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천 문화유산 자료/영천문화유산 답사기

11. ‘꽃ㆍ달ㆍ술’ 선비풍류에 젖어 - 자양 하절 일대

이원석(문엄) 2011. 11. 13. 08:04

문화재ㆍ풍수 간직한 유적지, 관리소홀로 방치돼 ‘폐허화’

 

더 이상 늦출 수가 없었다. 맑은 날을 기다리며 하루, 이틀이 지났고 어느덧 수요일. 원고마감도 마음에 걸렸고 비 오는 날의 산행도 나름대로 의미가 있을 것 같아 김밥을 주문하고 물과 음료수도 챙겼다.

 

미리 식사를 해결하고 출발해도 무리는 없었지만 혼자 산에서 도시락을 먹는 즐거움을 맛보고 싶었다. 추수가 끝난 시간의 여유로움을 간직한 들녘을 지나 영천댐에 이르니 굵어지는 빗줄기와 함께 하늘과 산, 물이 하나였다. 김민기가 불렀던 ‘친구’가 생각났다.

 

“검푸른 바닷가에 비가 내리면 어디가 하늘이고 어디가 물이요 그 깊은 바닷속에 고요히 잠기면 무엇이 산 것이고 무엇이 죽었소…”

 

비 오는 날의 영천댐 물은 원래 이런 색이었던가? 오늘따라 유난히 누렇게 보이는 댐 물을 생각하고 있는데 코오롱 마라톤 선수들이 달려온다. 마라톤 선수들은 비가  와도 쉬지 않고 연습을 하는 모양이다. 시청에서 18㎞. 목적지에 도착했다.  

 

오천 정씨 문중묘소인 ‘하절’과 유형문화재 71-76호로 지정된 강호정, 하천재, 오회공종택, 오회당, 사의당, 삼휴정이 어우러진 곳. 지난해 여름 첫 방문 후 느낌이 너무 좋아 울적할 때마다 찾고 싶었던 곳이다.

 

누렇던 댐 물도 강호정 앞만큼은 푸른빛을 띠고 있었다. 아직 지지 않은 마지막 단풍잎이나 바닥에 떨어진 샛노란 은행잎을 밟으면서 비록 혼자였지만 늦가을 정취를 만끽했다.

 

입구에서부터 호수 정세아 장군이 임란 후 고향에 돌아와 자호언덕에 정자를 짓고 여러 교우들과 학문을 강론했던 강호정, 오천 정씨 문중의 묘소와 강의공 정세아의 신도비를 수호하기 위하여 진주목사인 정호인이 창건한 하천재, 정세아의 넷째 아들인 수번이 그의 셋째 아들 호신의 분가주택으로 건립한 오회공종택, 정석현을 추모하기 위하여 관찰사 권대규의 후원으로 건립한 오회당이 나란히 자리잡고 있다.

 

좀더 안쪽으로 들어가면 정중호ㆍ중기ㆍ중범ㆍ중락 4형제의 우의를 돈독히 하고 유능한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건립한 사의당과 삼휴 정호신이 학문을 연구하기 위하여 건립한 삼휴정이 역사의 풍광을 보여준다. 정호신이 조부인 호수 정세아가 살았던 곳에 정자를 짓고 그 풍경을 노래한 ‘삼휴’는 당시의 선비들이 즐겼던 풍류를 잘 보여주고 있다.

 

“좋은 봄날 꽃을 즐기다가 꽃이 지면 쉬고 맑은 저녁달을 즐기다가 달이 지면 쉬고 한적한데 술을 덜어 즐기다가 술이 다 되면 쉬노라”

 

임진왜란 때 큰 공을 세우고도 논공행상에 개의치 않고 여헌 장현광, 지산 조호익 등과 함께 학문을 논하며 조용히 여생을 마친 호수 선생이 강론했던 강호정을 거쳐 찾아간 하절은 묘터로서는 영천에서 가장 명당자리를 차지하고 있다고 알려져 있다.

 

이곳에서는 꼬깔산(2.5㎞), 기룡산(5.8㎞), 묘각사(7.8㎞)로의 등산로가 비교적 잘 닦여져 있어 가족이나 단체의 산행도 즐길 수 있으며 어린 자녀들을 동반한 경우라면 1.5㎞정도까지 다녀오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산행 후에도 시간적인 여유가 있으면 충효삼거리에서 화북방면으로 들어가 진한 부부애를 느낄 수 있는 오원복 노인의 무덤을 들러보고 옥간정에서 정만양ㆍ규양 양수선생의 형제애를 느끼는 것도 보람된 여정이 될 것이다.

 

자양면 소재지 조금 못 미친 곳에 자리 잡은 오천정씨 문중묘역은 음택(陰宅) 자리 중 으뜸으로 손꼽히는 곳이다. 정효자가 얻은 명당이라는 하절에는 울창한 노송들이 둘레 약 2㎞나 되는 큰 원을 그리며 우거져 있고 99기의 큰 무덤들과 비석들이 있으며 또한 고색창연한 기와집들이 어우러져 있어 많은 이들의 발길을 이끌고 있다.

 

효자는 노촌 정윤량으로 조선 중종 때 인물이다. 선무랑을 지낸 아버지 정차근이 기묘사화를 피해 대전동에서 노항으로 옮겨올 때 겨우 다섯 살이었으나 효성이 지극하여 원근에서 이름대신 정효자로 불렀다고 한다.

 

아버지가 병석에 눕자 옷을 벗고 자리에 누운 일이 없었고 먹고 자는 것조차 잊어버렸다. 아버지 머리맡에서 병간호를 했으나 애석하게도 아버지는 세상을 떠났고 묘터를 잡아 장례를 치르는데 한 백발노승이 지나가면서 “정 효자 댁의 묘소를 어찌 이곳에 쓰는지 이상한 일이로다”하면서 혼잣말처럼 중얼거리고 지나갔다.

 

이 소문을 들은 상주 정 효자는 일을 중지시키고 부리나케 그 노승을 뒤쫓았다. 십리쯤 가서 고개를 넘으니 뜻밖에도 그 노승이 기다리고 섰다가 “상주가 올 줄 알았다” 하면서 정 효자를 이끌고 기룡산(騎龍山) 기슭에 와서는 지팡이로 혈을 짚으며 “이 혈은 기룡의 좌장혈(左掌穴)이요, 부귀를 겸하여 가운이 융성할 것이며 힘차게 내리쏟는 기룡의 정기를 받았으니 위인이 날 징조라. 청룡 백호가 세 겹으로 둘려졌으니 귀인이 날 터이며 물 흐름이 보이지 않으니 부자도 날 것이요, 이와 같이 크고 귀한 판국에는 손세도 좋아 이 세상에 바로 정 효자요”라고 했다.

 

정윤량은 이 노승을 집으로 모셔다가 후히 대접할 생각으로 소매를 끌었으나 노승은 사양하며 “소승은 신령의 명을 받고 온 설학(雪學)이요, 다시 만날 날이 있을 것이니 너무 심려하지 마시고 오늘은 길이 바빠서 이만 가겠소.”하고는 기어이 떠났다.

 

뒤따르던 정 효자가 언덕 위에 오르니 노승은 이미 온데 간 데 없었다. 정 효자는 여묘살이 삼년을 마치고 퇴계 이황 선생 문하에서 수학하여 뒤에 많은 제자들을 길러내었고 향풍(鄕風)도 예법에 맞춰 다시 고친 명성이 높은 학자가 되었으며 임고서원 건립에도 많은 공을 끼쳤다.

 

‘할 말 없는 무덤이 없다’지만 하절에서는 많은 무덤 중에서도 두 개의 무덤이 후대로 내려오면서 더욱더 주목을 받고 있다. 의병장 호수 정세아 무덤 앞에 있는 장남인 백암 정의번과 종 억수의 무덤이다.

 

정의번은 임진왜란 때 영천성을 수복한 후 경주성 탈환을 위해 호수공을 따라 출전했다가 호수공이 적에게 포위되어 위험에 처하자 세 차례나 아버지를 구출하기 위해 적의 포위망을 뚫었고 아버지는 위험을 벗어났다.

 

아버지의 무사함을 알지 못한 백암은 다시 적진으로 들어가면서 종 억수에게 “나는 아버지를 따라 죽음이 당연하지만 너는 죽을 까닭이 없지 않느냐? 내 곁을 떠나거라.”고 말했으나 억수는 말고삐를 잡고 눈물을 흘리며 “군신과 부자와 노주는 일체라. 주인이 아버지를 위하여 죽기를 결심하셨는데 종이 어찌 혼자 살겠습니까?”라며 만신창이가 된 몸으로 함께 적진에 쳐들어가 장렬한 최후를 맞았다.

 

호수공이 사후에 정의번이 평소 입던 옷과 갓으로 경주 싸움터에 가서 초혼해 와서 빈소를 지어 통곡하고 당시에 서로 마음을 통하던 지우들에게 애사(哀詞)를 구해서 관에 넣고 시체 대신 장사를 지내니 시총(詩塚)의 유래가 되었다.

 

정의번 묘소 앞의 ‘충노억수지묘(忠奴億壽之墓)’라고 적힌 억수의 무덤은 주인의 무덤에 비해 비록 작고 초라하지만 정씨 집안에서 4백여 년간 묘사 때마다 그의 충복됨을 잊지 않고 제수를 차려 그의 넋을 달래주고 있다.

 

인근에 있는 강호정, 오회공종택, 오회당, 하천재, 사의당, 삼휴정 등 문화재들을 둘러보고 삼휴 정호신이 쓴 한시 ‘삼휴(三休)’를 읊으며 풍류를 즐기는 여유를 가져보는 것도 좋을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