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옛길 걸으며 영천읍성 자취 더듬어 - 영천읍성
자연지형 최대한 활용, 1591년 원사용 군수 축성
“이 읍성터는 1591년(선조 24)에 축성되었으며 임진왜란(1592년) 당시 충의의 화신인 3,600여명의 창의정용군(倡義精勇軍)에 의하여 전국 최초로 복성된 것임.”
영천중앙초등학교 교정에 세워진 이 영천읍성비(영천읍성비)는 지난 1995년 6월 18일 영천향토사연구회에서 허물어진 영천읍성의 북동과 남서에 세운 유허비로 호연정 앞에도 세워져 있다.
인류의 생활이 시작되면서 쟁란(爭亂)은 그칠 사이가 없었고 모든 국가나 집단은 타 집단의 침략을 대비하고 스스로의 집단을 보호하기 위해 성곽을 쌓았다.
행정 중심지에는 도성(都城)과 읍성(邑城)을 만들었고 도성과 읍성의 방어체제를 이중으로 구축하기 위해 멀리 외곽지대에 쌓은 외성(外城)이 있었다.
또한 공격이나 방어에 중요지점이 되는 산정이나 해변, 그리고 교통의 요지에는 진성(鎭城)을 쌓았다. 이러한 모든 성들은 각기 고립되어 있지 않고 지리적으로 상호 밀접한 연락과 원만한 통행이 가능하도록 연결되어 있다.
영천읍성은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1년 전인 1591년 원사용 군수가 재직할 때 쌓은 성으로 남쪽의 높은 암벽을 최대한 이용하고 부족한 지역은 인위적으로 축성했으며 북쪽으로는 마현산을 이용하고 역시 부족한 지역은 흙으로 쌓았다.
동쪽방향은 현재 중앙초등학교 동쪽계곡인 도수장골을 이용했고 동문루(東門樓) 밑에서 남천에 흐르는 구간은 원래의 계곡에 인위적으로 더욱 깊은 구릉을 만든 것으로 얼마전까지만 해도 뚜렷이 흔적이 남아 있었다고 한다.
서쪽은 주택이 밀집되어 흔적 찾기가 쉽지 않지만 북쪽 마현산에서 서남쪽으로 굽어진 곳에 약간의 토성이 있고 지금도 계곡으로 남아있는 천주교회와 호연정을 갈라놓은 상속골에서 마현산 중턱 교촌동 쪽으로 성이 연결되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영천읍성은 대부분의 도성과 읍성처럼 사방에 각각 성문이 있었으며 남문에는 문루인 영양남루(永陽南樓)가 있었다. 또한 성안에는 열무당(閱武堂), 무기고 등 군사시설이 있었다.
대부분의 성처럼 영천읍성도 주성의 주위에 2-4개의 보조성이 있어 서로간의 긴밀한 연락으로 고립을 피하고 함락되었을 때도 신속히 피할 수 있도록 만들어진 나래성〔翼城〕으로 지리적 형태로 보아 서문통 일대가 나래성의 구실을 했을 것으로 추정되어 있다.
옛날 동헌(현 보건소)을 중심으로 일대를 관아터라 부르고 동편은 형방터, 서편은 이방터라 지칭된다. 문외동은 옛날 도살장 혹은 활을 쏘는 사장이 있었다고 지칭되는 서당골, 용이 승천한 용장골, 창구동에는 질청마당, 옥터, 객사터, 성문터, 호방터 등이, 교총동에는 마을에 동제나무가 있어 동네의 안위를 기원했다 하여 불러진 지당골과 서만리골 등 다양한 옛 지명이 정취를 더해주었다.
염매시장 사이 길로 복개천을 따라 걸으니 성돌이 축대로 사용된 몇몇 집들이 나타났고 동문 터는 지금의 동문교회 부근으로 추정했다. 이어서 성안 구석구석을 걸으며 회원들간 약간의 이견은 있었지만 남문 터는 조밭골 영천중앙어린이집, 서문 터는 호연정-소방서 사이일 것이라고 어느 정도 가닥을 잡았다.
문제는 북문 터. 조선시대에 그려진 광여도나 해동지도, 여지도, 동여도, 대동여지도 등이 조금씩 차이가 있었고(북문이 나타나지 않은 곳도 있음) 길도 많이 바뀌어 추측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객사터인 성신의원 일대를 거쳐 구 등기소 밑 옛길을 따라 죽 올라가니 가옥 한 채가 길을 가로막았다. 비탈길을 올라 향교 뒷산을 걸으니 다양한 종류의 기와조각들이 발견되었다.
통일신라나 고려, 조선 등 시대를 달리하는 여러 종류의 파편들이 나와 큰 건물이 있었을 것으로 짐작해 보았고 절을 나타내는 卍자 문양이 새겨진 기와를 발견, 절터라는 의견도 나왔으나 단정을 짓지는 못했다.
기와조각이 발견된 조금 아래쪽을 북문으로 추정해보며 조선시대 옛길을 걷는 듯한 기분으로 마현산을 거슬러 밀알야간학교 쪽으로 내려왔다.
지형이 많이 바뀌고 고증할만한 전문적인 소견이나 자료가 부족해 이날 답사에서는 영천읍성의 형태에 대한 대략적인 추측만 할 수 있었다. 더 늦기 전에 시 차원에서 전문가들을 초빙, 당시의 모습을 복원해 문화재 탐방코스로 조성할 수 있었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영천읍성은 이조 선조 때 축성한 것으로 안다. 선조는 24년 12월 폄거(貶去)라는 불명예를 안고 떠나고 만다. 이는 축성에 따른 백성들로부터 원망이 높아진 때문이다.
영조 36년(1760) '여지도서'에 보면 영천읍성은 무너져 없어지고 성터만 조금 남아 있다는 기록이 있는 것을 보면 오래 전부터 성터가 사라지고 없어졌음을 알 수 있다.
읍성은 임진왜란 일어나기 1년전 군수 원사용이 재직할 때 쌓은 성이다. 마현산을 배경으로 정방형에 가까운 전형적인 성으로 성벽의 사방 중앙에는 동문, 서문, 남문, 북문 등이 단층누각 지붕으로 되어있다. 그리고 성의 둘레가 1,902尺 이라고 하였으니 약 6만평이 되지 않을까 생각된다. 성의 모양이 정사각형이고 그 둘레가 1,902척 이므로 한변이 475.5척이다.따라서 그면적 226,100.25척이니 읍성은 63,700평이 되는 셈이다.
우선 성의 외각을 살피면 남쪽은 흐르는 남천에 청계석벽을 이용하여 높은 축대를 쌓아던 것이다.그래서 남천은 자연적으로 해자가 되었다. 그리고 중앙에 읍성을 상징하는 영양남루("영양지"권1公解條에 영양남루란 명칭만 전한다)가 있었다. 따라서 남문을 통과 하려면 반드시 해자인 남천을 건너게 마련이다. 남문 동편 언덕 위에 명원루가 있다.지금의 조양각을 말한다.
그 경계를 추정해서 살펴보면 북쪽은 마현산을 이용하고 동쪽방향은 현재 중앙국민학교 동쪽계곡(도수장골)을 이용하여 남천까지 서쪽은 충혼탑 부근 교촌동 197번지 일대에서 남천쪽으로 계곡이 있는 상속골(천주교회와 호연정을 갈라 놓은 곳)이다 물론 남쪽은 남천으로 향해있는 절벽을 이용하였다.
그리고 읍성주위로 2~4개의 보조성이 있어서 성간 왕래가 되도록하였다. 지금도 영천지방 사람들은 북문통, 남문통, 동문통, 서문통이라는 지역명을 실생활에 사용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