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조홍시가’ 읊으며 성경충효(誠敬忠孝) 본받아 - 도천리
인간 삶 가치추구 노계문학, 국문학사에 큼 획
부산ㆍ포항 등 곳곳에 시가비 가사문학관 절실
반중 조홍감이고와도 보이나다
유자 아니라도 품음직도 하다마는
품어가 반길 이 없을세 글로 설워하나이다
노계 박인로가 41세(선조 34, 1601)에 지은 시조인 ‘조홍시가(早紅柿歌)’로 한음 이덕형을 찾았을 때 대접하기 위해 내어놓은 붉은 감을 보고 이미 돌아가고 안 계신 어버이를 그리워하며 쓴 작품이다.
중국 삼국시대에 6세 된 육적이 스승인 애술을 찾았을 때, 대접으로 귫 몇 알을 내놓았다. 선생이 잠시 없는 틈을 타서 어머님을 봉양하고픈 생각이 불현듯 들어 귤을 품에 품게 되었다.
그리고 선생님 앞에 하직인사를 하려하자 그 귤이 쏟아져 나왔다. 왜 안 먹고 품에 품었냐고 물으니 어머니를 봉양하기 위해 그렇게 했다는 고사를 인용한 내용으로 선생의 지극한 효성을 엿볼 수 있다.
도천마을로 들어서다 고속도로 건너편에 바라다 보이는 노계시비에 이 조홍시가가 새겨져 있다. 도계서원이 있는 도천리는 구룡산에서 발한 시냇물이 여러 곳에서 흐르는 냇물과 합류하여 마을 앞을 흐르고 있다.
마을 북쪽은 방산이 있어 주위는 모두 구릉야산으로 되어있고 서쪽은 고지, 서당, 옥천리를 건너 멀리 금오산이 높이 솟아있다. 동쪽은 구릉지를 넘어서 경주시 서면과 접해있어 교통이 편리한 곳이다.
서원 건너편 노계선생의 묘소에서 연못너머의 도계서원을 보고 있노라니 지난해 모 향우회의 행사 도중 열린 내 고향 많이 알기게임에서 ‘노계선생은 이순신 장군의 사위다’가 정담으로 발표되었던 해프닝과 도계서원을 노계서원이라고 말하는 것을 자주 들었던 일이 생각났다.
지난 1955년 이은상씨가 발표한 논문 <노계연구의 정오> - ‘노계는 충무공의 사위가 아니다’에서 이미 밝혀졌듯이 노계는 이순신 장군의 사위가 아니고 도계서원은 그 지방의 지명을 따서 이름을 지었던 다른 여느 서원과 같이 마을이름인 도천의 계곡이라 하여 도계서원이 된 것이다.
도계서원은 박인로의 지극한 효성과 가사문학에서 차지하는 비중으로 인해 연중 외부에서 많은 관광객들이 찾아드는 곳이다.
서원 건너편 산기슭에 묘소가 있고 경상북도유형문화재 제68호인 노계집판목이 보관되어 있어 학생들의 충효교실이나 문화유산 답사코스, 국문학을 배우는 대학생들의 문학기행에서 결코 빠트릴 수 없는 곳으로 가사문학관 건립이나 영천이 자랑할 만한 관광코스로의 개발움직임이 일고 있다.
본관이 밀양인 박인로(1561-1642)의 자는 덕옹(德翁), 호는 노계(蘆溪) 또는 무하옹(無何翁)이다. 그의 생애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는데, 전반이 임진왜란에 종군한 무인으로서의 면모가 두드러진다면 후반에는 독서와 수행으로 초연했던 선비요 문인가객으로서의 면모가 지배적이다. 특히 어려서부터 시재(詩才)가 뛰어나 13세에 대승음(戴勝吟)이라는 한시 칠언절구를 지었다.
무릇 조선의 가사문학은 송강 정철에서 우뚝하였고 노계 박인로에서 꽃피워 고산 윤선도가 시조로 열매 맺었다고 하지만 노계의 시는 타의 영향을 받지 않은 독특한 개성을 지니고 있다.
송강의 시가 정치성을 띠고 도교적 성향을 지녔다면 고산의 시는 자연을 소재로 한 사대부 취향의 일면을 볼 수 있는데 반해 노계의 시는 인간의 삶의 가치를 추구하면서 삶의 구도자로서 생활인의 정서를 담은 것이라 할 수 있다.
송강이 우의정, 고산이 동부승지의 높은 벼슬살이를 한데 반해 노계는 가난한 산림처사로 일생을 살았다. 38세에 무과에 급제하여 수문관ㆍ선전관ㆍ만호에 오르긴 했으나 그것은 벼슬이 목적이 아니고 임진왜란을 당하여 의병에 참전, 백척간두에 선 조국을 구하고자 하는 일념에서였다.
40세 이후 은거하면서 본격적으로 문인활동을 했는데, 그의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조홍시가, 선상탄, 사제곡, 누항사, 영남가, 노계가, 입암별곡 등이 있다. 그의 작품은 ‘노계집’에 실린 것 외에도 많이 있었으나 현재는 소실되고 남아있지 않다. 그는 시조를 즐겨 지었고 완전히 그것을 생활화했지만 국문학사상 의의는 가사문학 쪽에 더 큰 비중을 두고 있다.
‘노계집’은 3권2책인데 1, 2권은 한시문이고 3권은 국문의 가사와 시조로 되어 있다. 우리 고전문학의 가사문학 7편과 시조 67수가 수록된 판목은 총 99매이다.
박인로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감연히 붓을 던지고 경상좌도수군절도사 성윤문 막하에 종군하여 태평사를 지어 사졸들을 위로하고 여러 전투에 참가하여 크게 공을 세웠다. 또한 효성이 지극하여 부모상을 당하여 다같이 3년씩 여묘살이를 했다.
그가 지은 오륜가 속의 부자유친가에 그의 효심이 잘 나타나 있다.
“아비는 낳으시고 어미는 치옵시니 호천망극이라 갚을 길이 어려우니 대순(大舜)의 종신성효(終身誠孝)도 못다한가 하노라… 삼천 죄악중에 불효에 더디 없다 부자(夫子)의 이 말씀 만고에 대법(大法)삼아 아무리 하우불이(下愚不移)도 미쳐 알게 하렸노라.”
한음 이덕형과는 동갑나이에 교분이 두터워 벼슬길의 기회도 있었으나 세속의 명리에 연연하지 않고 성경충효(誠敬忠孝)를 덕목으로 삼아 실천궁행하여 사람을 대함에 공경하고 부모에 효도하며 형제간에 우애하였고 나라에 충성하는 도리를 실천했다.
도산서원과 옥산서원 등 선유의 유적을 찾아 선현들이 걸어간 길을 답습하며 사상과 덕행을 따르고자 노력했고 거제도조라포 만호 때는 청백리로서 선정을 베풀어 주민들이 세운 송덕비가 지금도 남아 그의 업적을 기리고 있다.
1642년(인조 21) 82세의 일기로 세상을 뜨자 1701년(숙종 33) 그의 학문과 덕행을 흠모하는 유생들이 도천리에 서원을 세워 도계서원이라 칭하고 유생을 교육하고 향사를 올리며 그를 추앙하게 되었다. 그 후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가 지난 1970년 복원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재 도계서원 경내(문학박사 심재완)와 부산시 수영구 민락동 현대아파트 관리사무소 앞(현대산업개발), 포항시 북구 죽장면 입암리 입암서원 앞(부산교대 윤해희 교수)에 그의 시비가, 도계서원 옆(전국국어국문학시가건립동호회)에 노계가비, 그리고 부산 민락동 민락공원 무궁화동산(부산 토향회)에 가사비, 경주시 산내면(영천향토사연구회)에 노계의 유적지비가 세워져 그의 학덕과 충효사상을 경모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