 굵은 소나무를 대들보로 걸고 삼문변작의 법식에 따라 종량을 걸어 마루대공을 받았다.
중대공은 동자주를 세워 접시받침을 놓고 양봉과 첨차로 구성한 포대공이고 마루대공은 파련대공이다. 전퇴를 두지 않고 정면 평주칸에 바로 창호를 설치하고 기둥을 높게 하여 상부의 가구를 간결하게 처리하여 내부를 경쾌하게 구성한 것이 특이하다. 정북면에 공자를 주벽으로 그 동쪽에 안자, 자사, 서쪽에 증자, 맹자 사성을 모셨고 동서ㆍ종향에는 정자와 주자의 위패를 모셨다.
앞쪽에 자리잡은 동ㆍ서무에는 우리나라의 유현 18위를 모시고 있다. 동무에는 설총, 안향, 김굉필, 조광조, 이황, 이이, 김장생, 김집, 송준길 등 9선생의 위패를, 서무에는 최치원, 정몽주, 정여창, 이언적, 김인후, 성혼, 조헌, 송시열, 박새채 등 9선생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공자를 비롯한 성현의 신위를 모신 향교는 윤리도덕을 밝히고 학문을 연마하는 거룩한 장소로 그 분들의 덕행과 도학을 경모하고 본받기 위해 지금도 음력 2, 8월 상정에 석전대제를 거행하고 있다. 이때는 고을의 선비들이 모여 소정의 절차에 따라 행사를 연다. 초헌관ㆍ아헌관ㆍ종헌관은 특별한 제복을 입고, 다른 사람들은 유건과 도포를 입고 행사한다.
대성전 앞쪽에 있는 명륜당은 고을의 선비들이 향음주례와 향사례를 치르며 젊은 영재들을 가르치던 유도진흥의 전당이었으나 서원이 발달함에 따라 향교의 기능이 쇠퇴해 지면서 석전대제를 준비하고 윤리도덕의 강론과 향내 효열ㆍ선행자를 표창하는 등의 구실을 하게 되었다. 명륜당 앞에 있는 동서재는 유생들이 거처하면서 공부하던 곳으로 요즘도 동재에서 매주 2회씩 한문교실이 열리고 있다.
유래루는 향교의 대문으로 유생들이 경치를 감상하며 시부를 짓고 읊조리던 곳이고 삼일재는 대소과에 등과한 선비들이 후진을 장학하던 곳이다. 앞마당에는 보호수로 지정(94.10. 21)된 4백년 된 회화나무가 홀로 외로이 향교를 지키고 있는 듯했다.
주나라 때는 회화나무를 대궐 안에 심어 삼정승이 그 밑에서 송사를 판결했고 당나라 때는 회화나무에 꽃이 피는 음력 7월에 과거를 보았으며 특히 당나라 낙양 동쪽에 회화나무 숲이 있었는데, 이 숲 속에서 선비들이 손수 쓴 책을 사고팔며 강론을 했기에 이곳을 괴시(槐市, 회화나무 밑의 시장)라 하고 후대에 와서는 대학을 괴시라 부르게 되어 향교와 회화나무가 밀접한 관계를 맺게 되었다고 한다.
“조국의 운명을 건 갈림길에 적구의 무리들이 영천뻘을 넘나드니 인과 철이 융융하는 전쟁터로 너, 나 뛰쳐나가 둑을 막아 내 고장을 지켰다. 저∼기룡산은, 이∼금호강은 너의 용자를 길이 간직하리”
마현산 정상에서 영천 시내를 내려보며 쓰러진 전우를 끌어안고 절규하는 국군용사의 모습을 새긴 영천지구전적비는 지난 80년에 건립되었다. 또 전적비에서 앞쪽으로 내려오면 6ㆍ25 때 이 지역에서 전사한 국군장병 1,250명의 넋을 기리기 위해 지난 63년에 건립된 충혼탑이 호국보훈의 달을 맞아 남은 이와 자라나는 젊은이들에게 무엇인가를 항변하고 있는 듯이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