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주위 경관 절경, 위인들 유적 많아 - 화남마을
권응수 장군 유물전시관… 영정, 장검, 교지, 병풍, 가전보첩
한광사… 9세기 조성 추측 삼층석탑ㆍ석불좌상 보물로 지정
신녕면 화남마을은 팔공산에서 뻗은 일지맥이 북으로 뻗어 구릉야산을 이루다가 다시 높아져서 화산서 서쪽으로 뻗은 지맥과 합하여 앞뒤 산들이 되고 신녕천의 북부 발원지가 됨과 동시에 하나의 작은 분지형태를 이루고 있는 깊은 골이다. 주위의 경관이 절경을 이루고 있으며 예부터 위인들의 유적들이 많이 남아있다.
갑티(갑현리)는 340여년전 안동권씨들이 구천인 치산서 이거해 왔고 두들(두야리)은 100여년 전에 갑현사람들이 이거해와 농사를 지었다고 한다. 딸꼴(지곡)은 온천리 부근에서 서쪽으로 4㎞ 떨어진 마을로 임진왜란 때 의성김씨, 무안박씨 등이 피난와서 살던 마을이고 면천은 400여년전 경주손씨가 개척했다고 하며 냇물이 마을 앞을 지나가다가 굽이쳐 흐른다.
이외에도 300여년전 청주한씨가 개척했고 고려장이 4곳이나 있는 무덤실, 고찰이 있었던 불당골, 의성김씨가 개척하여 안동권씨가 300여년간 세거해온 온내골, 무암아래에 있는 아랫동 등의 자연부락으로 구성되어 있다.
갑현은 안동권씨 중시조인 권응수 장군의 자손들이 세거해 오면서 충, 의, 열, 용 등 무인으로서의 정신을 계승하며 살아가는 마을이다. 입구에 몇 년 전 도난사건으로 떠들썩했던 장군의 유물관이 있다.
보물 제668호로 지정된 이 유물전시관은 임진왜란 때 큰 공을 세운 충의공 권응수 장군의 빛나는 업적을 기리기 위해 지난 1979년 정부의 호국위인 유적정화사업으로 건립된 것이다.
1900여 평의 대지에 전시관 20평, 사당이 15평이고 지정목록으로는 선조대왕이 하사한 권응수 장군의 영정 1폭, 태평회맹도병풍 1첩(4폭), 교지 및 장군간찰 1권(32매), 각대 1개, 선무공신록권 1축, 임진왜란 당시 영천성을 복성할 때 왜장 법화에게서 노획한 장검 1개, 교지 및 유서 1권(33매), 가전보첩(상, 하) 2책 등이다.
본관이 안동인 권응수 장군은 1549년(명종1) 화산면 가상리에서 권덕신의 아들로 태어나 10세 때 화북면 금호동 중리로 이사해 그곳에서 자랐다. 39세 때 별시무과에 급제하여 43세에 정략장군, 46세에 어모장군이 되었다.
경상좌수사 박홍의 막하에 있다가 1592년(선조 25) 47세 때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고향으로 돌아와 의병을 일으켰다.
수많은 전투에서 왜군을 무찔렀고 특히 경상좌도를 확보하는 동시에 영남을 보전한 영천복성전투에서 큰 공을 세웠다. 이후 경주성 탈환전에 선봉으로 참전하였으며, 문경의 당교와 산양 탑전, 안동의 모은후, 구담, 밀양, 황룡사, 충청도 창암 등에서 왜군의 주력부대와 싸워 대파하였을 뿐만 아니라 정유재란 때는 원병으로 온 명나라 장수를 도와 1,2차 울산전투에 참전하여 큰 공을 세웠다.
전쟁이 끝난 후 선조 37년(1604) 선무공신으로 화산군에 봉해졌으며 오위도총부도총관에 이르렀다. 유물전시관에서 마을 안쪽으로 300~400m정도 들어가면 뒷골에 자리잡은 법왕종 종찰인 한광사가 나타난다.
한광사의 창건연대는 알 길이 없으나 삼층석탑과 석불좌상을 미루어 볼 때 통일신라시대로 추측되며 사찰건물은 1백여년 전에 개축한 것으로 추측된다.
한광사 내에 있던 조선 헌종시대의 학자인 권치선이 만년에 학문을 연구하며 후진을 양성하던 면천정사는 허물어졌고 향나무 2그루와 소나무가 그 빈터를 차지하고 있다. 보물 제675호로 지정된 화남동삼층석탑은 통일신라시대인 9세기에 조성된 것으로 허물어져 없어진 옛 한광사 불전 앞에 동서로 서있던 쌍탑 중 하나이다.
탑의 상층기단은 4장의 판석으로 사방의 면석으로 세우고 갑석을 덮은 곳에는 우주 즉 모서리의 기둥이 세워져 있다. 하층의 폭은 1m90cm, 상층은 1m18cm에 높이가 72cm이다. 탑신은 옥신과 옥개석을 각각 같은 돌에 다듬은 전형적인 우리나라의 석탑형식을 따르고 있는데 옥신에는 아무런 장식도 없고 소박한 그대로이다.
옥개석은 모두 4단 받침을 갖고 있으며 낙수면의 경사가 적당하다. 탑신부 표면에는 이끼가 많이 끼어 있고 약간의 마멸은 있으나 떨어져 나간 부분은 없으며 탑의 맨 윗부분은 반만 있고 그 위에 자연석을 하나 올려놓았다.
이 탑은 아담하고 정연한 전형적인 한국석탑의 양식을 갖추고 있다. 삼층석탑과 함께 놓여 있는 보물 제676호인 석불좌상은 원래 어디에 있었는지 알 수 없으나 이 불상과 관련된 광배 파편과 대좌가 남아 있어 광배, 대좌를 갖춘 불상임을 알 수 있다. 완전히 맞추어 보면 신라 말 고려 초의 전형적인 비로자나석불상이다.
육계가 분명치 않은 나발 머리칼, 작고 둥근 현실적 얼굴, 좁은 어깨, 빈약한 체구 등 단정하게 참선하고 있는 선사의 모습을 본떠 조성한듯한 분위기를 표현하고 있다.
이러한 특징과 함께 두 손을 가슴에 모아 아래위로 포개어 놓은 지권인의 비로자나수인, 얇게 빗은 듯 규칙적인 평행밀집 옷주름 등은 바로 9세기 내지 10세기의 전형적인 비로자나석불 양식을 따르고 있다.
대좌 역시 중엽복판연화문이 새겨진 상대, 8각의 중대, 귀꽃과 복련이 새겨진 하대 등도 당시의 대좌 형식을 반영하고 있다. 그러나 이 불상은 한층 규격화 되고 섬약해진 것을 보아 9세기 중엽~10세기경에 조성되었다고 추정된다.
화남마을에는 이외에도 권응수 장군 유물전시관 뒤쪽에 있는 경충사와 면와, 송화정, 청류당, 화남재, 화포정, 현감청선비 등과 희미해진 성터의 흔적이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