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항 김희준 선생이 보내온 영천관련 사실
안녕하세요?
입암유산록 번역하고 답사하면서 알게된 몇 가지 사실을
국장님께 알려 드리고 싶습니다.
아래의 5가지 문제에 대하여 입암유산록 번역의 각주에 언급하였지만,
참고하시길 바랍니다.
1. 정몽주 선생은 임고면 우항리의 친가에서 태어나고 자랐습니다(명종실록).
당시의 풍속대로 외가에서 태어났다고 하는 것은 잘못된 인식입니다.
외가에서 태어났다고 하는 기록이 없습니다.
15세 무렵에 관례를 하고 몽주(논어의 몽견주공)라고 개명하고,
19세에 부친상, 29세에 모친상을 당했는데, 모두 시묘살이를 하였고, 30세에 효자 정문이 내려진 곳은 친가이지 외가일 수가 없습니다.
임고서원을 부래산 아래의 포은 구거에 세울 때 가묘도 함께 세웠습니다.
포은의 부친 묘비에도 포은의 조부 때 영일 청림에서 영천 우항리로 이거하였다고 하였습니다.
포은 당시에 우항리는 영일 정씨 동성촌이 형성되어 있었습니다.
포은의 후손 정거가 선조 당시에도 포은의 구택에 살고 있었습니다.
2. 포은의 순절처가 개성 선죽교라고 하는 것은 중학교 국사교과서에도 실려 있었을 정도로 상식이 되어 있습니다.
포은의 실제 순절처는 포은이 관직 생활하며 살던 집(현재 숭양서원 자리)이 있던 개경 태묘동 동구의 누각 주춧돌이
있던 자리입니다. 용비어천가에 자세합니다. 용비어천가를 완역은 아니지만 처음으로 번역한 영천 출신 사학자 김성칠 교수가 이 점을 언급하지 않은 일은 좀 의아합니다. 포은의 순절처 고증에 관하여서는 문경현 교수의 <포은 정몽주의 순절처 신고찰>이란 논문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많은 정보를 얻으실 수가 있을 것입니다.
3. 포은 생존 당시에 포은이 공신에 책봉되고 영천군수 정유가 포은이 30세에 효자 정려문이 내려진 일을
기리기 위해 정려문 아래에 '효자리'라고 하는 비석을 세웠습니다.
따라서 비석의 명칭은 '포은 정몽주 효자비'입니다.
현재 문화재 등록 명칭은 '포은 정몽주 유허비'라고 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우항리의 도로가 안내 간판이나 효자비각 앞의 안내판도 포은 유허비라고 하였는데 명백히 잘못된 것입니다.
유허비는 사후에 그 유적을 잊지 않기 위해 세우는 표적비입니다.
문화재 관리 당국에서 명칭을 고치도록 영천향토사연구회나 문화원에서 건의해야 할 것으로 봅니다.
4. 포은이 나고 자란(생장) 집터를 저는 부래산 아래의 옛 임고서원터라고 생각하는데,
현재의 효자비 위치나 다른 기록과 잘 부합하지 않는데,
집터를 영천향토사연구회에서 고증해 보시길 바랍니다.
5. 병와 선생은 그 출생지나 뿌리가 서인인 가능성은 있지만,
병와 선생은 실질적으로 남인입니다.
송시열과 치열하게 대립했던 남인의 대표적인 인물인 식산 이만부와 깊이 교유하였고,
영남 퇴계학의 정맥을 잇는 갈암 이현일의 학통을 계승하는 학자로도 인식되고 있습니다(한국국학진흥원 퇴계학맥도).
또 입암유산록에서도 '吾嶺(우리 영남)'이라고 하여 근기 출신이면서도 영남 남인으로서의 의식을 보여주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