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천 문화유산 자료/영천문화유산 답사기

16. 은인들이 즐겨 찾던 살기 좋은 마을 - 신원마을|

이원석(문엄) 2011. 11. 13. 08:08

영천유일 국보 거조암 영산전, 몇 안남은 백제계 고려 건축물

  

영천 유일의 국보가 자리잡고 있는 신원마을은 팔공산에서 동쪽으로 뻗은 일지맥이 갑자기 낮아져 두 갈래로 갈라져서 작은 연봉을 이루고 있으며, 내신리와 외신리에서 발한 시냇물이 서로 합류되어 계곡을 굽이쳐 흐르고 있고 주위에는 기암절벽이 좋은 경관을 이루고 있어 옛부터 은인들이 즐겨 찾던 경치 좋고 물 맑은 곳이며 오곡백과가 풍부하여 살기 좋은 곳으로 이름난 곳이다.

 

안신원은 내신원이라고도 하여 약400여년전에 장경일이라는 선비가 개척하였다 하며 골짜기 밖에 있는 바깥신원(외신원)에는 국보 제14호인 거조암 영산전이 있다. 아미타불이 항상 머문다고 거조라고 붙여졌다는 거조암은 당초 거조사라 하여 은해사 창건보다 앞서는데 신라 효성왕 2년(738) 원참조사가 창건했다고도 하고 경덕왕(742~764) 때 왕명으로 창건했다는 설도 있다.

 

그 뒤 고려시대에는 지눌이 송광사에서 수선사를 세워 정혜결사를 이룩하기 이전에 각 종파의 고승들을 맞아 몇 해 동안 정혜를 익혔던 사찰이기도 하다.

 

영산전은 수덕사 대웅전의 뒤를 잇는 백제계 고려건축인데 그동안 고려 말의 건축이라는 의견과 조선 초의 건물이라는 견해들이 오갔으나 해체ㆍ수리 때 발견된 묵서명에 의해 홍무 8년(1375)에 건립된 고려시대 건축물로 판가름이 나서 몇 안남은 고려건축물에 추가되었다.

 

영산전 안에는 청화화상이 부처님의 신통력을 빌어 앞산의 암석을 채취하여 조성했다는 석가여래삼존불과 오백나한상, 상언이 그린 탱화가 봉안되어 있으며 법계도를 따라 봉안된 나한상은 그 하나하나의 모습이 특이하고 영험이 있다고 전한다.

 

영산전은 지금은 법당으로 쓰이지만 처음부터 그러했는지는 의심이 가며, 안에 나한상들을 안치한 불단이 임시로 마련된 듯한 느낌이 강하고 법당임에도 불구하고 안팎에 아예 단청을 하지 않은 점, 정면이 측면의 세배가 되는 긴 장방형의 평면, 벽면에 설치된 살창 등은 합천 해인사의 장경판고와 많이 닮았다고 한다.

 

게다가 영산전 불단 아래 목판이 많이 쌓여있었다는 인근 주민들의 말로 미뤄 아마도 경판을 보관하는 판고로 지어진 건물이 어느 때부터 법당으로 사용되어온 것이 아닐까? 라고 추측되고 있다.

 

거조암 영산전은 여러 가지 미를 갖춘 건물로 군더더기가 없는 간결을 극한 구성과 짜임새는 필요미의 극치이며, 나뭇결의 자연스러움이 그대로 살아나고 흙벽의 질감이 부드럽고 따스하게 전해오는 백골단청은 그 어떤 화려하고 정치한 단청보다 장엄하고 감동적이다.

 

후불탱화인 영산탱은 그 색조나 화품이 이채로운 불화로 많은 불화들, 특히 조선시대 불화들은 청ㆍ황ㆍ적ㆍ백ㆍ흑의 다섯 가지 원색을 주조로 그려지고 그 가운데서도 녹색ㆍ청색ㆍ적색이 화면을 지배하는 경우가 흔한데, 이런 유의 불화에 익숙한 눈에는 영산탱이 돌연변이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붉은 바탕에 호분으로 선묘만 하였을 뿐 청록색ㆍ흑백색 등은 극히 적은 부분에만 사용하고 있으며 바탕색의 농담변화로써 모든 색을 대신하고 있으므로 붉은 색이 화폭에 가득하나 이 붉은 색은 들뜨거나 튀지 않고 자극적이지도 않으며, 상식을 넘어선 붉은 색을 거의 단색으로 구사하면서 깊은 맛과 전아한 기품을 창조하고 있다.

 

석가여래를 중심으로 4명의 보살, 4명의 불제자, 2명의 천왕만으로 영산회상의 장면을 간략히 압축한 구성이 참신하고, 여타 불화의 거의 변화 없는 필선과는 대조적으로 변화무쌍한 호분의 하얀 선묘가 그려내는 화품도 불화로서는 파격적이다.

 

거조암의 대명사가 된 오백나한상은 영산전을 짓던 비슷한 시기에 만들었으리라 추측하고 있으나 확실치 않으며 영파스님이 오백나한 하나하나의 이름을 적은 사실이 있다하니 적어도 19세기 이전에 이미 나한상들이 조성되었음은 분명하고 정확히는 526구이다.

 

화강암을 깎아 만든 뒤 호분을 입히고 얼굴과 머리에 칠을 한 나한상들의 자세와 표정은 그야말로 천태만상이다. 무릎에 올린 양손으로 점잖게 염주를 돌리기도 하고, 팔짱을 끼고 거드름을 피우기도 하며, 혹은 고요히 명상에 잠기기도 하고, 어떤 것은 크게 웃는가 하면 어떤 것은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기도 하고….

 

인간의 희로애락과 우비고뇌와 어묵동정이 천변만화하여 그대로 인간세상의 한 축도로 보여 진다.조각솜씨가 빼어난 것도, 칠을 올린 재주가 남다른 것도 아니지만 거친 듯 무심한 조각과 졸렬한 듯 천진한 채색이 빚어내는 푸짐한 명랑성이 보는 이들의 눈을 즐겁게 한다.

 

거조암 앞에 있는 삼층석탑(문화재자료 제104호)은 단탑으로 삼층석탑을 올린 형식으로 통일신라 말~고려시대초기로 추측되며 높이 3.15m로 화강암으로 만들었다. 옥신ㆍ옥개가 모두 별석으로 되어있고 기단부의 면석일부와 지대석은 후대에 보수되었다. 지대석은 2단괴임을 각출, 면석은 탱주 한 개와 우주 2개씩을 모각했고 갑석은 부연과 괴임 한 단을 각출했다.

 

옥개는 제1, 제2옥개에서 5단, 제3옥개에서 4단의 받침을 각출했고, 옥신은 우주만을 모각했다. 오랜만에 찾은 거조암에는 영산루와 국사전이 신축되어 그 위용을 과시했다. 영산루에 오르니 신원지의 물빛이 무척이나 푸르렀고 탁 트인 산과 들을 바라보며 여유로움을 느낄 수 있었다.

 

안신원과 바깥신원의 갈림길 중간에 보면 경상북도에서도 희귀한 불호당이라는 작은 집이 있다. 마을의 재액을 없애주고 마을을 수호하며 서낭신을 모시는 이 불호당은 조선영조 45년(1769)에 창건하고 1901년에 중창했다는 기록이 있다.

 

음력 정월초순에 제주를 선정하여 동제를 지내는데 기준은 깨끗한 사람으로서 해산이나 상을 당하지 않았고 연령이 많아야 되며 덕망과 사회적 지위가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 제주로 선정되면 3일전부터 대문에 금줄을 치고 목욕재계하며 마음가짐을 정결하게 하고 매사를 삼가야 된다.

 

서낭당 주위에도 금줄을 치고 외부 인사들의 출입을 금한다. 주위에는 황토를 깔아놓는데 붉은 흙은 귀신이 무서워하는 색깔이기 때문에 잡귀가 못 오도록 하는 것이다. 제기는 새것으로 마련하고, 시장에 가서 제물을 구입할 때는 깨끗한 상점에서 값을 깎지 않고 산다.

 

음력 정월 14일 저녁부터 제물을 차려 보름날 밤 1시에서 2시 사이에 제사를 지내는데 순서는 분향강신, 참신, 헌작 독축으로 한다. 이렇게 마을의 무사를 기원한 후에 각 세대주의 이름이 적힌 종이를 태우는 소지를 올리면서 소원이 성취되기를 빈다. 그리고 음복을 하고 동네의 일을 상의한다. 이 행사는 공동체의 의식과 향토에 대한 사랑을 심어주는데 큰 역할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