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천 문화유산 자료/영천문화유산 답사기

20. '충절사표' 이보흠과 연관된 지명많은 대전마을

이원석(문엄) 2011. 11. 13. 08:11

올해는 여름이 유난히 빨리 시작되려나 보다. 위용을 자랑하던 벚꽃이 물러나고 복사꽃과 살구꽃이 들판에서 자태를 자랑하며 아름다움을 과시하고 있었다.

 

대전동은 야산을 등지고 형성된 마을로 동쪽으로 구룡산이라고 불리는 야산아래 길다랗게 펼쳐진 부락이다. 서쪽으로는 고현천이 흘러 강 주변에 비교적 비옥한 평야를 만들고 있고 남쪽으로는 신녕천이 흘러 쌍계동과 경계를 이루며 북쪽으로는 녹전동과 접하고 있다.

 

교통의 발달로 인해 전통적인 모습이 많이 퇴색되었고 동양농기계, 청석스틸, 엔젤산업, 신라부화장, 버섯마을, 경신사 등 크고 작은 공장들이 많이 들어섰고 마을 뒤쪽으로 우회도로 공사가 한창이라 도로가 완성되면 개방화가 가속화될 것으로 보였다.

 

대전마을은 원래 영천이씨가 주류를 이루던 마을로 대부분 이보흠과 연관된 지명이 많다. 조선 세조 때 순흥부사로 재직하던 이보흠이 단종복위 운동을 펴다가 참형되는데 이를 기리기 위해 그의 호인 대전을 따서 마을의 명칭으로 사용하였다고 한다. 그의 충절을 기리는 수양곡, 서산곡, 순흥연 등의 자연부락 명칭이 아직까지도 남아있다.

 

수양곡은 수양대군을, 서산곡은 주나라의 백이와 숙제가 침략자의 곡식을 먹지 않겠다는 충절을 이보흠과 비교해서 생겼으며 순흥연은 영주군의 순흥을 지칭한 것이다. 서문오거리에서 화산방면으로 가다가 우회전해서 대전마을로 들어선 후 조금 더 나아가면 일명 하대전동에 이대전 유허비(문화재자료 제24호)가 자리잡고 있다.    

 

“백이와 숙제는 수양산에서 고사리를 뜯고, 엄자릉은 부춘에 낚시를 드리웠더라.” 이보흠이 야은 길재의 묘소에 제사할 때 그 충절을 흠모하여 지은 제문의 일부를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이보흠은 정의와 충절이 뭇사람들의 사표가 되었다. 이 비는 이보흠의 생장지에 그의 충절을 기리기 위하여 인조 7년(1629)에 세운 유허비이다. 대전선생으로 잘 알려진 이보흠(1397~1457)은 조선 세종, 문종, 단종 때의 문신으로 영천이 본관이다.

 

세종 11년(1429)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집현전박사를 거쳐 사정이 되고 세종 25년 사헌부감사로 봉직할 때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오는 등 국제외교 일선에서도 크게 활약했다. 지대구군사가 되어 대구에 사창법을 시행했고 문종 때 장령을 지냈다. 세조 3년(1457) 순흥부사로 재임시 순흥에 유배되어 있던 금성대군과 함께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가 사전에 발각되어 평안도 박천에 장류 후 처형당하였으며 정조 때 이조판서로 추증되었다.

 

한편 유허비가 있는 곳에 연못이 하나 있었는데 그가 처형되던 날 연못물이 붉게 핏물이 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 상대전 쪽으로 올라가다 보면 대나무로 둘러싸인 곳에 유형문화재 제90호인 호수종택이 그 위용을 자랑한다. 목조와가 맞배지붕으로 지은 이곳은 광해군 5년(1613)에 호수 정세아의 손자인 해남현감 정호례가 '工'자형으로 건립한 전통적인 양식의 한국식 건물이다.

 

우측에는 최근에 지은 듯한  화장실이 있어 보수공사가 이루어졌으리라는 느낌도 잠시, 마당에는 고장 난 자전거가 방치되어 있고 대청에는 빈 과일박스가 쌓여있어서 아쉬움이 남았다. 이 건물 뒤쪽에는 정세아의 위패를 봉안한 환고사가 절정을 자랑하는 복사꽃의 아름다움을 감상하고 있는 듯했고 그 앞쪽에는 정각사의 스님이 양수선생에게 준 두 그루의 향나무 중 모고헌과 이곳에 심었다고 전해지는 보호수가 300여년의 역사를 자랑하며 호수종택을 지키고 있다.

 

정호례(1604~1672)는 영천 석동에서 내금위장 수번의 둘째아들로 태어나 증 호조참판 의번의 뒤로 양자를 갔다. 뒤에 해남고을에 살았으며 병자호란 때는 어가를 모시고 남한산성에 들어가 성을 지켰으며 평생에 왜구의 물건을 쓰지 않았으며 해남고을에는 공의 선정비가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

 

마을의 맨 위쪽에 위치한 양계정사는 단청, 목공, 와공, 드잡이공으로 나눠 2003년 11월부터 실시된 보수공사가 이루어졌고 뒤편으로 우회도로가 완공돼 이 길을 통과하는 차량들에게 하나의 이정표 역할을 하고 있다.

 

민속자료 제 88호인 이 정사는 인조 23년(1645) 양계 정호인이 관직에서 일시 향리로 돌아와 경관이 좋은 현 위치에 초가 수칸을 짓고 후학을 양성하여 주자서와 근사록을 연구하던 학당이었다. 현재 건물은 정호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하여 1700년대에 후손들이 지은 건물로 고현천을 부감하는 언덕위에 서 있어 경관이 빼어나다.

 

조선후기의 '乙'자형의 특이한 양식으로 되어있다. 양계 정호인은 1618년 진사에 뽑히고 1627년 문과에 올라 부사에 이르렀다. 병자호란 때 부원수가 되어 향병을 모집하여 종사하여 도왔고 1637년 이후 1654년에 이르기까지 여러 차례 주ㆍ군의 수령이 되었으나 사퇴하고 돌아왔다.

 

돌아올 때는 행장이 간단했고 다만 서책만 두어짐 있었다고 한다. 만년에는 사환에 뜻이 없어 주자서와 근사록 등의 책을 취하여 잠심탐구하며 잠시라도 서책을 놓지 않았다. 사후에 대구 청호서원에 배향했다.

 

대전마을에는 이들 이름난 유적 외에도 영모정, 오체정과 근년에 지은 듯한 대전서당 등이 남아있으나 마당에는 대부분 잡초가 우거져 있고 소주병이 나뒹굴고 있었다. 또 떨어진 문짝과 무너진 담벼락이 방문객의 마음을 안쓰럽게 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