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원석(문엄) 2011. 9. 3. 01:10

1856년(철종 7)에 편찬된 하양현의 읍지《화성지(花城誌)》에 따르면 환성사는 조선시대에는 임고서원에 속하였고, 숙종 때는 박서봉(朴瑞鳳)과 황윤중(黃允中)이 여러 차례 상소하여 하양향교에 속하게 되었으며 지금은 영천 은해사의 말사에 속해있다.

 

  

 

 

 

 

 

 

▲ 응진전

 

▲ 성전암 

 

 

 

 

▲ 명부전 

 

▲ 수월관

 

 

▲ 용연(龍淵)

 

 

 

▲ 공덕비

 

▲ 일주문

 

절의 이름은 이 산이 성처럼 절을 둘러싼 형세가 마치 고리와 같아 환성사라고 이름 지었다고 한다.

 

특히 이절은 전해 내려오는 전설이 많기로도 유명하다. 예전 절로 오르는 입새에는 그 모양이 자라와 너무 닮아 자라바위로 불리는 바위가 있었다.

 

심지스님이 이곳에 절터를 잡을 때 이 자라바위를 보고 "이 바위가 있는 한 우리 절의 번영은 쇠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예언하셨다고 한다.

 

천년 세월을 버티고도 꿋꿋하게 서있는 대웅전의 모습은 그 많은 전설을 담고도 또 다른 전설을 만들 것과 같이 정겹다.

 

창건은 신라 흥덕왕(835년)때 심지왕사(心地王師)가 조성하였으나, 고려 말기에 화재를 당하였다.

 

이후 조선 인조 13년(1365년) 신감대사(神監大師)가 다시 중창하였으며, 광무원년(1897년)에 항월대사가 삼창하였다고 한다.

 

조선 초, 불교가 억압을 받는 속에서도 환성사만은 일반 서민에서 사대부가의 아녀자에 이르기까지 시주의 내왕이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절에 관한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젊어서는 덕을 베풀어 여러 사람의 존경을 받았으나 나이 들자 많은 손님들을 번거롭고 귀찮게 여기게 된 스님이 계셨다. '우리 절에 사람이 많이 드나드는 것은 틀림없이 자라바위 때문일 것이다'라고 속으로 생각한 그는 사람들을 시켜 자라바위 목을 자르게 했다.

 

지시대로 바위의 목을 정으로 깨뜨리니 갑자기 연못이 붉게 변했고 이런 일로 절을 구경하려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그러던 중 어느 한 객승(客僧)이 “이 절에 사람이 많은 것은 저 연못 때문이니 저것을 메우시오” 하고 사람들이 줄어지는 비방을 일러주며 절을 떠났다. 이 말을 듣고 주지가 동네사람들을 불러다 못을 메우기 시작했다.

 

런데 한 삽을 퍼 넣자 갑자기 못 속에서 금송아지 한마리가 날아오르더니 슬피 울고 산 너머 동화사 쪽으로 가버리는 것이었다. 그러자 동네 사람들을 일을 멈추었고 주지는 절의 스님들을 동원하여 못을 메우게 했다.

 

꼬박 100일이 걸려 못을 메우고 마지막 흙 한 삽을 퍼붓자 별안간 온 절에 불이 붙기 시작하여 그 웅장하던 집채들을 모조리 태우고 말았다. 겨우 대웅전과 수월관은 남았으나 이후로 사람들의 발길은 끊어지고 말았다.

 

1990년 이곳 주지인 진담스님이 당시 무학산을 넘어와야 했던 험난한 사찰 진입로를 하양읍 대곡리 입구 계곡으로 새로이 도로를 개설하였다.

 

환성사 대웅전은 현재 보물 562호로 지정되어 보호되고 있다.

 

영천뉴스24