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산남의진 피로 얼룩진 ‘충’과 ‘효’ 서린 곳 - 충효리
정환직ㆍ용기 부자 고종밀지 받고 의병 일으켜
충효재, 화천지수비… 사룡산 금정암 제석탱
“나라의 형세가 이렇게 되고 민족존망이 이에 있거늘 내가 앉아서 나라의 망함을 보고만 있겠는가? 죽음으로써 나라의 은혜를 보답하기로 하고 오늘 황제로부터 중대한 임무를 받았으니 너는 곧 고향으로 돌아가 집안을 보살피도록 하라.”
“임금께서 신하에게 내리신 명령과 어버이가 자식에게 분부하는 것이 같사오니 나라를 구한 후에 사가를 보존하는 것이 도리에 마땅할 줄 압니다. 그러므로 이 일은 젊은 자식이 할 일이오니 바라옵건대 소자에게 대임을 맡겨 주시오면 소자 힘을 다하여 나라에 충성하고 부모님께 효도하여 집을 보존하겠습니다.”
1905년 일본이 강제로 조약을 체결하자 고종황제는 정환직을 불러 짐망(朕望)이라는 밀지를 내려 화천의 물을 부탁한다고 했다.
‘화천의 물’이란 옛날 중국의 궁성에서 적국의 침범을 받자 유능한 신하가 왕과 옷을 바꾸어 입고 목이 마르니 화천의 물을 떠오라며 왕을 피신시킨 후 대신 처형당했던 고사를 빗대어 친일파 관리들의 눈을 피하기 위한 고종황제의 재치였다. 집으로 돌아온 정환직이 아들에게 고종의 밀지를 보이며 집안을 돌볼 것을 명하고 대의를 행하고자 하였으나 아들이 3일 동안 간청하여 결국 정용기가 먼저 산남의진을 이끌게 되었다.
조선 철종 5년(1844)에 태어난 정환직은 의술을 배우다가 고종 24년(1887)에 북부도사가 되고 1894년에 동학란이 일어나자 사남참오령이 되어 황해도의 동학군 토벌에 참가했으며 1899년 종묘화재 때 신주를 안전한 곳으로 옮겨 왕으로부터 패물을 하사받았다. 이듬해 삼남도관찰사로 부임하여 탐관오리를 숙청하고 1905년 을미조약이 체결되자 흥해, 청하 등지에서 아들 용기와 함께 의병을 일으켰다.
대장을 맡았던 정용기가 청하, 청송에서 적과 대항하여 입암으로 진격하다 전사하자 정환직은 패병들을 재정비하여 흥해, 신해 등지에서 많은 적을 격파하였으나 1907년 청하에서 적에게 붙들렸다. 적은 여러 가지로 회유책을 썼으나 오히려 크게 꾸짖고 ‘몸은 죽어도 마음은 변치 않으리, 의가 중하니 죽음이 오히려 가볍도다. 뒷일을 누구에게 맡길꼬, 깊은 밤 오경을 말없이 앉아 세우도다’라는 유서를 남기고 1907년 조양각 앞 천변에서 총살당했다.
자양면 충효리는 영덕군 지품면에서 발한 자호천과 화북면 정각리와 자양면 보현리와의 경계지에서 발한 계곡물이 마을에서 합류되어 영천댐으로 들어가는 곳이다. 해발 960m인 기룡산에서 발한 일지맥이 정동으로 뻗어 작은 분지를 형성하여 사방이 병풍처럼 둘러싼 기암절벽이 아름다운 광경을 이루며 영천댐의 형성으로 더욱 산수가 아름답게 조화되어 예나 지금이나 인재배출이 많은 곳이기도 하다.
일견군평 검단, 내검, 하거 일부가 합하여 1914년 읍ㆍ면 통폐합 시 충효리가 되었다. 군드래들은 삼한시대에 가야 군인들이 들을 개척했다고 하고 한편으로는 약350년 전 안대결이라는 선비가 이 마을을 개척했다고도 한다.
검단은 약330년 전에 이신범이란 선비가 개척했다고 전하는데 정환직·정용기 부자의 출생지로 이들의 충효를 기리기 위해 세운 충효재와 유허비, 그리고 묘가 있어 충효가 서린 곳이기도 하다.
솔목 내검단은 문하복이라는 선비가 약350년 전에 개척했고 뒷산에서 군인들이 기마훈련을 한 적도 있으며 말을 방목하던 곳이라 솔목이라고 한다. 일견은 약350년 전 이일명이라는 선비가, 화방촌은 강두만이라는 선비가 개척했으며 꽃피는 마을이라는 뜻이다.
충효재(경상북도 기념물 제81호)는 구한말 산남의진 대장으로 활약하다가 순국한 정환직(1844∼1907)ㆍ정용기(1862∼1905) 부자의 충효정신을 추모하기 위해 생존 의사들이 검단동을 충효동으로 고쳐 1923년에 건립했다.
정면 3칸, 측면 2칸, 홑처마 팔작지붕으로 꾸몄고 주위는 난간을 돌려 지었다. 정원에는 유허비와 화천지수(華川之水)비가 있으며 대문 앞에는 충효동 사적비가 서있다.
충효재 뒤쪽에 위치한 충효사가 있는 자리는 보현사란 절을 옮겨지었다고도 하고 도인이 어린아이와 함께 살았다는 얘기도 전하나 불명확하다. 다만 보현사가 이건된 후 산 이름을 빌어 기룡사라 했다고 전하며 스님이 기거하지 않아 보살이 살았다고 전해진다.
해공 주지스님이 1990년에 들어와 동네의 이름과 성현의 가르침이 일치한데서 충효사라 부르게 되었으며 지금은 수많은 신도들이 복을 빌고 있는 지장도량으로 유명한 절이 되었다.
이 절에 있는 사룡산금정암제석탱(유형문화재 제299호)은 조선 영조 40년(1764)의 작품으로 소형의 그림이면서 화격이 뛰어난 불화로 화기에 따른 정확한 유래를 기록하는 등 금정암의 소암에서 신장탱의 기능을 수행한 매우 희귀한 그림이다.
18세기의 제석탱이 없는 것은 아니나 이같이 소형의 신장탱이면서 그 형식을 모두 갖춘 유례가 거의 없어 조선시대 불화연구의 귀중한 자료가 된다. 원래 불교 신장탱인 제석탱은 일반적으로 크기가 2m내외의 것이 보통이지만 이 제석탱은 전체 70×65㎝, 화폭 55×54㎝의 소형인 점이 특이하다.
소형의 방자형식이면서도 화기에는 소임의 명칭을 약칭으로 기록하였는데 증명·화원·공양·별좌·감원 등과 같은 것이 그것이다. 즉 이용대 부처와 지철비구의 시주로서 수성화원에 의해 제작된 불화임을 알게 한다.
제석의 전방 좌우에는 일월관을 쓴 일궁천자와 월궁천자가 시립하였고 그 옆에는 높은 관을 쓴 천인이 좌우에서 바깥을 보며 서있고 천인상 뒤쪽에는 악기를 연주하는 천동과 천녀 4인이 등장하여 피리, 해금, 비파 등을 연주하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등장인물 주변에는 오색구름으로 가득 채웠는데 서운의 색상은 차분하고 조화로워 그림의 분위기를 더욱 고조시키고 있다. 충효리는 이름에서 풍겨지듯이 마을 곳곳마다 풍전등화에 놓였던 조국강산을 지키기 위한 선조들의 피로 얼룩져 있는 듯했다. 1천여 명이 젊은이들이 초개와 같이 산화한 산남의진의 의병들이 활약하던 당시의 모습이 어른거렸다.
조양공원 문화원 앞에 세워진 산남의진비는 그들의 공을 기리기 위해 경상북도의 후원을 받아 지난 1963년 3월에 세워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